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2월 26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복합문화공간 에무. 지하까지 미로처럼 이어진 전시 공간에 들어서자 곳곳에 설치된 수십 대의 스피커와 한가운데 놓인 네 대의 피아노가 눈에 들어왔다. 전시회장이 아니라 꼭 공연장 같았다.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관람객과 연출가가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다 영감이 떠오르면 연주로 이어졌다. 메인 피아노의 연주가 시작되자, 여기에 연결된 세 대의 디스클라비어(자동 연주 피아노)에서 입력된 알고리즘에 따라 연주에 맞는 음악이 재생됐다. 이들이 만드는 하모니는 연주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입체음향 시스템을 통해 더욱 풍성하게 관람객들에게 전달됐다. 연주에 따라 전시장은 산뜻한 숲속에서 시원한 바닷가로, 뜨거운 한낮에서 아름다운 석양이 펼쳐진 해질녘으로 시시각각 바뀌어 갔다.

 

 

양자역학의 법칙에서 영감을 얻는 예술가


이번 전시의 제목은 ‘캔버스(CANVAS)’.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 ‘차세대 열전 2020!’ 발표작이다. 한국예술창작아카데미는 문화예술 전문인력 교육기관으로 다양한 사업을 통해 예술창작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전시를 이끈 강신욱 연출가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소리를 그려내고 싶다는 열망을 작품에 담았다”며 기획 의도를 설명했다.


그는 작은 입자와 파동이 모여 빛과 소리가 되는 것처럼, 화면과 악기가 내는 소리 전체를 하나의 공간에 유기적으로 연결해 작품으로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보통 피아노 공연에서는 현이 맞닥뜨리는 소리나 페달음을 노이즈로 인식해 최소화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는 이런 소리까지도 전체를 구성하는 일부분이라고 생각해 오히려 여기에 마이크를 설치했다. 노이즈도 음악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그는 평소 우주는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무엇으로 구성돼 있는지 등 근본적인 물음에 대해 궁금함이 많았다고 했다. 양자역학과 상대성이론 등 세상을 설명하는 과학이론에도 관심이 많았다. 이번 전시회의 대한 힌트도 과학에서 얻었다. 20세기 초에 양자역학이 나오면서 파동으로만 생각됐던 빛이 입자의 성질을 띤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강 연출가는 빛 입자의 단면을 하나씩 자르면 그게 각각의 이미지가 될 것이라고 상상했다. 그리고 이런 단편적인 이미지를 모아 음악과 화면으로 재구성했다. 그 결과 한 공간 안에서 악기가 내는 음악과 화면이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작품이 탄생했다.


많은 음악가들이 그렇듯, 강 연출가는 5살 때 바이올린을 잡은 순간부터 음악가의 삶을 살고 있다. 대학에서 작곡과 전자음악을 전공한 뒤 15년간 광고 음악 감독으로 살았다. 음악을 만들기 위한 기술적인 부분을 익히는 시간이었다. 그는 “광고음악에서는 광고주의 요구에 맞춰 적절한 음악을 빠르게 만들어 내는 게 중요하다”며 “그 덕분에 웅장한 오케스트라 연주곡부터 트로트, 힙합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서른이 넘어 경제적인 여유를 가진 뒤 돌아보니, 정작 ‘강신욱의 음악은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시작됐다. 이후 예술가로서의 음악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2018년부터 본인만의 음악을 만들어 공연을 하고 있다. 처음에는 대중적인 음악이 아니라 큰 반응을 얻지 못했지만, 최근에는 팬들이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국내보다는 유럽 팬들이 더 많다고 한다.


평생 음악을 만들며 살아왔지만 과학에 대한 관심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천체망원경을 가지고 틈틈이 별을 보러 가는 아마추어 천문학자다. 은하수가 보일 정도로 공기가 맑은 최전방에서 군 생활을 한 것이 계기가 됐다. 지금까지도 즐기는 유일한 취미 생활이다.

 

음악은 기술과 함께 발전한다


강 연출가는 음악계에서 ‘얼리어답터’다. 그의 전공은 입체음향을 구현하는 최신 기술 중 하나인 ‘앰비소닉스(ambi- sonics)’로, 국내 실무 1세대 작업자 중 한 명이다. 우리가 가상현실(VR) 안경을 끼고 고개를 움직이면 그 각도에 맞게 화면이 바뀌는 것처럼, 소리도 굴절 방향과 파장이 도달하는 위치에 따라 다르게 들린다. 이를 조절해 소리를 공간 속에서 실제처럼 구현하는 것이 앰비소닉스 기술이다.

 

이제 음악가들도 기술적인 부분을 익히는 것이 필수인 세상이 됐다. 새로운 기술로 얻은 영감이 다른 창작활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가상현실의 화면에 맞춰 소리를 제대로 구현하려면 대상을 하나의 구와 같은 유기적 공간에 두고, 스피커의 음상이 움직이며 소리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번 전시에 수십 대의 스피커가 관객을 둘러싸고 있는 이유다. 관람객의 움직임에 맞춰 각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을 달리하며 소리의 현실감을 높인다. 그는 “앰비소닉스라는 개념 자체는 1970년대부터 개발됐다”며 “하지만 최근 스마트폰에서도 VR을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 그를 돕는 또 하나의 기술은 디지털 음성 워크스테이션(DAW)이다. 그는 “DAW와 관련 기술만 있으면 고퀄리티 음향을 공간과 매체에서 재현하거나 표현할 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는 “처음 DAW와 사운드 엔지니어링 시스템을 배울 때는 정보조차 얻기 힘들어 독일 원서나 영어 논문을 단어 하나하나씩 번역해가며 독학했다”며 음향 기술이 매섭게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십수 년 전만 해도 이 프로그램을 돌리면 컴퓨터가 느려져서 대부분의 작업은 ‘오류와의 싸움’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영화나 드라마에 사용되는 높은 퀄리티의 음악도 DAW로 손쉽게 작업이 가능해졌다. 기술을 활용하며 음악 시장도 함께 발전했다. 이제 ‘다크나이트’ ‘인터스텔라’ 등 대부분의 영화 음악이 DAW로 만들어진다.


강 연출가는 “이제 음악가들에게도 기술적인 부분을 익히는 것이 필수인 세상이 됐다”며 “전통적인 스코어(악보)를 쓰는 작곡가들은 직접 제작자가 되지 않는 이상 살아남기 힘들어졌다”고 말했다.

 

인공지능 예술가? 당연히 YES


강 연출가는 ‘맨땅에 헤딩’ 전문이다. 앰비소닉스를 배웠던 것처럼 지금은 자신의 음악에 인공지능(AI)을 접목하기 위해 파이썬을 공부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도 프로그래밍을 활용했다. 

 


강 연출가가 연주하는 피아노의 소리에 따라 신디사이저, 디스클라비어 등 다양한 악기에서 조화로운 소리가 각각 나오도록 알고리즘을 구현했다. 물론 아직은 AI를 도입했다기보다는 단순한 코딩 수준이다. 하지만 그는 “입체음향 기술도 혼자 이것저것 시도하다 보니 나만의 매뉴얼이 생기는 시점이 왔다”며 “다양한 기술을 음악에 활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고 싶다”고 말했다.


아직은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데 거부감이 있는 예술가들이 많다. 반면 강 연출가는 AI를 비롯한 과학 기술에 긍정적이다. “과학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겪던 많은 문제가 해결된 것은 분명하다”며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는 것이 다른 창작 활동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특히 예술에서 AI가 인간을 대체할 수 있겠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렇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고차원의 AI가 구현되면 얼마든지 사람을 대체할 수 있다”며 “광고 음악처럼 어느 정도 규칙이 있는 경우에는 더욱 빨리 실현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AI를 홀로그램에 접목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그는 “홀로그램과 소리를 접목해 또 하나의 나를 만들어 합주하는 것이 꿈”이라며 “고등학교 시절의 나, 노인이 된 나를 한 자리에 세워보고 싶다”고 말했다.  

 

 

2021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애 기자 기자
  • 사진

    홍덕선
  • 디자인

    이한철

🎓️ 진로 추천

  • 음악
  • 컴퓨터공학
  • 미술·디자인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