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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색깔 연출하는 화청소

연보라빛 라일락꽃이 하얗게 되는 이유

아직 한라산 산정에 흰 잔설이 남아있는 삼월. 먼 남쪽 바다로부터 따사한 해풍이 불어오면 어느덧 제주도는 섬 전체가 노랑 물감을 뿌려놓은 듯 원색의 노란 유채꽃 바다로 뒤덮이게 된다. 신혼부부나 관광객들은 유채꽃의 정취에 취해 잠시나마 속세의 번거로움을 잊은 듯 마냥 어린애처럼 즐거워한다. 그런가 하면 어느새 한라산 자락은 다시 진달래와 철쭉꽃으로 붉게 채색돼 사람들을 부른다.

왜 사람은 꽃에 이끌리게 될까. 무엇보다도 꽃이 연출해내는 여러가지 빛의 영롱한 아로새김 때문이지 않을까.

식물계에 널리 존재하는 색소 물질은 크게 3가지. 광합성 작용과 관련된 녹색 계통의 엽록소(클로로필, chlorophyll), 꽃과 과실의 다양하고 현란한 색깔을 나타내는 화청소(花靑素), 그리고 광합성 보조색소로 주황색 계열을 나타내는 카로티노이드(carotenoid)가 있다. 화청소는 적색, 청색, 자주색 계열을 나타내는 안토시아닌(anthocyanin)과 황색과 적색 계열의 베타시아닌(betacyanin)으로 구성된다. 초롱꽃, 용담의 푸른 빛, 패랭이꽃, 동자꽃의 붉은 빛, 그리고 제비꽃류의 자주빛은 모두 화청소에 의해 발현된다. 화청소는 현란하고 다양한 빛깔을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름다운 패랭이꽃의 빛깔도 화청소에 의해서 나타난다.


고구마 꽃 색깔이 달라지는 이유

화청소는 처음부터 식물 세포 내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세포 원형질이 대사활동을 수행하면서 조건(빛, 온도 등)에 따라 만들어낸 식물의 2차 대사 산물이다. 물에 녹는 수용성으로 식물 세포 내의 소기관인 액포에 가득 차있다.

화청소에 의해 다양한 색깔이 발현되는 첫번째 이유는 화청소가 한가지 색소 물질이 아닌 여러 종류로 구성됐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화청소인 안토시아닌은 15개의 탄소로 이뤄진 플라보노이드(flavonoid)계 화합물의 일종이다. 이 기본 구조에 여러 당류(포도당, 갈락토오스 등)나 수산기(-OH) 혹은 메틸기(-CH3)와 같은 원자단이 붙어서 다양한 안토시아닌이 만들어지고 그에 따라 각기 조금씩 다른 색깔(진한 적색에서 청보라색)을 나타낸다. 또한 안토시아닌이 세포 내의 금속성분(철, 칼륨, 마그네슘 등)과 만나면 적색, 청색, 자주색 계열 외에도 보다 다양한 색이 발현된다.

화청소는 녹아있는 세포 내의 세포액 환경이 산성, 염기성, 또는 중성이냐에 따라 각각 다른 색깔을 생성한다. 이를 간단하고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시장에서 붉은 양배추를 사 가지고 와서 잎을 끊는 물에 집어넣는다. 잠시 후 투명한 물이 자주빛으로 변한다. 이는 양배추잎 세포가 열에 의해 죽게 됨에 따라 세포 내의 화청소가 세포 밖으로 빠져 나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자주빛 물이 바로 화청소 용액이다. 이 용액에 레몬과 같은 산성 물질을 넣으면 자주빛이 붉게 변한다. 만일 베이킹바우더 같은 염기성 물질을 넣으면 자주빛이 이번에는 푸른 색으로 변한다. 화청소는 산성에서 붉은 빛, 중성에서 자주빛, 그리고 염기성에서는 푸른 빛을 띤다. 화청소는 지시약 역할을 하는 셈이다.

화청소를 많이 간직하는 꽃은 온도에 의해서도 그 빛깔이 다르게 나타난다. 화청소가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의 각 조건에서 서로 다른 색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고구마의 꽃 색깔은 보통 흐린 자주빛이지만 온도가 2℃로 떨어지면 장미처럼 붉은 빛이나 붉은 자주빛으로 변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아름다운 붉은 색을 자랑하는 금낭화.


아침에는 흰색, 저녁에는 붉은 색

자세히 관찰해보면 여러 식물의 꽃 색깔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함을 알 수 있다. 일부 식물의 꽃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색깔의 변화를 일으킨다. 예로 폐병풀(Pulmonaria officinalis)의 경우 싹 안의 어린 꽃은 붉다. 그러나 뒤에 꽃이 필 때는 푸른 자주빛으로 변하고, 마지막으로 꽃이 질 무렵에는 푸르게 된다. 폐병풀꽃 색이 이렇게 변하는 이유는 싹에서 산성이던 세포액이 뒤에는 중성, 그리고 마지막에는 약한 염기성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꽃 색깔의 변화가 가장 뚜렷한 것은 구기자꽃이다. 이 꽃은 처음에 붉은 자주빛을 보이다가, 나중에 꽃이 질 무렵에는 흙빛으로 변한다.

한편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뚜렷한 꽃 색깔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는 식물도 있다. 아욱(Hibiscus tiliaceus)은 꽃잎이 열려서 꽃이 활짝 피었을 때는 노랗다가, 닫혀 있을 때는 붉은 빛깔을 보여준다. 아욱과(科)의 한 종류인 부용꽃(Hibiscus mutabilis)은 아침에 피었을 때는 희고 저녁에는 붉은 색깔을 나타낸다. 열대지방에서 재배되는 키 작은 나무인 사군자(Quisqualis indica)는 밤에 꽃이 피었을 때는 하얗다가, 다음 날 낮에는 꽃송이 안쪽이 붉게 물들어 있다. 양나팔꽃(Ipomoea purpurea)은 아침에 피었을 때 푸른 자주빛을 나타내지만 저녁에 꽃이 지기 시작하면 붉은 자주 빛으로 변한다.

이처럼 꽃 색깔이 변하는 이유는 꽃잎 세포 내 세포액의 산 함유량이 시간에 따라 변해 화청소 구조가 바뀌기 때문이다.

꽃 색이 온도에 따라 희게 변하는 경우도 있다. 4-5월 봄철 주변의 야산, 공원 등지에서 라일락꽃 향기가 짙게 풍긴다. 보통 라일락꽃은 연보라빛 혹은 자주빛을 띤다. 그러나 30℃정도 높은 온도의 온실에서 피운 라일락꽃은 하얗다.

또한 쥐손이아재비(Erodium gruimum) 꽃은 2℃의 온도에서 푸른빛을 띠지만 높은 온도에서는 빛깔이 없어진다. 왜 그럴까? 현재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식물의 기관이 높은 온도 조건에 놓여졌을 때는 어떤 화청소도 생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얀 꽃을 피우게 된다는 것.


3월의 제주는 노란 유채꽃 바다로 뒤덮인다.이 속에서 잠시 속세의 번거로움을 잊을 수 있지 않을까.


보존용 꽃다발 만드는 방법

이밖에 꽃 색깔이 희게 변하는 원인으로 화청소가 분해되는 경우다. 푸른 꽃을 가진 국화과의 한 식물은 아침에 꽃을 피어 오후에 닫기 시작한다. 이 꽃은 닫는 동안 푸른빛이 사라져서 옅어지다가 밤이 되면 푸른 줄을 가진 흰빛 혹은 아주 흰빛으로 변한다. 이는 세포 내 화청소가 분해됐기 때문이다. 화청소가 분해돼 꽃이 희게 변하는 것을 쉽게 관찰하는 방법으로 아황산가스에 꽃을 노출시키는 것이다. 성냥개비(성냥개비에 유황성분이 포함돼 있고 유황을 태우면 아황산가스가 배출된다)를 붉은 꽃 위에 살짝 접촉시키면, 곧 꽃 가장자리가 하얗게 변하고 흰 점이 군데군데 생긴다. 아황산가스 성분이 세포 내로 들어가 화청소를 분해하기 때문이다. 또는 꽃을 뚜껑이 있는 유리 원통 안에 넣고 그 속에서 유황을 태우면 꽃은 2-3분 후에 완전히 희게 된다. 그러나 이 꽃을 다시 공기 중에 내놓으면 여러 시간 뒤 처음 색깔로 되돌아간다.

원예가들은 이 원리를 이용해 꽃을 인위적으로 죽여 모양과 색깔이 훌륭하게 보존된 아름다운 꽃다발을 만들기도 한다. 새로 꺾어온 꽃을 아황산가스로 채워진 유리 원통 안에 넣고 24시간 동안 방치해 두자. 그러면 꽃이 하얀 색으로 변한 채 죽는다. 이를 꺼내 바람이 잘 부는 그늘진 곳에 실로 매달아둬 건조시킨다. 이때 완전히 희게 변했던 꽃은 본연의 색으로 되돌아온다. 황산가스에 의해 인위적으로 죽은 꽃은 떨켜가 생기지 않아 꽃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훌륭한 보존용 꽃다발이 만들어진 것.


꽃을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가.아황산가스를 이용하면 가능하다.


여름에도 단풍을

여름철 동안 개머루, 포도, 산포도, 층층나무의 초록 잎이 가을이 되면 곱게 붉은 빛으로 물드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 역시 가을에 생성되는 화청소에 의한 것이다. 이때 화청소 생성은 빛과 낮은 온도가 작용한다. 여름철에도 잎을 단풍처럼 붉게 물들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8월쯤 포도원에 가서 아직은 푸른 빛인 커다란 포도나무 잎의 한 복판에 있는 중앙 잎맥과 그 바로 옆을 면도칼로 일부 자른다. 2일쯤 후 가보면 상처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잎맥 위쪽은 확실히 붉게 물들어 있지만, 밑부분은 푸른 빛을 여전히 띤다. 왜 그럴까. 식물의 잎에서는 낮동안 광합성 작용으로 포도당이 만들어지고, 여러 포도당은 녹말이나 셀룰로오스와 같은 거대한 분자로 바뀐다. 밤에는 낮에 생성된 녹말이나 셀룰로오스는 다시 포도당으로 변해 줄기나 뿌리로 이동해간다. 그러나 잎 복판의 중앙 잎맥을 잘라 놓으면 포도당의 이동통로가 끊어진다. 따라서 잘라진 중앙잎맥을 중심으로 윗부분에 생성된 포도당은 이동하지 못하기 때문에 잎의 윗부분에 쌓이게 된다. 안토시아닌의 경우 색소화합물 구조 내에 당분자(포도당이나 갈락토오스)를 포함할 수 있는데, 이동하지 못해 축적된 포도당이 안토시아닌 구조에 결합된다. 따라서 붉은 색소의 형성을 촉진해 잎의 윗부분이 붉어지게 된 것이다.

이 글을 읽고 화창한 봄날 무심히 지나친 꽃들을 자세히 관찰해봄이 어떨까. 주위 꽃들로부터 색의 변화를 확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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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진창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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