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혈액에는 약 10~20μg의 DNA가 떠돌아다닌다. 대부분은 세포가 정상적으로 사멸하는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DNA다. 그런데 암 환자의 경우는 여기에 암세포에서 떨어져 나온 DNA도 극소량 섞여있다. 혈류 속 DNA를 분석해 암세포에서 나온 돌연변이 DNA를 찾아내면 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다. 이런 ‘액체 생검(Liquid Biopsy)’ 아이디어는 사실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심지어 소변, 질액, 침, 날숨에서도 유전정보를 채취할 수 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그러기 위해서는 액체 속 극소량의 암 DNA를 민감하게 감지하고 정량화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한데 개발이 어려웠습니다. 전체 암 덩어리에서 돌연변이가 일어난 비율은 0.1~10%밖에 안 되거든요.” 유전체 분석을 통해 암 임상연구를 하는 박웅양 삼성서울병원 삼성유전체연구소장은 액체 생검이 실용화되기 어려웠던 이유를 이 같이 설명했다. 그런데 최근 5년 사이 연구가 급물살을 탔다. 가던트 헬스, 그레일 같은 글로벌 유전체 분석 전문업체들이 0.1%의 돌연변이 세포를 잡아낼 수 있는 원천기술을 개발한 것이다. 혈액 10mL를 채취하면 돌연변이 2~3개가 발견되는데 이것만으로 암을 진단할 수 있다.
이런 검사를 개발하는 데에는 다량의 DNA를 한꺼번에 해독하는 차세대 염기서열 해독 기술(NGS)이 밑바탕이 됐다. NGS는 혈류 속 돌연변이 DNA를 한꺼번에 관찰할 수 있다. 폐암처럼 기존에 알려진 암의 특정 돌연변이를 추적하는 과거의 방식보다 암을 진단하는 민감도가 훨씬 높다.
국내 임상시험 성공사례 ‘속속’
삼성유전체연구소는 이런 기술을 적용한 암 진단기기 ‘리퀴드스캔’을 개발해 췌장암 환자의 재발 여부를 조직 검사보다 2~3개월 먼저 알아내는 데 성공했다. 연구팀은 췌장암 환자 19명을 대상으로 3개월 간격으로 혈액 속 암 DNA를 관찰했다. 박 소장은 “혈액 속 DNA는 20분이 지나면 분해되기 시작한다. 몸 속 암세포의 상태를 거의 실시간으로 알 수 있는 셈”이라며 “돌연변이의 종류, 양의 추이를 통해 재발 여부를 조기에 파악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혈액 생검은 환자별 항암 맞춤치료에도 쓰인다. 삼성유전체연구소는 유방암 환자 15명에 대해 수술 전 항암치료가 얼마나 효과를 보이는지 혈액을 통해 알아냈다. 유방암은 수술 전에 암 덩어리의 크기를 줄이기 위해 먼저 항암 치료를 두 달 가량 하는데, 환자 10명 중 한 명에게서는 효과가 없다. 박 소장은 “혈액 생검으로 항암 효과가 없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수술에 돌입한다”며 “혈액 생검을 활용할 수 있는 분야는 무궁무진하다”고 설명했다(아래 그림 참조).
유용한 임상 사례 확보가 관건
혈액 생검이 본격적으로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사례를 많이 확보해야 한다. 최소한 수 년이 걸리는 일이다. 혈액 생검으로 돌연변이 DNA가 검출된 사람에게 실제로 암이 발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기다리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레일은 2020년까지 2만 명의 사례를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연구에 수백억 원을 투자했다.
우리나라는 지난 3월부터 암 환자가 NGS 검사를 할 수 있도록 건강보험을 적용하기 시작했다. 암 진단을 받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암 여부를 알기 위해 NGS 검사를 하는 것은 포함되지 않지만, 장기적으로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확장될 가능성도 있다.
의학을 공부하다 보면 우리 몸의 치밀하고 꼼꼼한 완성도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필자는 면역학을 처음 공부했을 때가 그랬다. 몸 안의 항상성을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안전장치 중에서도, 면역력은 외부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안전하게 유지해주는 고마운 체계다. 놀라운 것은, 인간이 태어나면서부터 스스로 면역체계를 구성하게 되는데, 먼저 공격력이 있는 면역세포만 살아남게 하고(양성 선택), 그 중에서 몸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는 면역세포는 죽게 만드는(음성선택) 과정을 거치며 세균이나 바이러스와 같은 외부 공격 물질만 공격하는 강성한 군대를 양성한다.
면역체계 피해가는 지독한 암
하지만 이런 면역체계도 허점을 보이는 질병이 있다. 바로 암이다. 암은 자기 자신의 세포에서 돌연변이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항원이 숙주의 항원과 비슷하다. 즉 면역체계가 인지하기가 어렵다. 또 암세포가 워낙 다양해서 항원 역시 종류가 많기 때문에 모든 항원을 공격대상으로 인지하고 일일이 반응하기 쉽지만은 않다. 면역체계가 인식을 한다고 해도 암은 스스로 특정 단백질을 발현하거나 신호 전달 물질인 사이토카인 등을 분출하며, 숙주의 면역체계를 피해 안전하게 영역을 넓혀나간다. 실제로 암 조직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암 덩어리 주위로 면역 세포들이 성을 쌓듯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면역체계가 암 덩어리를 공격할 대상으로 판단하면서도, 공격을 효과적으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T세포 기능 높여… 폐암에서도 효과
그러다 2012년에 드디어 면역항암제 연구에 전환점이 되는 임상시험 결과가 발표됐다. 암세포 표면에 있는 단백질에만 반응하는 단클론항체(하나의 항원에만 반응하는 항체)가 큰 항암효과를 보이고 부작용도 없다는 내용이었다. 암세포 표면에 있는 PD-L1 단백질은, 면역체계를 조절하는 세포에서 발현돼 암을 직접 공격하는 T세포의 PD-1 수용체와 결합한다. 그 결과 T세포의 기능을 떨어뜨리고 사멸에 이르게 한다. 연구자들은 PD-L1이 과하게 발현될 경우 T세포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데 착안했다. PD-L1과 PD-1의 결합을 억제하도록 항PD-L1 및 항PD-1 면역항암제를 주입해 폐암, 대장암에서 항암효과를 거뒀다. 폐암은 암 중에서도 발생률과 사망률이 가장 높은 암이다.
이렇게 면역을 조절하는 항암치료는 암세포가 다양할수록 오히려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다양한 암세포의 항원에 맞게 T세포 역시 다양한 클론으로 활성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존 항암제가 암세포의 기전 하나를 공략하는 것과 달리, T세포는 다양한 암세포의 다양한 기전을 공격할 수 있다. 아직 정확한 이론으로 정립되지는 않았지만, 암세포 내 돌연변이의 개수가 많을수록 면역 조절 항암치료의 효과가 높다는 등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보고가 이어지고 있다.
내성 기전 극복이 관건
물론 면역 조절 치료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전체 암환자 중 약 70~80%에게는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효과를 보이는 암과 그렇지 않은 암이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결국 앞으로의 치료 방향은 두 가지다. 면역 조절 치료가 효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환자들을 선별해 치료하고, 나머지 환자에게는 각각의 내성 기전을 극복할 수 있는 보조 약제를 조합해 투약을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과제를 해결하려면 가진 능력과 시간을 집중해야겠다는 고민 끝에, 오랜 기간 몸담았던 병원을 떠나 현재 유전체분석 회사, 항암제신약개발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암 유전체 지도(The Cancer Genome Atlas)에 기록된 32개 암종, 1만여 명 분의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해 종양의 주변 환경에 따라 면역 조절 치료 효과가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연구하고 있다. 또 면역 조절 치료가 듣지 않는 환자들의 내성 기전을 연구해 이를 극복하는 약제를 개발 중이다.
in 과학동아 31년 기사 디라이브러리(정기독자 무료)
특집 3파트 ‘쓰레기 RNA가 암 정복한다’ (2015.8) 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1508N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