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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50년] KAIST 탐구보고서, 괴짜라고 불린 최초의 시도들

몇 년 전 한 KAIST 학생이 직장인이 겪고 있는 ‘넵병’을 연구한 내용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큰 인기를 끌었다. 설문조사와 모의실험을 통해 ‘넵’을 일으키는 직장인의 감정을 분석한 나름 진지한 연구였다. “이게 이토록 진지할 일인가!” “지극히 KAIST답다”는 평이 나왔다. 
이런 학풍 덕분인지 실제로 KAIST는 참신하고 선도적인 연구와 기술을 세상에 많이 내놓고 있다. KAIST가 KAIST다움을 만들고,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배경을 탐구해봤다. 
(KAIST답다: 특이하고 괴짜를 연상케 한다. 어느 하나에 몰두하면 헤어나오지 못하고 끝장을 본다. )

 

● 1호 박사가 말하는 KAIST의 발전과 부침, 그리고 발전

 

“석사학위 논문 마지막 페이지엔 파란 도면을 넣었어요. 공장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정밀했죠.”


‘KAIST 1호 박사’인 양동열 KAIST 기계공학과 명예교수(광주과학기술원(GIST) 석좌교수)는 1월 6일 화상으로 진행된 과학동아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석사 논문을 소개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전거의 축을 만드는 공정을 단축시키는 방법을 담은 논문이었다. 그는 “50년 전 진행했던 연구는 지극히 실용적이었다”며 “지금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이 막 운영되기 시작하던 1973년 첫 번째 기수로 입학했다. KAIS는 고급 과학기술인력을 국내에서 직접 양성하기 위해 과학기술처(현재의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설립된 기관이다.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양 교수는 “학부생 때 시위로 휴교와 휴강이 잦아 공부를 제대도 못해서 마음껏 공부를 해봐야겠단 생각만으로 KAIS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KAIS가 설립될 당시 한국은 석사, 박사 과정 같은 대학원 교육과정이 제대로 정착돼 있지 않았다. 양 교수는 “KAIS 설립 이후 대학원 과정이 빠르게 정착되며 역설적으로 인재들이 더 이상 KAIS에 오지 않는 현상이 벌어졌다”며 “정부 정책으로 대전으로 캠퍼스를 이전하고 한국과학기술대(KIT)와 합치면서 학부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계기가 됐고 이때 지금의 KAIST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이후 KAIST는 선도적인 연구를 내놓으며 발전했다. 양 교수는 기계공학과 교수로 재직하던 1988년 국내 최초로 3차원(3D) 프린터를 만들며 선도적인 연구에 앞장섰다. 


하지만 부침도 있었다. 새로운 도약을 위해 KAIS는 1981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현재의 한국과학기술연구원)와 통폐합을 시도했지만 8년 만에 실패로 돌아섰다. 현재 두 기관은 각각 독립된 기관으로 남아 있다. 2000년대 학부생들이 지나친 경쟁에 부담을 느끼고 목숨을 잃는 사건도 벌어졌다.


양 교수는 “그 때 교직원들이 학부 교육 문제를 뒤돌아보며 반성을 많이 했다. 학교가 대전에 있는 데다, 과학고를 거쳐 KAIST에서만 20대를 보내는 학생이 많다 보니 학생들이 교류하는 범위가 굉장히 좁다. 우리가 이로 인한 부정적 측면을 간과했다”라며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들을 가르치는 리더십 프로그램을 신설했다”고 말했다. 양 교수는 이 프로그램을 잘 안착시키기 위해 당시 교수 10명을 꾀어 모범적으로 강사 교육을 받게 했다. 그는 “이 수업은 비록 필수가 아닌 선택 수업이었지만 당시 학부생들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 평했다.


KAIST의 50년 과정을 모두 겪은 양 교수에게 앞으로 KAIST가 어떻게 발전하길 바라는지 물어봤다. 그는 “새로운 개념을 만드는 학교가 되길 바란다”며 “그러기 위해선 과학뿐만 아니라 인문학, 철학, 사회에도 두루 관심을 갖는 인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남다른 연구실을 찾다
KAIST의 괴짜 학풍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 국내에서 볼 수 없던 새로운 분야의 연구실, 의외의 주제를 다루는 연구실, 가장 젊은 연구실 등을 찾아가 봤다.

 

문화╳과학을 향해 모험하는 The Q 연구실



“앨범을 내고 음악을 하다가 창의성이란 무엇일까 궁금해서 이 연구실에 왔어요. 수년간 음악가들의 창의성을 연구했죠. 이 결과를 바탕으로 곧 앨범을 낼 계획이에요.”


생소했다. 과학 분야의 연구라면 으레 ‘그래핀’ ‘자율주행차’ ‘유전자’처럼 어딘가에라도 실체가 있는 것이나, 하다못해 수식으로라도 존재하는 것을 다뤘다. 하지만 1월 6일 대전 KAIST 캠퍼스에서 만난 김한라 KAIST 문화기술대학원 연구원의 대답 속 ‘창의성’은 전자와 후자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 주제로 보였다.


연구실을 이끄는 박주용 KAIST 문화기술대학원 교수는 이 같은 기자의 생각이 편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는 “아득한 과거에 살던 사람들은 아침엔 생기가 가득하고, 저녁엔 힘에 부치는 것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에너지라는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창의성 역시 아직 개념이 정립되지 않은 시기를 겪는 중일 뿐 분명 존재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박 교수가 이끄는 더큐(The Q) 연구실의 관심 분야는 음악, 미술, 체육, K-팝 문화 등 다양하다. 박 교수는 박사 과정 당시 물리학, 네트워크 이론을 공부했다. 이 방법론을 다양한 예술 분야에 적용하고 있다. 인터뷰 중 자신을 ‘문화예술 분야에서 물리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지난해 1월에는 클래식 음악가들의 창의성과 혁신성을 수치로 분석한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1700~1900년 사이에 작곡된 서양 피아노 악보에서 동시에 연주되는 음정으로 만들어진 ‘코드워드’를 추출한 뒤 다른 악보와의 관계를 살펴봤다. 그 결과 베토벤은 사후 100년 가까이 후대 작곡가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최고의 혁신적 작곡가는 후기 낭만파의 거장인 라흐마니노프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실의 전규현 연구원은 “문화예술 분야는 워낙 광범위하기 때문에 관심 있는 어떤 주제라도 일단 연구해보자는 결론이 나오는 편”이라며 “스포츠 경기를 분석하는 연구를 해왔고 지금은 한국화를 연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회화 작품을 분석해서 창의적인 문화상품을 만들어 내는 인공지능(AI)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덧붙였다.


예술이라는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어려움도 있다. 김 연구원은 석사 과정 당시 ‘정설’과 자신의 분석 결과가 달라 고민했던 경험담을 털어놨다. 그는 “창의성을 평가하는 중요 기준인 음악가들의 반음 패턴을 분석한 결과 브람스의 반음 패턴이 이전 시대와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며 “자문을 받기 위해 음악사 분야 전문가를 찾아갔는데 음악사에서 브람스는 이전 시대의 전통을 따랐던 작곡가로 분류된다며 의아해했다. 분석 결과가 학계의 정설을 넘어서는 것인지 재차 확인하고 연구 과정을 되짚어봐야 했다”고 말했다.


박 교수의 목표는 단순히 창의성을 연구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에너지’라는 개념이 생기며 에너지를 이용하는 기계들이 쏟아져나왔다”며 “창의성 역시 개념을 완벽하게 정립하면 창의성을 이용한 기계가 나올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의 창의성을 더 키워주는 등 우리가 상상하지 못한 기계가 등장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하지만 지금은 일단 저 자신의 창의성을 자극할 수 있는 재밌는 연구를 계속하는 것이 목표”라며 웃었다.

 

두 분야 접목해 새 영역 창조하는 뇌기계지능 연구실

 


머신러닝 중 하나인 딥러닝은 사람의 뇌의 정보처리 과정과 비슷한 점이 많다. 현재 머신러닝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특정 분야에서는 여전히 미숙하다.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뇌기계지능 연구실은 뇌에서 인공지능(AI)의 발전 방법을 찾고 있다.


1월 11일 KAIST 캠퍼스에서 만난 이상완 KAIST 바이오 및 뇌공학과 교수는 “머신러닝 기준에서 봤을 때 사람의 선택은 최적의 방법이 아닐 때가 많다”며 “오히려 문제가 명확하지 않거나 불확실한 문제에는 사람이 더 강하다”고 말했다. 


이 교수팀은 2019년 국제학술지 ‘사이언스 로보틱스’에 ‘전두엽 메타제어’ 이론을 제안했다. 사람의 중뇌 도파민·복외측전전두피질 네트워크에서는 주어진 환경에 대한 보상 또는 현재 상태를 예측하는 정보를 처리한다. 두뇌는 이 정보를 통합해 주어진 환경에 적합한 학습과 추론 전략을 찾는다. 연구팀은 AI 알고리즘 설계에 이 이론을 대입하면 성능, 효율, 속도라는 3개 조건 사이의 균형점을 찾을 수 있다고 밝혔다.


거꾸로 AI를 이용해 뇌를 분석하는 연구도 한다. 의사로 근무하다가 연구실에 합류한 차유진 연구원은 질환 진단의 성능을 높이는 연구를 하고 있다. 차 연구원은 “의사 뇌의 학습과정을 모사하는 AI 모델을 설계하면 실제 의사가 부족한 부분을 도와줄 수 있고 의료 진단의 성능을 높일 수도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사후연구원으로 재직 중인 류중원 연구원은 “AI에서는 ‘노이즈(noise)’라 불리는 무의미한 데이터를 활용해 결과의 예측도를 높인다”며 “AI 모델과 비교해 뇌 영상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노이즈를 찾는 연구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뇌와 AI가 상호보완적으로 소통하고 진보하는 기술을 꿈꾼다”고 말했다. 뇌와 머신러닝 둘 다 공부해야 하는 연구실이다 보니 공부량도 많을 것 같다. 이 교수는 “공부량이 두 배 아니냐는 고민을 하는 학생들도 많다”며 “두 분야는 같은 문제를 다르게 해석하는 분야로 맥락이 같은 경우가 많아 공부량이 꼭 두 배인 것은 아니다”라며 웃었다.


이제 막 국내에 발을 들여놓은 신생 분야다 보니 시행착오도 많다. 안수진 연구원은 “관심 있는 연구 주제를 가져가면 지도교수님과 함께 관련된 논문을 모조리 탐독하며 연구를 발전시켜 나간다”며 “분야가 워낙 광범위하고 선도적이다 보니 교수든 학생이든 한쪽에서 연구 주제를 제안하기 쉽지 않다”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새로운 분야는 주제 선정부터, 연구 전개, 결과를 내기까지 많은 리스크를 감당해야 하는데 KAIST만의 도전적인 분위기 덕에 미개척지를 탐험할 수 있게 됐다”며 “앞으로도 한국에는 정착하지 않은 분야를 시도하는 분위기가 계속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영 보스’보단 ‘영 리더’를 꿈꾼다 동적 재료 설계 연구실

 

 

“교수님이 너무 젊으셔서 한 번은 연구실 단체 사진을 본 친구가 교수님을 학생으로 착각한 적도 있었죠.” 에피소드의 주인공인 강지형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의 나이는 올해 33세, KAIST에서 가장 젊은 교수다. 강 교수는 미국 스탠퍼드대 화학공학과에서의 박사후연구원 생활을 마무리 짓고 지난해 2월 KAIST에서 교수로 첫 발을 뗐다. 1월 6일 KAIST에서 강지형 교수와 연구실 소속 연구원들을 만나 지난 1년간 있었던 이야기들을 들어봤다.


KAIST가 연구중심대학이라는 점은 강 교수가 KAIST행을 결심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강 교수는 “초임 교수가 연구에 더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KAIST의 분위기 덕분에 새로운 환경에 수월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다른 대학의 경우, 신임 교수에게 부임 첫 해부터 논문과 같은 가시적 실적을 요구하는 경우가 흔하다. 이렇게 되면 연구실이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에서 결과를 얻기 위한 연구를 하다 보니 논문의 수준이 얕아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강 교수가 소속돼 있는 KAIST 신소재공학과엔 2~3년 동안 실적 평가 유예기간을 두는 ‘그레이스 피리어드(grace period)’ 문화가 있다. 이 기간 동안 신임 교수는 실적에 얽매이지 않고 깊이 있는 연구와 교육을 할 수 있다.


이런 학풍 속에서 강 교수는 새로운 고분자 소재를 개발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 고분자는 작은 분자 여러 개를 결합한 형태다. 작은 분자 사이의 상호작용을 조절하면 고분자의 특성을 바꿀 수 있다. 이를 통해 잘 찢어지지 않고 자가 치유가 가능한 고분자를 설계하는 것이 강 교수의 목표다. 외부 충격에 강한 고분자 소재는 차세대 전자소자에 적용해 생체 삽입형 전자 장비를 만드는 데 활용될 수 있다.


분자를 조절해 소재의 특성을 바꾸는 연구는 기존 신소재 공학 연구에서는 흔히 볼 수 없던 연구다. 연구실의 이원범 연구원은 “고분자 소재가 나타내는 현상 자체에만 집중해 완성된 고분자를 연구하기보다, 고분자의 특성을 분자 수준에서 조절하는 연구에 매력을 느껴 강 교수 연구실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KAIST에서 가장 젊은 교수의 지도를 받는 데엔 어떤 특별한 점이 있을까. 이수현 연구원은 “‘보스형’보다는 ‘리더형’이라는 점”을 꼽았다. 수직적으로 명령하기보다는 수평적으로 함께 의사를 결정하는 것이 ‘리더형’ 관리자의 특징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학원 생활을 했던지라 대학원생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수평적으로 소통할 수 있다는 것이 강 교수의 장점이다. 김현준 연구원은 “신생 연구실인데다가 교수님이 젊다 보니, 마치 선배에게 배우는 것처럼 궁금한 부분을 편하게 지도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수평적인 분위기는 교수와 학생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교수와 교수 사이에도 형성되어 있었다. 강 교수는 “아버지보다도 연세가 많으신 교수님과도 편하게 테니스를 치는 등, 선후배 교수 간의 수평적인 분위기가 형성돼 소통이 원활하다”고 말했다. 강 교수는 “KAIST에는 연구에 열정을 가진 학생이 많다”며 “천천히 가더라도 학생들과 함께 갈 수 있도록 학생 주도의 연구를 돕는 선배 같은 교수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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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박영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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