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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볼공만한 실타래에는 길이가 수백m나 되는 털실이 뭉쳐져 있다. 어머니와 누나는 뜨개질바늘이라고 부르는 막대 두 개를 들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때로는 TV를 보면서도 끊임없이 손을 놀린다. 실타래가 점점 작아지면서 어느 순간 컵받침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조끼가 나오기도 한다.

뜨개질실은 부피가 있지만 수학적으로 단순화해 선이라고 생각하면 1차원이다. 마찬가지로 컵받침은 2차원이고 조끼는 3차원이다. 즉 뜨개질은 1차원의 재료를 2차원, 3차원의 물체로 만드는 과정인 셈이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이 나노세계에서 뜨개질을 하기 시작했다. 나노 뜨개질실의 재료는 바로 DNA인데 우리가 익숙한 이중나선(두 가닥)이 아니라 단일가닥이다. 뜨개질실의 지름이 수mm이고 DNA가닥의 지름이 수 nm(나노미터, 1nm=10억 분의 1m)이므로 나노 뜨개질은 대략 100만 분의 1 크기로 축소된 뜨개질인 셈이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DNA를 이용한 나노 뜨개질에 ‘DNA 오리가미’란 이름을 붙였다. 오리가미(origami)는 종이접기의 일본말로 영어에서 그대로 받아들여 쓰고 있는 단어다. 종이접기는 2차원인 종이를 접어 3차원의 형상을 만드는 과정이다. 즉 재료를 접는 과정을 통해 차원이 늘어난 것이다. 과학자들이 DNA 오리가미란 말을 만든 것은 종이접기처럼 1차원인 DNA가닥을 가지고 2차원, 3차원 형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염기의 상보적 서열 인식 이용

DNA 오리가미는 2006년 과학저널 ‘네이처’에 실린 한 논문에서 처음 소개됐다. 생명체의 정보를 담고 있는 생체분자인 DNA를 재료로 다양한 형태의 나노구조물을 만들었다는 내용이다. 미국 칼텍(캘리포니아공대) 컴퓨터과학과 폴 로데문트 교수 단독 저자로 발표된 논문에는 DNA로 만든 정사각형, 별, 웃는 얼굴 등 다양한 나노구조물의 원자힘현미경 사진이 실려 있다.

로데문트 교수는 7000여 개 염기 길이의 DNA단일가닥을 주재료(골격)로 이용했다. 실제로는 한 바이러스의 게놈이다. 예를 들어 나노 사각형을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DNA가닥을 뜨개질실, 나노 사각형을 보자기라고 하자. 뜨개질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보자기를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적당한 간격으로 뜨개질바늘에 코(고리)를 만든 뒤 엮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노 크기에서는 그런 정교한 작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사실 일상생활에서도 뜨개질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실타래로 보자기를 뜰 수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네모 안을 실로 채워야 할 것 같다. 채우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알기 쉽게 네모의 한 모서리에서 변을 따라 실을 놓아 건너편 모서리에 닿으면 180° 방향을 바꿔 반대 방향으로 실을 놓는 지그재그 방식으로 채울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네모를 다 채웠다고 해서 보자기가 만들어진 건 아니다. 언제든지 실을 당기기만 하면 그냥 풀려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콜럼버스 달걀의 비약이 필요하다. 좀 번거롭지만 따로 짧게 자른 실을 여럿 준비해 구불구불 배열된 실 사이사이를 서로 묶어준다면 보자기 형태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로데문트 교수의 아이디어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주어진 형태의 면을 채우도록 DNA단일가닥을 배열한 뒤 그 상태를 고정하기 위해 짧은 DNA가닥들을 배치할 위치를 설계했다.

여기서 잠깐. 나노 뜨개질이 이론은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하다고 말해 놓고서 어떻게 짧은 DNA 가닥으로 긴 DNA가닥을 묶어 고정할 수 있을까. 사실 여기에 나노 뜨개질의 실로 DNA 단일가닥을 쓴 이유가 있다. DNA단일가닥은 그냥 크기만 작은 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DNA단일가닥은 아데닌(A), 구아닌(G), 티민(T), 시토신(C) 이렇게 네 가지 염기가 줄줄이 엮여 있는 구조다. 따라서 실이라기보다는 염주에 가깝다. DNA단일가닥은 염기서열이 상보적인 또 다른 DNA단일가닥을 만나면 서로 달라붙어 DNA이중나선이 된다. 참고로 아데닌은 티민과(AT), 구아닌은 시토신과(GC) 서로 짝을 이룬다.

예를 들어 염기서열이 5-ATTGCACCGG-3인 DNA단일가닥이 있다. 앞뒤의 숫자는 DNA가닥의 진행방향으로 5에서 3쪽으로 읽는다. 여기에 염기서열이 5-CCGGTGCAAT-3인 단일가닥을 넣어주면 둘은 서로 딱 달라붙어 DNA이중나선을 만든다. 두 가닥의 염기는 서로 반대 방향으로 달라붙는다.



로데문트 교수는 긴 DNA 단일가닥에서 서로 멀리 떨어진 두 부분에 상보적인 염기를 지닌 짧은 DNA 단일가닥을 만들어 넣어주면 이들이 서로 결합해 이중가닥을 형성하므로 따로 풀칠을 하거나 묶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짧은 DNA단일가닥에 ‘스테이플 가닥(staple strands)’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스테이플(호치키스 철침)처럼 서로 떨어진 두 부분을 한데 묶어 고정시키기 때문이다.

그가 컴퓨터의 도움으로 설계한 염기 30여 개 길이의 스테이플 가닥들과 긴 DNA 가닥(골격)을 섞어주자 구상한 모양의 2차원 나노 구조물이 만들어졌다. 놀라운 건 먼저 긴 DNA 가닥을 만들고자 하는 모양에 맞게 배열한 게 아니라(이렇게 할 수도 없다!) 스테이플 가닥들이 긴 DNA 가닥의 상보적인 부분에 달라붙으면서 스스로 나노 구조물의 형상을 만들어간 것. DNA의 자기조립인 셈이다.

사실 원자힘현미경으로 다양한 모양이 만들어진 게 찍혔으니까 그렇구나 하지 만일 이런 증거 없이 그의 아이디어를 들었다면 고개를 갸
웃했을 것이다. 무려 7000여 염기 길이의 DNA가닥이 작은 DNA 가닥들의 가이드를 받아 차곡차곡 채워져 특정한 형태가 된다고는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해 로데문트 교수는 박사과정학생인 우성욱 씨와 함께 DNA 오리가미를 타일로 써서 마이크로미터 크기에 이르는 구조물을 만드는 데도 성공해 학술지 ‘네이처 화학’에 발표했다. 이들은 마치 조각퍼즐처럼 요철이 있는 DNA 오리가미를 만들어 서로 섞어주면 자기들이 알아서 퍼즐을 맞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노 짐 운반하는 나노 로봇

2009년 덴마크와 독일의 연구자들은 DNA오리가미를 이용해 3차원 구조물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들이 만든 건 속이 빈 육면체로 한쪽 면을 여닫을 수도 있다. 뚜껑달린 나노박스인 셈이다. 역시 DNA단일가닥인 바이러스 게놈을 골격으로 스테이플 가닥들을 써서 사각형 면을 6개 만든 뒤 이들 모서리가 또 다른 스테이플 가닥들의 도움으로 서로 붙으면서 육면체 모양을 만든 것. 육면체의 크기는 42×36×36nm3이다.

이때 박스의 한 면은 뚜껑의 역할을 하게 디자인했다. 뚜껑과 박스본체는 두 곳에서 각각의 DNA단일가닥이 서로 맞물려 닫혀 있게 된다(자물쇠). 그렇다면 이 박스를 열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나노 박스의 열쇠는 바로 박스 본체의 DNA 단일가닥 부분과 염기서열이 상보적인 스테이플 가닥이다.

스테이플 가닥을 넣어주면 자물쇠의 DNA이중나선 구조를 이루고 있는 뚜껑의 DNA단일가닥과 경쟁하다가 결국은 이를 대체한다. 즉 스테이플 가닥이 뚜껑에 있는 DNA 단일가닥 대신 박스본체의 DNA단일가닥과 이중나선을 만든다. 그 결과 뚜껑이 열린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조지 처치 교수팀은 육각형기둥 형태로 약간 변형한 나노박스를 만든 뒤 이 안에 나노 짐을 싣는데 성공했다고 과학저널 ‘사이언스’ 2월 17일자에 보고했다. 연구자들은 짐이 달라붙을 수 있게 끝이 돌출된 스테이플 가닥 12개가 박스 내부에 놓이게 DNA오리가미를 설계했다. 그리고 여기에 금나노입자나 항체 같은 나노입자를 붙이는 데 성공했다. 전자현미경으로 분석한 결과 육각기둥 나노박
스는 금나노입자를 평균 4개, 항체를 평균 3개 실었다.

이 나노박스는 육각기둥을 옆으로 봤을 때 마치 조개처럼 여닫을 수 있게 설계돼 있다. 연구자들은 DNA앱타머 기술을 이용한 열쇠-자물쇠 시스템을 개발했다. DNA앱타머란 마치 항체처럼 단백질 같은 표적분자를 인식해 달라붙은 특정한 염기서열의 DNA 가닥이다. 표적분자가 없을 때는 앞의 육면체 나노박스처럼 뚜껑의 DNA단일가닥(앱타머)과 본체의 DNA단일가닥이 이중나선으로 결합해 잠겨있다. 뚜껑을 열려면 앱타머의 표적단백질(열쇠)을 넣어주면 된다. 앱타머가 열쇠와 결합하면서 자물쇠(이중나선)가 풀리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이 나노박스를 ‘나노로봇(nanorobot)’이라고 불렀다. 겨우 짐을 싣는 박스가 무슨 로봇이냐 하겠지만 나노 크기에서 뚜껑을 여닫고 짐까지 싣는다는 건 예전에는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나노로봇은 특정한 표적을 만날 때만 뚜껑이 열리면서 나노 짐을 노출시킨다. 예를 들어 암세포가 분비하는 단백질을 표적으로 한 DNA앱타머로 자물쇠를 만든 나노로봇에 세포 성장을 억제하는 항체를 실어 보낼 수 있다. 나노로봇은 뚜껑이 닫힌 채 이동하다가 암세포 주변에서 DNA앱타머가 표적단백질과 결합해 뚜껑이 열리고 속에 있
던 항체가 암세포 표면의 항원과 결합해 성장을 억제한다.

연구자들은 “나노로봇을 이용하면 다양한 측면에서 세포의 행동을 조절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DNA오리가미는 그 자체로도 흥미로운 대상이지만 새로운 생체조절물질로 쓰일 수 있다는 말이다. 생명체가 생명정보를 담는 물질로 DNA를 선택한 것은 어쩌면 필연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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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4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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