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D 시뮬레이션으로 만든 암과 정상세포 덩어리. 다양한 색은 다양한 세포를 뜻한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705/S201706N056_1.jpg)
“암세포도 생명인데 죽일 수 없다.”
2013년 방영됐던 드라마 ‘오로라 공주(극본 임성한)’에서 수많은 시청자를 ‘멘붕’에 빠뜨렸던 대사다. 혹시 이 대사에 황당함을 느끼셨는지. 하지만 이번 기사를 읽고나면, 어쩌면 묘한 통찰(?)을 담은 대사라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자연의 생명체들처럼 암세포도 우리 몸 안에서 다양한 ‘생태계’를 이루며 살아간다는 이론이 최근 정설로 확립됐기 때문이다. 이런 특성은 약제로 암을 ‘일망타진’하기 어렵게 만든다.
클론(clone)은 유전자가 같은 세포집단을 이르는 말이다. 체세포는 스스로 분열해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세포들을 만드는데, 이들을 통틀어 클론이라고 한다. 그런데 분열하는 과정에 유전자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이때 처음 세포와 유전자가 대부분 비슷하면서도 일부가 달라진 집단을 서브클론(subclone)이라고 부른다. 암도 서브클론이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특정 인물이 폐암에 걸렸다고 해보자. 그 암세포들 안에서도 다양한 유전적 변이가 있으며, 이 암은 유전자가 조금씩 다른 세포집단(서브클론)들의 모임으로 이뤄져 있다.
서브클론은 환경 변화와 유전자 변이 때문에 생기는데 특히 악성종양(암)은 서브클론을 잘 만든다. 유전자 불안정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종양은 성장속도, 대사, 면역성, 약물반응, 전이능력같은 기능이나 표현형이 조금씩 다른 서브클론들로 이뤄져있다. 이를 ‘종양내이질성’이라고 한다. 종양내이질성을 모르면 암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
암투와 협력이 판치는 서브클론 세계
다양성은 그 자체로 암 생명력의 원천이다. 악성인 암세포로만 이뤄진 단일클론이 가장 잘 살 것 같지만, 실험결과를 보면 오히려 다양한 서브클론으로 이뤄진 암 생태계가 훨씬 잘 살았다(사람 몸에 해로웠다는 의미). 종양내이질성에 대한 연구 중에서도 서브클론들의 상호작용을 다룬 연구가 최근 활발하다. 암 생태계를 구성하는 서브클론들은 마키아벨리 뺨치는 작전을 구사하며 각자의 생존력을 극대화시킨다. 얌체처럼 일방적으로 다른 클론의 ‘단물’을 빨아먹으며 뒤통수를 치는 클론도 있는 반면, 서로 손을 잡고 기존에 없던 능력을 창조해내는 클론들도 있다. 한편에선 클론 사이에 죽고 죽이는 살벌한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미국 하버드대 의대 대나-파버 암연구소의 코넬리아 폴약 교수와 도리스 타바썸 연구원이 2015년 8월 ‘네이처 리뷰 캔서’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암의 서브클론 사이엔 ‘양성·음성의 상호작용’이 존재한다(doi:10.1038/nrc3971).
양성 상호작용에는 편리공생과 상리공생, 동반상승효과가 있다. 편리공생은 한 클론이 일방적으로 다른 클론으로부터 이득을 보는 관계다. 한 클론에서 성장인자, 사이토카인(면역계를 자극하는 신호물질), 공유 자원을 분비하면 혈액을 통해 다른 클론이 받아 이용한다. 만약 이렇게 ‘무임승차’를 하는 클론이 경쟁에서 생산자 클론을 이긴다면 공유자원은 사라지고, 결국 전체 암 군집도 약해진다. 상리공생은 둘 이상의 클론이 협력해 전체 암 군집에 이득이 되는 인자를 생산하거나 자원을 획득하는 작용이다. 종양내이질성을 크게 만들어 전체 암 군집의 생존력을 높인다. 동반상승효과는 둘 이상의 클론이 협력해, 전이능력처럼 개별적으로는 얻지 못했던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내는 작용이다.
음성 상호작용에는 경쟁과 편해공생이 있다. 경쟁은 클론 사이에 서로 억제하거나 죽이는 분자를 분비하는 작용이다. 대개 영양분이나 산소와 같은 자원이 한정적일 때 발생한다. 편해공생은 경쟁과 비슷하지만 한쪽이 일방적으로 피해를 입는 작용이다. 이로 인해 약한 클론이 멸종하고 강한 클론이 전체 암 군집에서 주도권을 차지한다. 클론들은 호르몬 또는 신경전달물질을 분비하거나, 주변 환경을 바꿔 다른 클론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친다(위 그림). 이렇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기에 단일클론만 떼어 내면 전이능력도 부족하고, 혼자 살아남기도 힘들다.
![](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article/Contents/201705/S201706N056_2.jpg)
종양내이질성, 왜 생기는 걸까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병리학 진단검사의학과의 피터 노웰 교수는 1976년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서 종양내이질성과 암세포의 진화에 대해 처음 이야기했다. 진화는 생물종에 유전자 변이가 축적되다가 어느 순간 환경이 바뀌었을 때 자연선택에 따라 종 분화가 생기며 발생한다. 이를 암 생태계에 적용하면, 정상세포가 분열해 세대가 내려갈수록 유전자의 변이가 조금씩 쌓여 가고, 스트레스 등으로 몸 안의 환경이 바뀌었을 때 그 환경에 가장 적합한 세포인 암세포가 자연선택된다고 볼 수 있다.
한번 암세포가 생겨 분열을 시작하면, 주변에 새로운 서브클론이 등장하기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다. 산소는 부족해지고 산성은 높아지며 혈관은 불규칙하게 분포된다. (일반세포 기준에서) 환경이 점점 척박해지면서 더 강하고 환경에 최적화된 서브클론이 자연선택된다. 다른 장기로 전이가 일어나면, 그 환경에 맞는 새로운 서브클론이 생긴다. 이런 식으로 서브클론의 수는 자꾸 늘어난다. 만약 특정 서브클론에 맞춘 항암치료를 시작하면, 기존에 없던 서브클론이 생겨나 주류로 떠오른다. 암과 싸우는 전략이 과거보다 훨씬 복잡해져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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