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와 광해군 때의 대표적 의사 허준(1546-1615). 그는 동방의학의 백과사전격인 동의보감을 편찬하여 한의학이 중국의학에서 벗어나 민족의학으로 자리잡는 기틀을 마련했다.
한국 사람이 쓴 책으로 중국과 일본에서까지 널리 읽히는 것은 무엇일까? 허준(許浚 : 1546~1615)의 ‘동의보감’(東醫宝鑑)이 가장 대표적인 책이다. 동양 세 나라에서 모두 한의학(漢醫学, 또는 韓醫学)의 대표적 고전으로꼽히는 ‘동의보감’은 우리나라에서 1610년 완성돼 1613년 처음 출판되었다. 그것이 일본에서는 1724, 1799년에 출판되었으며, 중국에서는 1763, 1796, 1890년에 출판됐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이 책은 다시 영인본(影印本) 즉 사진찍어 출판하는 형식으로 동양 삼국에서 여전히 보급되고 있다.
허씨 가문의 서자
한의학에 종사하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지금도 꼭 보아야할 ‘동의보감’을 지은 허준은 선조(宣祖)와 광해군(光海君)때의 대표적 의사였다. 그의 아버지는 허륜(許碖), 그의 집안은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許筠)과 마찬가지로 양천(陽川)허씨였다. 그러나 그는 서출(庶出)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양반으로 행세할 형편은 못되었다. 적서(嫡庶)의 구별이 심해져 서얼 출신에게는 의학·천문학·역관·수학 등 중인(中人)계층과 마찬가지의 기회만을 주어졌던 때문이다.
허준도 바로 이런 길을 통해 그이 일생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경기도 김포(金浦)근처에서 태어났지만 경상남도 산청(山淸)에서 성장했던 허준은 거기서 의학에 눈떠 공부를 계속했다. 그의 공부는 28세 때 의과(醫科)에 급제함으로써 효과를 내기시작했다. 곧 내의원(內醫院)에서 근무하기 시작한 것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립중앙의료원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그는 곧 임금 선조로부터 신임을 받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1590년 그가 왕자를 치료했을 때 특별 승진이 주어진 일이 있었고, 임진왜란에는 의주까지 피난가는 선조 임금 일행을 따라갔다 돌아와 호종(扈從)공신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허준이 ‘동의보감’편찬을 맡게된 것은 이런 신임을 배경으로 이루어진 일이다.
원래 이 책은 정부의 정책사업으로 시작된 셈이었다. 선조가 이 편찬 사업을 시작하며 내린 지시에 의하면 당시 의학서는 주로 중국에서 가져다 쓰는 수가 많은데 너무 번잡하기만 할 뿐 참고하기 어렵다고 써있다. 임금은 “옛날부터 전해오는 처방 가운데 번잡하고 실용성 적은 것은 버리고 진짜 보물됨직한 처방만 골라 의학의 경전을 정리해 내라”고 당부했고 이에 따라 허준은 이 책의 편찬에 착수했던 것이다.
선조는 이를 위해 궁중에 보관돼 있던 의학서적을 모두 내주어 참고케 했다. 모두 5백권이라고 기록은 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래 계획에는 허준 이외에도 정작(鄭碏)·양예수(楊禮壽)·김응탁(金応鐸)·이명원(李命源)·정예남(鄭禮男)등 당대의 대표적 의학자가 여럿 참가하고 있었다. 1596년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곧 정유왜란이 일어나 일이 중단되는 바람에 이들은 모두 떨어져 나가고 허준 혼자서 끝까지 이 일을 맡아보게 되었다.
14년에 걸친 대 편찬사업
‘동의보감’은 이리하여 시작된 지 14년 뒤인 1610(광해군2)년 완성되어 1613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25권의 짧지않은 분량이었지만 당시까지의 어느 다른 의학서보다 요령있게 잘 정리된 책이었다. 지금 한글로 번역되어 나온 책이 아주 큰 한 권으로 되어 있음을 보더라도 이 책이 그리 짧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을 것이다.
25권은 우선 목록(目錄)이 2권을 차지하고 있다. 이어 다음 다섯 편이 있다.
①내경편(內景篇, 4권) ─ 신체의 외부적 특징과 생리학 일반을 설명하고 꿈과 말에 대한 설명도 있다. 오늘의 내과에 관한 내용이 된다.
②외형편(外形篇, 4권) ─ 요즘으로 치면 외과·피부과·이비인후과가 여기 속한다.
③잡병편(雜病篇, 11권) ─ 진단방법, 특히 진맥이 설명되어 있다. 구토·땀·설사·열·기침 등과 몇 가지 전염병, 그리고 종기에 대해 설명한다. 부인과와 소아과 질환도 다뤄진다.
④탕액편(湯液篇, 3권) ─ 당시 사용되던 약품이 물(水)·흙(土)·곡식(穀)·사람(人)·새(禽)·짐승(獣)·물고기(漁)·벌레(虫)·과일(果)·채소(菜)·풀(草)·나무(木)·옥(玉)·돌(石)·쇠붙이(金) 순서로 분류되어 있으며 한글로 우리 이름도 붙여져 있다.
⑤침구편(鍼灸篇, 1권) ─ 침과 뜸의 시술 부위와 치료방법이 소개된다.
의사들은 환자의 증상에 따라 또는 질병의 위치에 따라 즉각 참고문헌을 찾아 치료에 임할수 있어야 한다. ‘동의보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아주 쉽게 처방을 찾을 수 있게 요령있게 정리된 책이다. 탕액편에 나오는 약품 이름에 일일이 한글로 우리 이름(俗名)을 기입했으며 많은 국산 약재가 소개되어 있다. 예로부터 전해지는 처방에 대해서는 모두 출전(出典)을 밝혀 더 연구할 사람의 편의에 응하고 있다. 여기 인용된 중국의 의학서는 80종이 넘는다.
의학의 대중화에 이바지
이 책에 누가 ‘동의보감’이란 이름을 붙였던 것일까? 아마 허준 자신의 생각이었을 것같다. ‘동의’(東醫)란 물론 ‘한국의학’이란 뜻으로 만든 표현이다. 예로부터 중국 의학에 크게 의존하던 우리 의학은 고려말과 특히 조선초 세종(世宗) 때에 ‘향약’(鄕薬) 운동으로 독자적인 수준을 이루기 시작했다. ‘향약’의 전통을 ‘동의학’으로 높여 우리에게 맞는 우리의 의학을 천명한 것이 허준의 가장 큰 공헌이라 하겠다. 그 후 이 전통은 유명한 이제마(李済馬)의 사상(四象) 의학으로 이어진다. 이제마가 그의 저서에 다시 ‘동의’란 표현을 넣어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이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었다.
허준이 의성(醫聖)이라고까지 불려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동의보감’이외에도 그는 몇 가지 의학서를 더 남겼다. ‘신찬벽온방’(新纂辟溫方) ‘벽역신방’(辟疫神方)등 전염병에 관한 것이 있는가 하면 몇몇 의서의 증보판을 냈으며 ‘구급방’(救急方) ‘두창집’(痘瘡集) ‘태산요록’(胎産要錄) 등은 한글로 옮겨 언해본(諺解本)을 내기도 했다. 의학의 대중화에 크게 이바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잠깐 형식적인 귀양살이는 했지만 허준의 일생은 평탄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다. 생전에 공신칭호를 얻었고 죽은 뒤에는 양평군(陽平君)으로 봉해졌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서북쪽 10리 임진강이 굽어 보이는 자리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