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당황했어요. 어느 학생이 저를 소개한 걸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서은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아직 본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으니까요. 짧은 기간 만났는데도 저를 좋아해주고, 제 수업을 즐겁게 들어줘서 고마워요.”
홍영덕 교사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따뜻했다. 그가 첫 수업부터 학생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잡은 비결이 바로 이런 따뜻한 대화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벚꽃이 만연한 4월 15일 경기 안양시에 위치한 부흥고 과학실험실에서 홍 교사를 만났다.
학생들에게 ‘설문조사’ 하는 이유
“수업 첫날 학생들이 좋아하는 과학 과목, 수업 전 선생님에게 하고 싶은 말, 앞으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다짐 등을 적게 해요. 학생들이 과학을 어느 정도 좋아하는지 파악하고 이에 맞춰 수업을 진행하기 위해서죠.”
홍 교사는 학생들에게 ‘설문조사’를 하는 이유가 수업 때문이라고 담백하게 답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이 순간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과학동아에 취재를 요청한 김서은 양은 “정확히 3월 첫째 주 통합과학 수업이었다”며 “고등학교 과학 수업이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많았는데, 수업에 앞서 학생들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주려고 하는 선생님을 보고 걱정을 떨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설문지는 학생과 선생님을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했다. 홍 교사는 “서은이가 맨 앞줄에 앉아 설문지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볼 수 있었다”며 “자신의 꿈을 묻는 질문에 ‘텔로미어 연구를 하고 싶다’고 적는 것을 보고 속으로 굉장히 놀랐다”고 말했다.
텔로미어는 염색체 말단에 있는 반복 염기서열로 세포의 시계 역할을 한다. 텔로미어가 짧아지면 세포가 분열을 멈추거나 사멸한다. 홍 교사는 “1학년 학생이 텔로미어라는 단어를 아는 경우가 흔치 않다”며 “서은이가 과학을 아주 좋아하는 범상치 않은 학생이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고 말했다.
10분 독서, 5분 리뷰, 수업은 대화로
홍 교사는 수업 방식도 일반적인 과학 수업과는 조금 다르다. 먼저 수업에 앞서 과학 서적을 읽는 시간이 주어진다. 학생들은 10분 동안 자신이 가져온 과학 서적을 자유롭게 읽는다.
홍 교사는 “과학 서적은 용어들이 어려운 편이라 학생들이 선뜻 손에 잡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과학 서적과 친해질 수 있도록 유도하기 위해 과학 독서 시간을 마련했다”고 설명했다. 또 홍 교사는 “학생들이 책을 읽다가 모르는 내용을 바로 물어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며 “굳이 어려운 책을 읽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으며,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읽는 것이 좋다”고 덧붙였다.
독서 시간 이후 5분간은 복습 시간이다. 수업마다 한 명씩 돌아가면서 지난 수업에 대한 리뷰를 작성해 발표한다. 홍 교사는 “정리한 내용을 다시 들으면서, 지난 수업에 무엇을 배웠는지 학생들이 상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발표를 통해 학생들의 참여를 높이는 효과는 덤이다. 김 양은 “첫 단원이 우주의 빅뱅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리뷰 덕분에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고 덧붙였다.
이후 35분간은 교사의 주도로 수업이 진행된다. 하지만 이 때도 수업의 주체는 철저히 학생이다. 교사가 설명하는 시간이 있지만, 학생들이 서로 설명해주는 시간이 수업의 핵심이다. 학생마다 설명할 부분을 정해 각자 맡은 부분을 집중적으로 학습하게 한 뒤 학생들끼리 서로 설명하면서 의견을 교환한다.
“학생들이 역동적으로 수업에 임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계획한 수업 방식입니다. 사실 수업 중에 가장 많이 배우는 사람은 교사거든요. 가르쳐봐야 많이 배울 수 있다는 신념으로, 모든 학생이 서로를 가르치는 경험을 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줍니다.”
과학중점학교로 지정된 부흥고에는 매년 과학을 좋아하는 학생들이 많이 몰린다. 홍 교사는 단순히 진도를 나가는 것보다 학생들이 ‘과학을 알아가고 있구나’라고 느끼게 하는 데 초점을 둔다. 당장 교과 과정에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도 학생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 느껴지면 설명을 멈추지 않는다.
김 양은 일산화탄소의 배위결합을 공부했던 일화를 예로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 통합과학 교과 과정에는 일산화탄소가 배위결합을 이룬다는 내용은 나오지만, 왜 그런 결합을 형성하는지 이유는 설명하지 않는다. 개념이 어렵기 때문이다. 김 양은 “보통은 ‘나중에 배운다’고 하면서 넘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선생님께서는 연결지어 이해할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해주신다”고 자랑했다.
“사람들 기쁘게 하는 과학도로 성장하길”
홍 교사는 현재 김 양과 그의 친구들이 함께 만든 자율동아리 ‘과학의 샘’의 지도교사를 맡고 있다. 과학의 샘은 과학동아 등 과학잡지를 통해 최근 과학 이슈를 접하고 이를 주제로 토론하는 과학탐구 학술 동아리다.
3월에는 과학동아에서 타미플루에 관한 기사를 읽고 타미플루의 원리와 다른 나라에서 금지한 의약품을 주제로 토론했다. 4월에는 주기율표 150주년을 기념하는 기사를 읽은 뒤 기존 주기율표를 다시 만들어보는 활동을 했다.
홍 교사는 “검증된 자료 없이는 학생들이 토론을 준비하기가 쉽지 않다”며 “주기적으로 과학 이슈를 다루는 과학동아 같은 과학잡지를 이용해 최신 과학 이슈에 대한 검증된 자료를 얻는다”고 설명했다.
홍 교사는 “과학잡지를 읽고 토론하는 활동은 사실 개인적으로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해보고 싶었던 활동”이라며 “서은이가 같은 주제로 먼저 찾아와서 반가운 마음에 흔쾌히 지도교사를 하기로 했다”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홍 교사와 김 양에게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부탁했다. 김 양은 “과학 수업을 기다려지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과학을 암기 과목이 아닌 이해할 수 있는 학문으로 생각할 수 있도록 가르쳐주시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홍 교사는 “지금처럼 과학을 재밌게 공부해나갔으면 좋겠다”며 “과학을 통해 사람들을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