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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데이터로 입증한 다양성의 힘, 감독 장지윤

 

 

장지윤 감독은 영화 ‘낯선 이별의 연습’ ‘선택’ 등을 연출한 독립영화 감독이다. 떠오르는 신인 감독이었던 그는 2017년 돌연 영화계를 떠나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찾기 위해서다. 기시감이 드는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는 그를 3월 4일 서울 용산구 동아사이언스 사옥에서 만났다.

 

Q갑자기 KAIST에 
입학한 이유는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영상원을 다닐 때부터 KAIST 문화기술대학원을 알고 있었다. 영화와 기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전방뿐만 아니라 좌우 벽면을 스크린으로 활용하는 ‘스크린X’ 등 영화 기술 중 많은 부분이 문화기술대학원 연구실에서 탄생했다.


한예종을 졸업할 때쯤 내가 잘할 수 있는 일과 좋아하는 일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 고민이 많았다. 주변에 쟁쟁한 연출가들이 많아 내가 소위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직업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기획자로서 살아보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좋은 기획자가 되려면 데이터를 보는 일이 중요했고, 이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보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영화계는 리스크가 굉장히 큰 산업이다. 대부분 수십억, 수백억 원의 빚을 내서 영화를 먼저 찍고, 이를 상영해 자금을 회수하는 구조다. 그런데 많은 영화들이 손익분기점을 넘지 못한다. 관객이 좋아할 만한 콘텐츠를 선별할 수 있는 객관적인 데이터가 있다면 이런 위험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할리우드에서는 이런 움직임이 이미 시작됐다. 워너 브라더스 픽처스, 20세기 폭스 등 유명 제작사들이 영화의 흥행을 예측하는 인공지능(AI) 시스템을 도입해 활용한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시장을 분석하고, 대중의 니즈를 분석하겠다는 시도다. 우리나라 영화계에도 이런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 비슷한 연구를 할 수 있는 KAIST에 지원하게 됐다.

 

Q한국 영화의 남녀 편향성에 대한 
논문을 2019년 발표해 화제가 됐다

 

그때 평생 들을 욕을 다 먹은 것 같다. (웃음) 2018년 국내 개봉한 40개 영화의 장면에서 편향성을 분석한 연구였다. AI 프로그램으로 영화 속 캐릭터를 분석해보니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 시간은 남성의 56% 수준이었고, 여성은 슬픔, 놀람, 공포 등 수동적인 감정을 보이는 경향이 많았다는 내용이었다. doi: 10.1145/3359300


사실 어렸을 때부터 막연히 생각했던 내용이다. ‘왜 이렇게 남자 주인공인 영화가 많지’ ‘여성 액션 영화는 왜 별로 없지’ 하고 궁금했던 것들이 이 연구에서 데이터로 증명됐다. 특히 한국 영화의 편향성이 할리우드 영화보다 두 배 심각하다는 점은 한국 영화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한국 영화가 양성평등에 있어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다. 영화계에 양성평등을 지향하고자 지난해 9월 개최된 ‘벡델데이 2020’에 심사위원 자격으로 참석할 기회가 있었다. AI 분석으로 양성평등과 다양성을 갖춘 영화 10편을 선정했는데, 논문을 작성하던 2018년에 비해 여성 영화가 훨씬 늘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편향성은 기계적으로 여성 영화를 만든다고 다 해결되지 않는다. 벡델데이 2020에서 분석해보니 여성 영화 안에서도 여성에게 씐 편견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성 영화가 특정 장르에 국한돼 있기도 했고, 여성은 안경을 쓰지 않는 등 외모적인 편향도 심했다. 편향성을 바로잡기 위해 갈 길이 멀다.


논문을 쓰면서 이런 현실 속 차별에 대해 인지하게 됐다. 나는 현실에 닿아있는 여성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이전에 내가 만든 영화는 ‘재미’가 중요한 요소였는데(졸업작품도 배우 김정현 주연의 B급 코미디였다), 대중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영화는 편향적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내가 만든 작품이 누군가에게 불쾌하지는 않을지를 우선으로 고민하게 됐다.

 

 

국내 영화계에도 연구소를 설립해 데이터 분석을 활용하는 생태계를 갖출 필요가 있다. 관심을 갖는 만큼 환경은 변할 수 있다

 

 

 

Q데이터 분석으로 영화계의 흐름을 
예측해본다면

 

AI로 영화를 분석하기 위해 수업시간에 배운 코딩을 활용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내가 10시간이 걸려 해결한 문제를 전산학과 출신 동료가 2시간 내에 풀어내는 것을 보고 그들과 협력하는 길을 택하기로 했다. 대신 나는 데이터를 분석할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국내외를 따지지 않고 논문을 정말 많이 읽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논문이 있는데, 다양성이 보장된 영화일수록 수익률이 높다는 내용이었다. 다양성을 보장하려면 인종, 성별, 성소수자 등 다양한 사람이 모여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다양성을 보장해야 하는 이유를 상업적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찾는 경향이 있는데, 다양성을 존중한다는 것은 공감의 범주를 넓힌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금 미디어의 방향성과도 일치한다. 많은 미디어에서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은희 작가가 드라마 ‘킹덤’을 쓰면서 ‘넷플릭스는 의견은 안 주고, 돈만 준다’고 한 인터뷰도 최근 여러 매체가 다양성을 존중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변화가 도덕성에만 기대는 것이 아닌, 상업적으로도 가치가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알라딘에게 가려졌던 자스민을 재조명했던 2019년 개봉 영화 ‘알라딘’이나 흑인 귀족의 이야기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 등이 큰 성공을 거뒀다. 지금 내가 기획 중인 작품은 배우 한소희 주연의 느와르다. 여성 단독 주연 느와르라는 점이 독특하다. 

 

 

 

Q지금 한국 영화계에 
필요한 변화가 있다면

 

영화를 데이터로 분석한다고 하면 아직 예술계에서는 부정적인 시각이 많다. 편향성 관련 논문을 썼을 때도 같은 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욕을 먹는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데이터로 창작자의 아이디어를 제한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분명한 점은 데이터를 바탕으로만 영화를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를 판단의 근거로 활용하자는 것이다. 사실 아직 영화계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직감으로 결정되는 부분이 많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예술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판단에 데이터라는 근거를 더하면 수백억 원이 투입되고 수백 명의 스탭이 동원되는 영화를 제작하는 데 드는 위험부담을 줄일 수 있다.


넷플릭스, 디즈니 등은 데이터 저널리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좋은 예다. 콘텐츠를 제작하고 홍보하고 소비자에게 노출하는 모든 과정이 철저히 데이터 기반으로 이뤄진다. 예를 들어 ‘승리호’라는 영화 한 편에도 수십 가지 포스터를 등록해 두고, 소비자가 좋아하는 성향을 분석해 노출하는 식이다. 여성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공식 포스터보다 배우 김태리 단독 포스터가 먼저 뜬다.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 노출되는 영화의 라인업도 다르다.


국내 영화계에도 이렇게 데이터 분석을 활용하는 생태계가 갖춰질 필요가 있다. 특히 연구소가 절실하다고 생각한다. 석사과정 중 미국 학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영화의 편향성에 관련된 연구 세션이 따로 있을 정도로 체계적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 페이스북 등 다양한 기업의 관심을 받았다.
또 미국에는 미디어 속 젠더(gender)를 연구하는 지나 데이비스 미디어 젠더 연구소 등이 다양성을 보장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성 감독, 배우, 기획자가 소속돼 있는데, 지속적으로 양성평등 관련 보고서를 내고 이들이 겪는 불합리, 임금 차이 등을 개선하기 위해 활동한다. 구글과 함께 GD-IQ라는 영화 속 성별 표현을 분석하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기도 했다.


한국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매년 발표하는 영화산업 통계자료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지표조차 없는 실정이다. 내가 발표했던 편향성 논문도 ‘아직 아무도 하지 않은 일’이라 관심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예술 영화에 대한 지원을 늘려 장기적인 발전을 모색해야 한다. 사실상 예술 영화가 상업 영화로 입성하려는 감독들의 디딤돌 역할을 하는 데다, 상업 영화에서 충족하지 못하는 다양성을 예술 영화에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손해 볼 수 있는 이야기도 할 필요가 있다.


관심을 가지는 만큼 환경은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해 벡델데이 2020에 참석한 것도 내가 안 하면 아무도 안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서다. 최근에는 웹드라마 등 미디어를 접할 수 있는 플랫폼이 더욱 다양해지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다양한 매체의 경향성을 분석하는 연구로 한국 영화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다.  

 

202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애 기자 기자
  • 사진

    이규철
  • 디자인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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