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과학자 엄마’ 입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을 좋아했거나 좋은 롤모델을 만나 이공계로 진학하더라도, 여성들은 또 다른 큰 산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육아와의 ‘전쟁’이다. ‘엄마’가 된 많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지금도 아이를 키우느라 연구 현장을 떠나고 있다. 어떻게 해야 과학자와 엄마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을까.
“작은 기업은 인건비에 민감할 수밖에 없잖아요. 복귀하는 데 인건비 지원이 큰 힘이 됐습니다.” (김영주 (주)자연과기술 선임연구원, 경력단절 1년)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오랫동안 연구를 하지 못했어요. 연구개발 직으로 복귀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죠. 연구비를 지원 받는 최대 3년 동안 연구의 ‘감’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김연태 연세대 자연과학연구원 연구교수, 경력단절 2년)
경력단절 여성과학자 약 30만 명
한국여성과학기술인지원센터(WISET)가 발간한 ‘2015년도 여성과학기술인 양성 및 활용통계 재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이공계 출신 기혼여성 중 비(非)취업자는 43만9300명이다. 이 중 출산과 육아 등으로 직장을 그만 둔 경력단절 여성은 29만7200명으로 70%에 육박한다.
엄마가 된 우수한 여성 과학기술인을 놓치지 않을 대안으로 WISET은 ‘여성과학기술인 R&D 경력복귀 지원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이 지원사업의 수혜자가 되면 인건비를 포함한 연구비를 최대 3년간 지원받게 된다. 석사학위 소지자는 연간 2100만 원, 박사학위 소지자는 연간 2300만 원까지 지원된다.
이 사업에 참여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로 ‘사전 매칭’ 방법이 있다. 경력단절 여성이 일할 연구소나 기업을 직접 확보하거나, 기관이 채용할 경력단절 여성 연구원을 직접 확보해 함께 사업을 신청하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경력단절 여성이나 기관이 WISET 데이터베이스에 각각 등록한 뒤 서로를 찾는 ‘사후 매칭’ 방법이다. 신청기관이 복귀 연구과제를 등록하면, 신청인이 선택해 응시한다. 일종의 구인구직 사이트인 셈.
WISET은 이런 방법으로 2012년 9월부터 2016년까지 76개 연구기관에 207명의 경력단절 여성 과학기술인의 복귀를 지원했다. 복귀 연구자들은 경력단절 경험에도 불구하고, 2016년 12월 기준 국내외 학술지에 논문 177편을 게재했고, 이 가운데 117편은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논문으로 조사됐다.
특허출원과 등록은 56건, 국내외 학회 발표는 443건 등으로 활발히 활동했다.
경력단절 뒤에도 네트워크 끈 놓지 말아야
성공적인 복귀를 위해 경력단절 여성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부분도 있다. 그 중 하나가 경력이 단절되더라도 지도교수, 또는 예전에 함께 일했던 직장 동료나 선후배 등과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화여대 환경공학과에서 수(水)생태 복원을 주제로 석사학위를 받은 김영주 씨는 졸업 뒤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수자원·하천연구소에서 계약직 석사후연구원으로 5년간 일했다. 그런데 계약이 만료될 때쯤 첫 아이를 출산하게 됐고, 이른바 ‘독박 육아’가 시작됐다. 계약은 연장되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뒤, 예전에 함께 일했던 선배가 하천 복원 기업을 설립한다는 소식을 듣게 됐다. 연구를 함께 하고 싶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협의를 거쳐 WISET 경력복귀 지원사업에 사전 매칭으로 지원했다. 그 결과 지난해부터 선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에서 수자원 관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연태 씨는 졸업 뒤 첫 아이를 키우며 정수기를 만드는 민간기업에서 6년간 일했다. 그러나 건강이 나빠져 그만둘 수밖에 없었고, 둘째 아이까지 낳고 난 뒤에는 복직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육아에 전념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우남칠 연세대 지구시스템과학과 교수가 일손이 필요하다며 연락을 해 왔다. 6개월간 연구보조를 했다. 이를 계기로 WISET 경력복귀 지원사업에 사전 매칭으로 지원했다. 2015년부터 연세대 자연과학연구원 연구교수로 일하고 있다.
주된 경력단절 원인은 육아
사실 여성 과학기술인의 누출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예방’이다. 그들이 떠나는 근본적인 이유를 찾아 해결하면 된다. WISET이 발간한 ‘2015년도 여성과학기술인 양성 및 활용통계 재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경력단절 원인으로 육아가 가장 많았다(34.9%).
취재를 위해 만난 경력복귀 여성 과학기술인들은 타 분야 여성들과 다른 특별한 지원을 바라는 게 아니라고 했다. 어차피 실험과 논문 작성, 학회 발표 등 업무는 다른 사람이 대신 해줄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박지현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과학기술 연구자로서가 아니라 대한민국 ‘워킹맘’으로 원하는 건 비슷하다”고 말했다.
박 선임연구원은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문제로 구시대적인 조직 문화를 꼽았다.
늦게까지 야근해야만 열심히 한다고 보는 인식, 출산·육아 휴직 등 있는 제도조차 마음 편히 쓸 수 없게 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다는 얘기다.
그는 과거 한국생명공학연구원에서 7년간 연구를 했지만 계약 만료 뒤 연장이 되지 않아 경력이 단절됐다. 일반 기업에 취업하려고 면접도 봤지만, 회사들은 박 씨의 어린 아이를 이유로 채용을 거절했다. 늦게까지 일해야 하니 9시까지 운영하는 보육시설을 알아보라는 회사도 있었다.
그는 경력복귀를 한 지금도 “어린이집에 가장 먼저 등원해 가장 늦게 하원하는 아이를 볼 때 또다시 퇴직을 생각하게 된다”며 “일하는 동안만이라도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기관, 초등학교에 들어간 아이를 방과 후에 돌봐줄 곳이 절실하고, 6시에 퇴근할 수 있는 문화가 빨리 자리를 잡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사정을 일일이 다 봐주면 어떻게 연구개발을 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좋은 사례를 만드는 곳도 있다.
김영주 선임연구원이 일하는 (주)자연과기술은 유연근무제를 시행하고 조직 문화도 자유로운 편이다.
김 선임연구원은 “책임연구원과 일정 등을 충분히 조율할 수 있는 분위기”라며 “육아와 일을 병행하기 위해 현재 파견 나와 있는 사무실로 연구개발에 필요한 장비 등을 옮겨 오려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4년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여성이 임신, 출산, 육아로 경제활동을 포기한 데 따른 사회적 비용은 13년간 195조 원이다. 만약 경력단절을 예방할 경우, 과잉교육, 임금손실, 재취업 비용 등을 예방할 수 있어 180조 원의 사회적 편익이 날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임신과 출산, 독박 육아로 지금 당장 연구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여성 과학기술인 한 명 한 명에게는 사실 이 같은 사회적 편익은 먼 이야기일 뿐이다. 그들은 그저 사랑하는 아이를 잘 키우면서 연구 활동을 계속 하고 싶은 현실적인 방법이 있길 원한다. 엄마이면서 동시에 과학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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