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잡고 잘라야 하는 겁니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교실 밖까지 새어나왔다. 흰색 가운을 입은 학생들 사이로 붉게 보이는 무언가를 손에 들고 설명을 이어가는 선생님이 보였다. 비릿한 피 냄새가 풍기는 것 같더니 붉은 물체의 형체가 눈에 들어왔다. 맙소사, 그것은 심장이었다.
4월 12일 대전 유성구 대전외삼중 영재학급 수업 시간. 첫 수업부터 돼지의 심장을 해부하는 ‘극한 수업’이 한창이었다. 학생들은 심장을 보고 당황하는 것도 잠시, 이내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가위와 메스를 들고 심장을 해부하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심장을 잘라나가는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첫날부터 학생들을 위해 과학의 ‘손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수업을 준비한, 심장을 거침없이 가르며 목청을 높였던 선생님이 사연의 주인공 김정민 교사였다.
실험으로 학생 호기심 유도
“오늘 수업은 1학년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영재 수업입니다. 과학에 흥미가 있는 학생들을 위해 교내에서 자체적으로 진행하는 수업이죠. 과학은 체험을 통해 배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들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해 여러 활동으로 다양한 자극을 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교사는 영재 수업과 창의연구(R&E) 프로그램 등 다양한 교내 활동을 적극적으로 진행하는 이유가 “체험을 하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그는 “교실 안에서 책으로만 공부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이론도 중요하지만, 학생들이 이론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경우는 극소수에요. 실생활에서 문제를 인식해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해결 의식이 있어야 스스로 공부하고 탐구하는 재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일까. 김 교사는 과학 수업이나 영재학급 수업을 하기에 앞서 학생들에게 최근 과학 이슈를 발표하게 했다. 학생들의 흥미를 먼저 끌어내기 위해서다. 김 교사는 “이제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발표를 준비해 온다”며 “최근 수업에서는 인류 최초로 블랙홀을 촬영한 연구에 대해 학생들이 자료를 준비해 발표했다”고 말했다.
김 교사가 학생들의 다양한 활동을 지원하게 된 데는 과거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1991년 사범대를 졸업한 그는 처음에는 교사에 뜻이 없어서 학원 강사를 했다. 하지만 이내 한계를 느꼈다. 결국 2007년 교사가 됐다.
“학원에서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주입해줄 수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어요. 그러나 학교에서는 수업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었죠. 교사가 열심히 노력해 학생들을 이끌고, 또 학생들이 이를 따라와 주는 과정이 재밌고 보람찹니다.”
김 교사는 ‘과학도시’ 대전에 대한 자랑도 잊지 않았다. 그는 “대전은 KAIST 외에도 대덕연구단지와 각종 정부출연연구기관이 모여 있는 과학 특화 도시”라며 “대전이 갖춘 최고의 인프라를 활용해 어떻게 학생을 지도할지는 교사의 몫이라고 생각하며, 앞으로 이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대회로 만난 인연 중학교까지 이어져
김 교사가 대전외삼중에 부임한 건 올해 3월이다. 처음 사연을 받았을 때는 부임한 지 한 달 된 스승과 입학한 지 한 달 된 제자 사이에 얼마나 깊은 인연이 있을까 의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의 인연은 작년 여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8년 6월 대전교육과학연구원이 주최한 대전시 학생과학탐구올림픽 과학탐구실험대회에 참가한 임태연 양은 우수한 성적을 거둬 전국대회에도 참가하게 됐다. 이때 전국대회 준비를 도운 지도교사 중 한 명이 김 교사였다.
임 양은 “당시 주어진 과제가 차가운 물과 따뜻한 물을 서로 섞이지 않게 하는 실험을 설계하는 것이었다”며 “열전도와 대류 현상을 이용해 실험을 설계해야 했는데, 초등학교 과정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라 당황했다”고 회상했다.
임 양이 실험을 제대로 설계하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 김 교사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임 양은 “초등학생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개념으로 대류 현상을 설명해주셨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학생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모습이 대견했다”며 “아이디어를 내는 기발함과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는 모습이 예뻐서 도와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현재 김 교사는 임 양이 활동하는 교내 동아리 ‘랩걸(Lab Girl)’의 지도교사를 맡고 있다. 랩걸은 1학년 여학생 5명이 의기투합해 만든 자율동아리다. 노벨상을 꿈꾸는 학생들이 노벨상을 받은 과학자들을 ‘벤치마킹’한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임 양은 “중학생이 실행 가능한 범위 안에서 그동안 노벨상을 받은 연구를 학습하고 이를 직접 실험을 통해 체험하는 동아리”라며 “아직 우리나라에서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은 만큼 노벨상을 꿈꾸는 동아리를 만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랩걸의 결성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여자컬링 국가대표였던 ‘팀킴’처럼 이뤄졌다. 랩걸 부원인 서영은 양은 “모두가 서로 알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각자 친분이 있긴 했다”며 “마음이 맞는 친구를 서로 데려오면서 동아리가 결성됐다”고 말했다.
랩걸의 첫 프로젝트는 ‘분배 크로마토그래피’다. 분배 크로마토그래피는 1952년 노벨 화학상을 받은 아처 마틴과 리처드 싱의 연구 주제로, 서로 섞이지 않는 두 액체의 분배계수 차이를 이용해 혼합된 시료를 분리하는 방법이다. 현재 화학, 생물학 및 의학 분야에서 널리 쓰이는 실험 방법이다.
임 양은 “앞으로 초콜릿 색소 추출, 브로콜리 DNA 분리 등 실험을 통해 본격적으로 분배 크로마토그래피를 탐구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 교사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창의체험 동아리는 수십 명씩 모여서 진행하기 때문에 심층적인 과학 탐구를 하기가 쉽지 않다”며 “학생들의 아이디어가 창의적이고, 이런 동아리가 학교에 꼭 필요하다고 판단해 기꺼이 지도교사를 맡았다”고 설명했다.
또 김 교사는 “태연이가 동아리도 만들고 영재학급 수업도 들으며 과학에 대해 계속 흥미를 갖고 열심히 공부해줘서 정말 고맙다”고 덧붙였다.
김 교사에게 교사로서의 꿈을 물었다. 그는 “이제 정년까지 그리 오랜 기간이 남지 않았다”며 “교단에서 물러나는 날까지 학생들에게 과학에 대한 즐거운 경험을 다양하게 선물해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이런 역할을 과학동아도 함께 해주기를 당부했다. 그는 “수업에 필요한 사진이나 삽화를 찾거나 학생들의 토론을 위한 참고 자료를 준비할 때 도서관에 비치된 과학동아를 많이 활용한다”며 “앞으로도 과학동아가 학생들의 과학적 소양과 창의력을 기르는 데 밑거름이 될 수 있는 좋은 자료들을 많이 실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