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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의 한국 과학·기술 양과 질에서 눈부신 변화

10년사이 연구개발비의 정부·민간비율에서 민간우위가 현저해졌다. 기초과학연구가 너무 초라하다는 인식을 깊이한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다. 세계적인 발견·발명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국내 수준의 향상을 의미하는 것.

우리 속담에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이 있으나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지난 10년간 일찍이 없었던 큰 변혁과 도약의 과정을 겪었다. 과학기술투자 규모는 1980년의 3천여억원에서 1980년대 말에는 2조원대를 넘어 섰으며 연구개발인력도 1만8천여명에서 6만명대로 올라섰다.

1980년대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는 민간연구노력의 급속한 성장이었다. 당초 80년에는 총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정부와 민간의 비중은 엇비슷했으나 80년대 말에는 민간부문이 80% 이상을 점하게 되었다. 1987년말 민간의 연구개발투자는 1조5천억대로 팽창하여 1980년의 15배를 기록했다. 한편 1989년도의 과학기술처의 예산도 10년 전의 5배인 2천6백여억원으로 늘어 났다.

이런 계량적인 변화와 함께 질적인 변화도 두드러졌다. 연구의 내용은 도입기술의 소화나 개량위주에서 차츰차츰 원천기술개발로 전환하기 시작했으며 그 규모도 대형화되는 추세를 보이기 시작했다.

기술우위정책의 실효

지난 날을 되돌아 볼 때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는 약 10년 단위를 두고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다. 예컨대 1959년 원자력 연구소의 출범을 계기로 하여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근대적인 경구소활동이 시작되었으며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가 완공되어 본격적인 연구개발활동에 들어감으로써 산업기술개발연구의 효시가 되었고 1971년 개원한 한국과학원은 우리나라 이공계 고등교육에 새로운 이정표를 그었다.

그런데 정치적인 격동기였던 1980년은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로서도 가장 큰 변동의 해였다. 정부의 5개 부처산하에 산재하던 16개의 연구소가 8개의 대형연구기관으로 통합되어 과학기술처산하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당시 정부가 연구개발체제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하게 된 배경으로서는 종래 많은 연구소들이 적정규모에 미치지 못하고 기능과 전문분야가 비슷한 연구기관간의 중복연구가 많으며 연구소증설로 연구직이 관리직으로 빠져 나가 연구능력이 떨어지고 주관부처가 서로 달라서 출연연구기관간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연구효율이 떨어지며 국가적인 차원에서의 종합조정과 관리가 되어 있지 않아 연구투자의 효율화가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이리하여 과학기술처는 대형연구개발체제로 출범한 출연연구기관들을 이끌고 '기술우위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정부의 제5차 경제사회발전 5개년계획(1982~86년)과 때를 맞추어 추진된 이 정책의 목표는 요컨대 기술혁신을 통해 선진첨단기술을 토착화함으로써 경제성장을 선도한다는 것이었다.

'기술우위정책'의 핵심사업인 국책연구개발사업은 우리나라 과학기술연구개발사에 몇가지의 새로운 이정표를 구획했다. 첫째, 대형연구개발사업시대의 막이 오르게 되었으며, 둘째, 산업체와 연구계 그리고 학계의 협동 연구의 틀이 잡히기 시작했고 셋째, 첨단 기술개발에의 전면적인 도전의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이 기간중 1천건이 넘는 연구개발사업에 모두 2천3백여억원(이중에서 정부투자는 1,390억원)과 1만7천여명이 투입되었으며 8개 정부출연연구기관은 물론 8백여개의 민간기업이 참여했다. 이중에서 약 20%인 1백52건이 기업화에 성공했고 1백77건의 특허출원실적을 거두었다.

구체적인 연구개발의 성공사레 중에는 세계 최초의 고분자알로이섬유개발(한국과학기술원), 반도체리드프레임용소재의 개발(한국과학기술원, 풍산금속), 디스토마치료제의 개발(한국과학기술원, 신풍제약), VTR헤드드럼의 국산화(한국기계연구소, 삼성공업), 반도체기본소재인 단결정규소의 제조기술개발(한국화학연구소), 수심 2백50m급의 국산잠수정 개발(한국기계연구소), 항공기용 하니캄의 구조물개발(대한항공기술연구소), 디젤엔진연료분사시스템의 개발(한국디젤기기연구소)이 포함된다.
 

포항공대의 가속기 부지
 

선진기술국들의 발돋음

'기술드라이브'의 결과에서 자신감을 얻은 과학기술처는 다시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발전장기계획'을 수립하고 2001년끼지 세계 10위권 기술국으로 발돋음하기 위한 분야별 목표를 세운 뒤 신물질, 생명공학, 신소재, 반도체, 슈퍼미니컴퓨터를 포함한 전략 기술분야의 국책과제를 중점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부의 출연연구기관의대단위화 정책은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한편 연구기관의 전면적인 통폐합은 일반 행정기구의 경우와는 달리 많은 시간을 두고 그 타당성을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귀중한 교훈도 남겼다. 새로운 체제가 자리를 잡고 연구활동을 궤도에 올리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정부의 통합조치로 인재양성과 연구개발을 함께 수행할 목적으로 연구개발기관인 한국과학기술연구소와 과학영재양성기관인 한국과학원은 한국과학기술원으로 통합되었으나 그 뒤 상황의 변동으로 각각 독립기관으로 운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인식되어 통합 8년만인 1989년 다시 분리하여 각각 독립기관으로 재출발하게 되었다. 한편 당초 과학기술처 산하기관으로서 국가적인 과학기술정보유통업무를 담당하던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는 매우 이질적인 업무성격을 가진 산업경제연구기관인 산업연구원에 통합되어 상공부산하로 들어가면서 상공부측의 고유업무에 주력하다보니 서비스의 주요대상이 되어야 할 과학기술계로부터는 차츰차츰 멀어져 가는 존재가 되어버렸으며 최근 과학기술계에서는 새로 정보유통기관을 설립해야 한다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리드 프레임 소재
 

아쉬운 기초연구지원

1989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몹시 시끌시끌한 봄과 여름을 보냈다.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의 회원단체인 2백70여개의 학회와 협회들은 공동명의로 기초연구의 활성화를 위한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는가 하면 19개 정부출연 연구기관장들도 연서로 기초과학연구의 활성화를 위한 자금지원을 건의하고 나섰다. 우리나라 과학기술계가 모두 참여하다시피한 이 대대적인 캠페인이 노리는 당장의 목적은 3조3천억원에 이르는 1988년도의 세계(歲計)잉여금 중에서 적어도 3천억원은 기초연구활성화를 위한 자금으로 배정받기 위한 것이었다.

이 캠페인을 계기로 하여 그동안 우리나라 정부의 기초연구지원이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나 보잘 것 없었다는 사실이 표출되면서 과학기술계는 정부와 정계 그리고 사회전반에 걸쳐 기초연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전기를 마련하려고 노력햇다.

실제로 우리나라의 기초연구활동은 국가의 규모나 발전의 수준에 비해 너무나 저조하다는 것은 여러가지 계량적인 비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예컨대 1988년도의 각국의 기초초연구개발투자액을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대학의 연구인력 1인당 1백 40만원이엇으나 미국은 그 54배나 되는 7천6백만원, 일본은 33배인 4천6백만원이었으며 우리와 같은 신생고업국인 대만의 경우도 우리보다 5배나 많은 7백40만원이었다.

논문편수 이집트보다 적어

연구자 1인당 보유시설의 수준은 우리나라 대학의 경우는 미국대학의 2억원에 비해 경우 6백만원 정도여서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전에 기초연구투자액을 비교할 때 1988년 중 우리나라는 2백31억원이었으나 미국은 3백64배인 8조4천억원, 일본은 2백42배인 5조6천억원 그리고 대만도 3배인 6백15억원이었다.

한편 기초연구의 수준을 어림하는 하나의 지표가 될 수 있는 기초연구논문(미국 SCI 게재)편수는 미국의 21만여편(1984년)에 비하면 겨우 5백55편으로 이집트나 대만보다도 더 하위인 17위로 처졌다. 그런데 80년대 이전에는 50여편에 지나지 않았던 SCI게재의 기초연구논문편수는 80년대 이래 기초연구에 대한 한국과학재단의 지원이 본격화하면서 차츰차츰 늘어나서 그만큼이라도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국민총생산고를 감안한 이른바 프레임(Frame)의 공식에 의한 기대치에서 볼 때 겨우 38%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실상 우리의 기초연구는 1960년대 이래 수출제일주의 경제개발정책에 가려 정부의 지원이 못미치는 사각지대에 방치되다시피해 왔었다. 단기적이고 직접적인 효과를 선호했던 우리의 경제 및 정치체질에서는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기초연구였으나 이제 새로운 인식을 하지 않으면 안될 중요한 국면과 직면하게 되었다.

오늘날 기술혁신은 기초연구 없이는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것이 하나의 상식으로 되어있다. 예컨대 기술혁신의 방아쇠구실을 하는 신소재개발에는 물질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 간의 상호작용과 그 발생기구를 비롯하여 화학반응의 메카니즘, 물질내부와는 다른 상태에 있는 표면, 계면의 현상, 성형가공의 원자 그리고 분자구조에 대한 영향에 이르기까지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기초연구의 비중은 더욱 커지게 마련이다.

더욱이 첨단기술의 주역인 전자공학, 신소재기술, 유전공학 등 여러 분야에서 기초연구→개발연구→상품화라는 과정을 거친 뒤 상품의 라이프사이클은 종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어 기초 연구와 상품화간의 시간을 단축할 수 없다면 첨단기술시대의 치열한 경쟁에서 탈락하고 만다. 그래서 첨단기술개발과 기초연구와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밀착되어 가는 추세에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캠페인을 계기로 하여 정부당국은 물론 정치인들까지도 기초연구에 대한 국가의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인식을 함께 하기 시작했으며 1990년도 예산에서 기초연구지원자금을 대폭 증액될 것으로 기대된다.

연구장비의 대형화

우리나라의 과학기술연구인력은 1980년의 1만8천여명(그중 박사급 3천4백여명)이었으나 1989년에는 7만명을 훨씬 웃돌게 되었고 그중 박사급은 1만명대에 올라섰다. 그러나 인구 만명당 연구인력은 미국이나 일본의 33명은 물론 서독의 22명, 프랑스의 19명에 비하면 아직도 13명꼴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과학기술인력배출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온 한국과학기술원은 종래 석사학위과정교육위주에서 박사학위과정으로, 전환하는 한편 서울대학을 비롯한 일반대학에서도 대학원의 이공계 석·박사과정 정원을 크게 늘렸다. 정부의 계획은 2001년까지 모두 15만명의 연구개발인력을 확보함으로써 선진국 수준인 인구 만명당 30명의 고급연구인력을 갖출 예정이다.

한편 연구인력의 증가와 함께 차츰차츰 연구기반이 잡히면서 대형연구장비가 하나 둘씩 도입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슈퍼컴퓨터의 도입은 기초과학연구 및 첨단기술개발에서 중요한 발전의 전기를 마련했다. 1988년 11월 한국과학기술연구원 부설 시스템공학센터에서 가동을 개시한 연산속도 초당 최고 20억회의 능력을 가진 크레이-2S 슈퍼컴퓨터(값1백70억원)은 유체해석, 전자회로 시뮬레이션 및 설계, 구조해석, 대기 및 해양연구, 에너지연구, 생명공학, 기상예보부호영상처리, 양자화학, 석유탐사 및 추출, 인공지능, 공정설계, 분자역학, 경제현상분석 등 여러 연구분야에서 이용되기 시작했다.

또 1989년 7월28일 부지조성공사에 착공한 포항공대의 방사광가속기의 건설은 우리나라 과학계의 획기적인 이벤트가 되었다. 1992년 12월 선형가속기부분을 완공할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이 사업에는 모두 7백50억원이 투입된다. 직경 68m에 둘레 2백18m의 전자저장량을 가질 이 가속기는 20억전자볼트의 전자에너지를 이용하여 자외선에서 강X선에 이르기까지 넓은 영역에 걸쳐 고밀도와 고강도의 빛을 낼 수 있어 여러가지 목적에 이용할 수 있게 되며 1993년 정상가동에 들어가면 물성연구나 반도체제조 및 기초과학연구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런데 1986년 12월 개교한 포항공대는 1995년까지 세계수준급의 교수 3백명을 확보함으로써 교수 1인당 학생 7명의 비율로 교육을 하는 이상적인 교육연구기관을 지향함으로써 우리나라 이공계대학교육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앞서가는 기업의 연구개발노력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민간기업의 연구개발노력은 장족의 발전을 했다. 우선 계량적인 측면에서 볼 때 우리나라 기업의 부설연구기관의 수는 1980년의 52개에서 1989년 7월말 현재 6백81개로 크게 늘어났고 연구원수는 5천여명에서 5배가 넘는 2만6천여명으로 격증했다. 한편 산업기술연구조합은 1982년의 11개에서 1989년에는 47개로 늘어났고 조합원사도 56개에서 1천사를 넘어섰다. 더욱이 기업의 연구개발투자는 1980년의 1천여억원에서 15배가 된 1조5천억원(1987년)대로 올라섰으며 총연구개발비에서 차지하는 기업부문의 비율은 1980년의 약 50%에서 1984년에는 80%를 넘어서면서 연구개발투자의 주체는 정부에서 민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기업이 이렇게 획기적인 기술개발노력으로 전환하게 된 배경에는 몇가지 주요한 요인이 있다.

1960년대 이래 고도의 경제성장을 누려오던 우리나라는 1970년대 말 제2차 유류파동을 고비로 심각한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어 갔다. 그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고유가시대를 맞아 선진국 경기불황이 심화되면서 각국은 보호무역주의정책으로 전환하여 우리 제품진출의 길이 좁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낮은 임금의 노동력을 밑천으로 단순 모방의 외국기술을 도입하여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던 우리의 '수출드라이브'정책은 국내 임금이 상승하는 반면 우리보다도 더욱 낮은 임금의 후발개도국들의 진출로 벽에 부딪치게 되었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사실은 종래의 생산기술체계에 중대한 변화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미국을 비롯한 주요 선진국은 오랜 경기침체의 늪을 벗어나기 위해 종래의 에너지·자원집약적인 생산방법에서 새로운 기술체계로의 전환을 강력히 모색하고 나섰다. 70년대 중반이래 이들은 막대한 인력과 연구투자를 한 결과 70년대 말부터 반도체·컴퓨터를 포함한 정보기술, 신소재기술, 기계고도화기술, 광기술, 생물공학분야에서 변혁적인 기술변화가 머리를 들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첨단기술이라고 불리는 이 새로운 기술들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종래의 생산기술체계와 대체될 새로운 기술체계의 태동을 예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첨단기술들은 마침내 한 시대를 휩쓸 커다란 물결이 되어 조래 산업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철강, 금속, 기계, 자동차, 조선, 화학 섬유 등 기존산업에 대치하여 에너지, 정보, 통신, 컴퓨터, 생명산업 등 새로운 분야의 산업을 주요산업으로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무너진 저임의 성역

그런데 기술사의 맥락에서 볼 때 18세기 산업혁명이래 그 시대의 전략사업을 선취한 국가가 그 시대의 세계를 선도하고 군림해 왔다. 석탄과 섬유의 시대에는 영국이, 그리고 철강과 자동차의 시대에는 미국이 각각 '세계의 공장'이었으며 공급기지의 구실을 해왔던 것이다. 이리하여 전략산업의 변천은 그대로 세계의 선도적인 대국의 성쇠가 직결되어 왔던 것이다. 그래서 첨단기술개발을 둘러싼 각국간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는 한편 국가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첨단기술 이전에는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이른바 '기술보호주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종래 도입기술에만 의존하다시피하여 생산활동을 하던 우리의 기업들은 이런 국제적인 추세에서 기업의 성쇠를 가늠하는 중대한 위기와 직면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재래의 상품생산에서 경쟁력의 지렛대 구실을 해오던 '저임의 성역'은 무너지면서 후발국의 맹렬한 추격을 받기 시작한 우리의 기업들은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종래의 노동집약적이며 기능집약적인 산업에서 벗어나 기술집약적인 산업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기업들은 국제경쟁에서 생존하려면 기술능력배양에 의한 자체기술개발의 중요성을 절실하게 인식하게 되고 기술개발노력에 힘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세계 반도체시장의 5% 점유

80년대초 이래의 기업의 적극적인 기술개발노력의 결실은 80년대 중반부터 첨단기술 제품분야에서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예컨대 전자공업제품의 핵심인 반도체의 경우 최첨단제품인 메가디램급의 기억용 칩을 양산하는 단계로 급성장하여 유럽을 제치고 일본과 미국의 뒤를 이어 세계반도체시장의 5%를 차지하게 되었다. 1990년 초에는 칩단 4백만 비트의 기억용량을 갖는 4메가디램칩의 양산을 개시한다.

한편 83년 국산화를 개시한 퍼스널 컴퓨터는 불과 5년만인 1988년에는 1백40만대를 수출하여 세계 퍼스널컴퓨터시장의 20%를 차지하게 되었고 컬러텔레비전은 세계생산고의 14% 그리고 가전제품의 꽃인 VTR은 10%를 생산하여 일본에 이어 세계 제2위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 기업의 가전제품공장은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스페인 터키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로 진출하고 있으며 1990년대 초에는 중국과 헝가리에서도 조업을 개시한다. 1986년에는 전륜구동형 승용차를 개발하여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국내조선소는 한때 세계에서 최고의 조선실적을 올리기도 했다.

이렇게 우리의 조립기술은 이제 신진국을 바짝 뒤쫒는 자리에 와있으나 가공기술이나 제품의 설계개발기술은 아직도 선진국과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기초기술은 거의 모두를 선진국에 기대도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예컨대 재료·소재분야에서는 선진국과 8년 이상의 기술수준의 격차가 있고 생명공학분야도 7년 이상의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우리의 가장 앞선 기술인 가전기술도 일본과 비교하면 상품화기술은 3~5년 뒤지고 있는 반면 요소기술은 10년이라는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이것은 90년대의 한국과학기술계가 풀어야 할 중요한 숙제로 남게 되었다.

1980년대 세계과학계를 휩쓴 몇가지 '돌풍'은 우리 과학계의 위상을 어림할 수 있는 주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1987년 초부터 고온초전도체개발경쟁의 열풍이 선진국과학계를 휩쓸기 시작하자 우리나라 연구계와 산업계도 이 경쟁에 도전하고 나섰고 1989년 봄 폰즈와 플레이시만의 상온(常溫) 핵융합실험 발표는 우리나라 과학계에도 뜨거운 바람을 몰고 왔다. 이것은 세계 과학계에서 일어나는 중요한 이벤트에 대해 지체없이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과학계가 성장했다는 것을 의마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리하여 지난 10년간 우리나라 과학기술계는 2000년대에 선진국수준에 오르기 위한 장기적인 노력에서 매우 중요한 기반작업을 수행했다.
 

반도체와 전자제품은 한국의 산업국가로서의 위상을 크게 올려 놓았다.
 

198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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