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수를 늘리기 위해 하나의 연구 내용을 여러 개로 쪼개 서로 다른 저널에 투고하는 이른바 ‘논문 쪼개기’(#1), 자신의 기여도를 높여 조금이라도 높은 점수를 받기 위해 연구에 참여한 사람의 이름을 고의로 삭제하며 발생하는 ‘유령저자’(#2), 자신이 썼던 논문 내용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새로운 내용인 것처럼 둔갑시켜 논문을 작성하는 ‘자기복제’(#3). 이는 연구개발(R&D) 과정에서 고질적으로 발생하는 대표적인 연구윤리 문제들이다.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 못 따라와
과연 이런 문제들이 과학자의 연구윤리 의식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일까. 현장에서는 R&D 평가 방식도 연구 부정을 부추긴다고 지적한다. 국내 R&D 평가 시스템은 오랫동안 정량평가에 따른 서열화에 치중돼 있었다. 국가 R&D 예산의 25%를 차지하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경우 1991년부터 평가 점수에 따라 등수를 매겼다. 이때 점수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소는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저널에 실린 논문의 수다.
논문 수를 따지는 R&D 평가 방식이 자리 잡으면서 긍정적인 영향도 나타났다. 2001년 한 해에만 SCI급 저널에 게재된 국내 논문은 1만5896편으로 점유율은 1.63%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 수치는 차츰 늘어나 2015년에는 5만 7626편이 게재됐고 점유율도 3.78%로 늘었다. 2014년과 2015년을 비교하면 미국은 점유율이 0.08% 증가한 반면, 우리나라는 4.54% 증가했다. 그만큼 국내 과학 연구 역량이 개선됐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면을 살펴보면 연구의 질적 성장이 양적 성장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 논문이 인용된 횟수를 의미하는 피인용횟수는 연구 내용이 좋을수록 높다. 동료 과학자들이 그만큼 많이 인용하기 때문이다. 남기태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새로운 주제의 논문이거나 획기적인 연구일수록 인용횟수가 높다”며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논문의 피인용횟수가 낮다면 연구의 질이 낮을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2010~2014년 국내 SCI급 저널에 게재된 논문의 편당 피인용횟수는 4.86회로, 논문 수 상위 50개 국가 중 31위에 그쳤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있는 손광효 박사는 “막스플랑크연구소에 있는 유명한 과학자들의 경우 한번도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저널에 논문을 내는 경우를 종종 봤다”며 “그런데도 피인용횟수는 1000회 이상 된다”고 말했다. 익명을 요구한 국내의 한 박사후연구원은 “지금은 논문을 쥐어짜내는 식”이라며 “새로운 평가 방식의 도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질적 성과지표 활용 늘어야
전문가들은 R&D 평가의 목적이 연구기관이나 연구자 통제가 아니라 관리라는 시각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막스플랑크연구소의 경우 다른 기관이나 연구자들과 비교하지 않고, 연구자에게는 평가 결과에 대한 피드백을 반드시 요구해 의견을 듣는다. 연구자의 이의 제기나 건의 사항을 반영해 평가 시스템의 유연성을 높이기 위함이다.
막스플랑크연구소 복잡계물리연구소장을 지낸 피터 풀데 박사는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연구자의 연구 방향이 잘못됐다고 판단하더라도 연구자가 이를 바꿀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을 준다”며 “평가를 (연구자를 통제하는) 권력으로 이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도입된 평가 방식이 ‘피어리뷰(동료평가 방식)’다. 관련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연구 내용의 독창성과 의미 등 정성적인 내용을 평가한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세계에서 피어리뷰 시스템이 가장 안정적이고 투명하게 구축된 것으로 평가 받는다.
국내에서는 최근 기초과학연구원(IBS)이 처음으로 동료평가방식을 도입해 연구단을 평가했다. IBS는 연구분야에 이해도가 높은 국내외 석학 10명으로 이뤄진 성과평가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중 절반 이상은 해외 석학들이다. 정유진 IBS 연구평가팀장은 “연구단 출범 후 최초 평가인만큼 지난 5년간의 성과와 과학적 진보에 대해 국제적 수준에서 평가 의견을 받고 있다”며 “모든 평가위원들이 2박3일간 연구단 전체를 만나보고 질의응답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IBS는 올해 9개 연구단에 동료평가 방식을 적용할 계획이다.
하지만 일반 연구기관이나 대학에서 100% 동료평가 방식을 도입하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평가에 투입되는 비용과 물리적인 시간의 제약이 크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이를 보완하기 위해 2013년 ‘국가연구개발사업 표준성과지표’를 발표하면서 질적 성과지표 104개를 새롭게 추가했다.
질적 성과지표에는 피인용횟수, 고피인용도 논문 수, 즉시성 지수 등이 포함됐다. 특정 기간 논문의 평균 인용 횟수를 파악하고(피인용횟수), 논문 발표 뒤 10년간 피인용도가 상위 1%에 해당하는 논문 수를 조사하며(고피인용도 논문 수), 논문이 발표된 해에 얼마나 빨리 많은 연구자들에게 인용됐는지(즉시성 지수) 등을 통해 논문의 질적 수준을 일차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논문 수와 피인용횟수를 모두 고려한 H-지수의 경우 연구자의 전체 논문 중에서 특정 피인용횟수를 넘긴 논문이 최소 몇 개인지 확인할 수 있다.
질적 성과지표의 활용도 향상 연구에 참여한 김민우 연구성과실용화진흥원 경영관리팀장은 “고피인용도 논문 수는 최상위 수준의 연구에만 해당하는 만큼 모든 연구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필수 지표로 사용하기는 어렵다”며 “주요 국가의 평균 피인용횟수를 넘긴 논문 수로 대체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김 팀장은 “궁극적으로는 동료평가 방식 등 완전한 질적 평가에 가까운 형태로 평가 방식이 발전하겠지만 그때까지 연구자들에게는 질적 성과지표가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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