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0월이면 어김없이 전 세계 과학계가 금빛으로 물든다. 생리의학, 물리학, 화학 분야에서 인류에게 지대하게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은 과학자들에게 주는 노벨 과학상 덕분이다. 매년 스웨덴 왕립과학아카데미(한림원)가 물리학상과 화학상을, 스웨덴 카롤린스카 의대가 생리의학상을 심사한다는 사실 외에 노벨상 심사 과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있다. 그만큼 노벨상 수상자 예측은 어렵다. 과학동아는 한국연구재단 정책연구팀의 도움을 받아 2009년부터 올해까지 10년간 노벨 과학상 수상 경향을 분석했다. 이 기간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총 77명이다.
1. 수상자 고령화
올해 노벨 과학상의 특징은 수상자 고령화다. 물리학상을 받은 아서 애슈킨 미국 벨연구소 전 연구원은 올해 96세로, 노벨상 역대 수상자 가운데 최고령 수상자로 기록됐다.
한국연구재단 정책연구팀은 수상자의 고령화 원인을 두 가지로 분석했다. 먼저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박사후연구원 등 후속 연구 활동 기간이 길어지면서 신진 연구자들이 독립적인 연구를 시작하는 연령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꼽았다. 또 학계와 노벨상위원회에서 연구 성과를 검증하는 기간도 늘어나는 추세다.
20세기에 노벨상을 받았던 과학자들은 대개 박사후연구원으로 지낸 기간이 짧았고, 30대 이전에 독립 연구를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대부분 30대 초반에 노벨상 수상 관련 연구를 시작해 40대에 완성하고 50대에 학계에서 주목을 받은 뒤 50대 후반에 노벨상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21세기 들어서는 수상자들이 박사후연구원을 지낸 기간이 길어지면서 30대가 돼서야 독립 연구를 시작한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노벨상 수상 관련 연구를 30대 후반에 시작해 50대에 완성하고 60대 후반에 노벨상을 받는 경우가 늘었다.
이는 분석 대상으로 삼은 기간에도 확인된다. 2010년 그래핀을 발견한 공로로 안드레 가임 영국 맨체스터대 교수와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한 콘스탄틴 노보셀로프 교수는 당시 나이가 36세로, 매우 이른 나이에 노벨상을 받아 이례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의 평균 연령은 57세다.
김해도 한국연구재단 정책연구팀장은 “최근 노벨 과학상 수상자는 울프상, 래스커상 등 국제적으로 저명한 상을 이미 받은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연구 업적이 국제적으로 검증된 과학자에게 수여하는 ‘안전주의’ 경향이 뚜렷하다”고 설명했다.
2. 여성 수상자 증가
올해 노벨 과학상은 여성 수상자를 두 명이나 배출했다. 물리학상 수상자인 도나 스트리클런드 캐나다 워털루대 교수와 화학상 수상자인 프랜시스 아놀드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칼텍)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한 해에 여성 수상자가 두 명 이상 나온 것은 1901년 노벨상 수상이 시작된 이래 이번이 두 번째다. 2009년에는 엘리자베스 블랙번 미국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대(UCSF) 교수와 캐롤 그레이더 미국 존스홉킨스대 의대 교수(생리의학상), 아다 요나스 이스라엘 와이즈만연구소 교수(화학상) 등 여성 과학자 3명이 노벨 과학상을 받았다.
그간 노벨상 역사에서 여성 수상자는 매우 희귀했다. 1901년부터 올해까지 노벨 과학상 수상자 총 607명(중복 수상 포함) 가운데 여성은 20명(약 3.29%, 중복 수상 포함)에 불과하다.
한국연구재단 분석 결과 최근 10년간 노벨 과학상에서 여성 수상자가 점유한 비율은 화학상이 약 7.1%, 생리의학상이 약 20.0%로 과거에 비해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김 정책연구팀장은 “세계적으로 특히 생리의학 관련 분야에 종사하는 여성 과학자의 비중이 늘고 있어 이 분야에서 여성 과학자의 약진이 두드러지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노벨상위원회와 노벨상 후보를 추천하는 과학계의 여성 과학자에 대한 편견이 줄어든 것도 요인으로 꼽힌다. 김 정책연구팀장은 “노벨상을 두 번 수상한 마리 퀴리의 경우 첫 번째 노벨상을 남편인 피에르 퀴리와 공동으로 수상했는데, 남편과 달리 애초에는 수상자 명단에 이름이 없었다”며 “피에르가 주요 연구 성과를 마리가 냈다고 설명하면서 단독 수상을 고사해 공동 수상을 할 수 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했다.
한편 물리학상에서는 여성 수상자가 여전히 가뭄이다. 올해 여성 과학자가 물리학상을 수상한 건 마리 퀴리(1903년), 마리아 메이어(1963년) 이후 세 번째이자 55년만이다.
3. 다른 주제 연구해 공동 수상
최근 노벨상 수상 경향에서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공동 수상이다. 올해도 물리학상과 화학상, 생리의학상에서 단독 수상은 없었고, 각각 3명, 3명, 2명이 공동으로 수상했다.
한국연구재단 분석 결과 과거에는 단독 수상이 많았지만 점차 공동 수상이 늘고 있으며, 특히 최근에는 3명이 공동 수상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1900년대 초반에는 단독 수상이 우세했지만, 1950년대 이후에는 2명의 공동 수상이 늘었고, 2000년대 이후가 되면 3명의 공동 수상이 우세한 것으로 분석됐다.
실제로 2009년부터 10년간 노벨 과학상 공동 수상은 90%에 이른다. 대부분의 연구가 개인이 혼자 이룩한 성과가 아니라 수상자들이 직간접적으로 교류했다는 뜻이다. 1950년대 이후 과학기술의 진보와 거대화, 학제간 융합화 등의 연구 방향이 주를 이루면서 공동연구가 증가했고, 이에 따라 노벨상에서도 공동 수상이 늘었다.
다만 공동 수상자들의 협력 유형은 분야에 따라 달랐다. 한국연구재단의 분석 결과 수상자끼리 협력 연구를 한 경우는 약 80%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중 물리학상은 주로 연구자들이 협업해 함께 핵심 연구물을 생산하는 경우(공동 연구)가 가장 많았고, 핵심 역할을 하는 연구자가 존재하거나 거대 프로젝트 연구를 수행하는 경우가 뒤따랐다.
반면 화학상과 생리의학상은 수상자들의 연구가 유기적으로 연결돼 단계적으로 발전을 이룬 경우(연관적 기여)가 가장 많았다.
이런 시각에서 올해 수상은 예외적으로 평가 받는다. 김 정책연구팀장은 “공동 수상한 업적은 대부분 수상자 사이에 연구 협력이 있었거나 연구 사이에 연관성이 존재하는데, 올해 물리학상은 각자 다른 단독 연구로 공동 수상했다”며 “이렇게 단독 연구로 공동 수상한 사례는 최근 10년간 3건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올해와 비슷한 경우가 2015년 생리의학상이다. 당시 생리의학상은 3명의 과학자가 공동으로 수상했는데, 투유유 중국중의과학원 교수는 말라리아 환자의 사망률을 낮추는 약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고, 윌리엄 캠벨 미국 드루대 명예교수와 오무라 사토시 일본 기타사토대 명예교수는 기생충 질병에 면역력을 제공하는 약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화학상과 생리의학상 경계 모호
올해 노벨 화학상 수상자 발표 뒤 의아해한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생리의학상을 받아도 될 만큼 연구 분야가 효소와 항체로 인류의 질병 치료에 기여한 업적이었기 때문이다.
화학상과 생리의학상의 모호한 경계는 비단 올해에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2009년에는 리보솜의 구조와 기능에 대한 연구 업적이, 2015년에는 DNA 복구 메커니즘 연구 업적이 화학상을 수상했다.
실제로 노벨상위원회가 공개한 1901~2014년 수상자의 주요 연구 분야 분류를 보면 화학상과 생리의학상에 공통적으로 생화학이 기재될 만큼 수상 범위가 겹친다. 생화학 분야 연구 업적이 노벨상을 받은 경우는 화학상에서 50명, 생리의학상에서 29명이다.
한국연구재단은 20세기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눠 노벨상 수상 주제를 분류했다. 그 결과 물리학상 수상 연구는 전반기에 방사선과 X선, 원자이론, 양자역학이 많았고, 후반기에는 광학, 우주 천문학, 소립자 이론이 우세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대부분 정통 물리학에 속한 연구 업적이 물리학상을 수상한 셈이다.
반면 화학상은 전반기에는 유기화학과 물리화학이 주요 수상 분야였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생화학 분야가 압도적으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생리의학상도 과거에는 면역학과 병리학이 주요 수상 분야였지만, 20세기 후반에는 생화학 분야가 많은 것으로 분석됐다.
김 정책연구팀장은 “화학은 성분의 구조와 원리를 연구하는 학문인 만큼 물리학이나 생물학 등 다른 분야와의 융합이 잦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며 “특히 20세기 후반부터 분자생물학과 생화학 분야가 각광 받으면서 화학상과 생리의학상의 경계가 모호해졌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노벨상이 100년 이상 수상 기준과 수상 분야의 틀을 고스란히 이어온 탓에 새로운 연구 분야가 탄생하거나 세분화되는 현대 과학의 흐름을 쫓아오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시각도 있다.
5. 일본 약진, 벌써 23명 수상
수상자의 국적에 따라 국가별로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분석하면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는 단연 미국이다(약 44.3%). 영국(약 14%)과 독일(약 11.7%)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이들 3개국 수상자를 합치면 약 70%에 이른다. 나머지 25개국이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9월 발표한 ‘노벨과학상 종합분석 보고서’에서 “주요 3개국에서 노벨 과학상 전체 수상자의 약 70%가 배출되고 있다”며 “기관 별로는 미국 하버드대, 캘리포니아공대, 스탠퍼드대, 매사추세츠공대(MIT), 영국 케임브리지대 등에서 수상자가 최다 배출되는 만큼 일부 국가와 연구기관에 수상자가 집중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노벨 과학상 수상 업적이 실린 논문은 ‘사이언스’ ‘네이처’ ‘셀’ ‘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 등으로, 4대 메이저 학술지 쏠림 현상도 뚜렷했다. 보고서는 이에 대해 “노벨 과학상과 일부 학술지의 연관성이 뚜렷하다”고 분석했다.
이는 노벨 과학상에서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실제로 노벨 과학상 수상자 후보를 추천하는 과정에서 전임 수상자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는데, 이들과 같은 연구소나 학계에 속해 있을수록 추천 가능성이 높아진다.
한편 노벨상 가뭄인 아시아에서 일본은 노벨 과학상 수상자를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특히 올해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의대 명예교수가 생리의학상을 받으면서 올해까지 일본에서는 1949년 첫 수상 이후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23명(수상 당시 미국 국적 2명 포함) 탄생했다.
특히 2000년대 약진이 두드러진다. 2002년에는 물리학상과 화학상 두 분야에서 수상자를 배출하는 등 일본은 2000년 이후에만 노벨 과학상에서 18명의 수상자를 배출했다. 김 정책연구팀장은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투자해왔고, 이미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대등한 전쟁을 할 만큼 진보한 과학기술을 보유했었다”며 “그런데도 대부분의 수상자가 2000년 이후에 나온 것을 보면 20세기 기초과학에 투자한 결실이 21세기에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의 경우 1990년대부터 정부의 기초연구 지원이 본격화된 만큼 기초 연구가 제대로 이뤄진 건 30년도 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노벨 과학상 수상이 수십 년 전 연구 업적에 대한 공로로 수여되는 만큼 향후 일본에서도 수상자가 나오기 힘들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이효정 일본 홋카이도대 의학대학원 교수는 과학동아와의 e메일 인터뷰에서 “일본의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몇 년 전에 비해 줄어드는 경향은 사실”이라면서도 “하지만 지금도 일본 정부는 기초과학에 장기적으로 큰 규모로 투자하고 있고, 일본 과학계도 해외 연구기관과의 공동 연구를 활성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가 운영하는 일본학술진흥회(JSPS)는 일본인 연구원과 학생이 해외에서 공동연구를 진행하거나, 외국 연구원이 일본에서 연구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교수는 “지난해 JSPS가 외국인 연구원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홋카이도 의학대학원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연구했고, 올해는 JSPS에서 신진 연구자에게 지원하는 스타트업 연구비를 지원 받았다”고 설명했다. 정부의 안정적인 지원 덕분에 기초 연구를 계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노벨상 수상과 같은 좋은 성과를 이루려면 과학자들이 개인의 단기 성과보다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연구를 추구할 수 있는 정책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