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최대의 경제력과 인적자원을 갖춘 일본은 그 뒤를 좇는 아시아 국가들에게 과학기술 발전의 한 모델이 되고 있다. 그러나 안팎의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은 '일본이 전세계의 테크노헤게모니를 쥐기 힘들다'는 것이다.
과학기술 개발에 있어서 일본은 끝없는 모방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일본의 산업이 비약적인 발전을 지속하고, 특히 첨단산업에서 서구의 기술 헤게모니를 위협하는 모습을 모면서 우리는 21세기 일본의 과학기술에 대한 새로운 전망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2차대전 후 노동집약적 산업에서 출발한 일본은 자본집약적 산업을 거치고, 이제 지식집약적 산업을 꽃피우면서 국제 사회에서 제2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지식집약적 산업은 과학기술의 뒷받침 없이 성공을 보장받기 어려우며, 기존 일본산업은 이러한 경쟁력을 과학기술의 수입을 통해 확립됐다고 평가돼 왔다.
비근한 예로 최근의 기술 무역수지 개선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기술무역은 적자를 내고 있다. 70년대 초 기술수입이 수출의 약 8배를 초과했으며, 이러한 추세는 80년대 후반에도 지속돼 기술수입의 비중은 아직도 수출의 3배에 달하고 있다.
그렇다면 끝없는 엔화의 강세 행진 속에서 일본 과학기술 개발 능력의 전망은 어떠한가? 국제 경제 질서에서 동남아 국가들의 부상이 주목되는 이즈음, 일본의 과학기술은 과연 이들 동아시아 국가들을 선도하면서 전세계의 테크노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을 것인가?
일본의 과학기술은 그 자체의 발전 궤적을 밟아 진보돼 왔다기 보다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발전해온 것으로 평가된다.
일본인들은 과학기술 활용의 필요성을 일찍부터 체득했다고 볼 수 있다. 소위 '번'(番)을 중심으로 한 봉건 영주체제의 발전은 중앙무대에서의 주도권 장악으로 그 영향력의 비중을 가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천황을 옹위하는 쇼군(將軍)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봉건영주간의 투쟁 과정을 거쳐야 했고, 이 과정에서 보다 나은 무력을 갖고 있는 번의 중앙무대 진출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모방에 의한 학습' 통해 외국기술 소화
이러한 무력의 강화는 사쓰마번의 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서구문명을 보다 빨리 흡수한 곳이 번간의 전쟁에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서게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결국 서구 기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은 번간의 생존경쟁 과정에서 발현됐고, 이후 명치유신이라는 국가개혁의 과정에서 심화된 것이다. 여기에 레이더와 나일론 기술 및 원자력 기술의 우위가 직접적인 계기가 돼 태평양 전쟁이 미국의 승리로 끝나자 기술개발의 필요성은 일본 사회에 더욱 깊게 각인됐다.
전후 일본의 경제력 축적도 서구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해 이를 상품화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소니의 트랜지스터 라디오처럼, 일본의 경제력은 자체 기술의 개발보다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기초기술과 군사기술을 상용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모방에 의한 학습'을 통해 기술의 국내화가 정착되면서 일본의 기술 경쟁력은 제품 혁신(product innovation)보다는 공정혁신(process innovation)에 근간을 두고 있다.
하지만 섬유로 시작해 가전제품 자동차 철강 등에서 산업 경쟁력 우위를 보여온 일본이 반도체와 같은 첨단 기술에서 우위를 나타내면서 기존의 서구 기술 모방에 대한 한계가 노정됐다. "과연 일본은 기술 개발에 있어 추종자의 위치에서 선도자의 위치로 자리바꿈을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경쟁국 뿐만 아니라 일본 국내에서도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최근 10년 사이 1명의 자연 과학분야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을 포함해 총 5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이는 미국 1백62명 영국 65명 독일 60명에 비해 현저하게 낮은 비율이다. 또한 일본은 반도체를 비롯한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 광통신 로보틱스 등 전자 및 정밀기계 분야에서는 기술 우위를 나타내고 있지만, 항공우주 생명공학 원자력 공학 등 기초과학 및 거대기술 분야에서는 아직도 서구의 기술 우위에 도전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 압도하는 과학기술 투자
그러면 일본은 끝없는 과학기술 추종의 행진에 묵묵히 참가하는 것으로 만족하는가. 일본의 정부 및 산업계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적극성은 이러한 물음에 부정적인 답변을 유도하게 한다.
일본은 연구개발비 투자 연구인력의 충원 특허출원 및 등록의 적극성 등에서 OECD 국가중 가장 활발한 과학기술 개발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일본의 총연구개발비는 70년 1조1천9백53억엔이었던 것이 91년에 12조7천2백1억엔으로 증가해 약 12배에 가까운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이에 비해 미국의 연구비 증가율은 70년 총 연구비 약2백61억달러에서 91년 약1천5백억달러로 6배의 신장률에 그치고 있다. 게다가 미국 달러에 대한 일본 엔의 환율 인상을 감안하면 달러화 기준으로 일본의 연구비 증가는 약 40배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일본 기업들의 적극적인 기술개발활동은 90년대에 들어와 더욱 두드러져, 과학기술 개발 총연구비의 약83.1%가 민간기업으로부터 충당되고 있다. 이에 따라 70년대 초의 전체 연구비에 대한 국가부담롤이 25.2%에 달하던 것이 90년대 초에는 16.8%에 불과한 것으로 감소했다.
연구비의 증가뿐 아니라 연구원 수의 증가도 일본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적극성을 보여준다. 일본 연구원 수는 70년 약 17만명에서 92년 약 52만명으로 3배 이상 증가한데 비해 미국의 70년 약 54만명에서 90년대 초 약 95만명으로 2배의 증가에도 못 미치고 있다.
이처럼 적극적인 일본의 과학기술 개발노력은 일본의 기술무역 현황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비록 기술 수입이 아직도 기술수출을 크게 상회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지만, 70년대 이후 기술무역의 꾸준한 수지개선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의 기술무역 수지는 점차 악화되고 있어 미국의 테크노헤게모니의 퇴조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미국의 기술 무역수지는 지난 20년간 반 이상 감소했다. 70년대의 수출 대 수입 비율이 10.41이던 것이 92년에는 4.06으로 하락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신규 기술에 대한 기술무역수지만을 보면 일본의 경우 72년을 지나면서 기술수출이 수입을 상회한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즉 기존 기술에 대한 지속적인 로열티의 지불을 제외하고 새로운 기술의 경우만을 계산하면 일본의 수지개선은 더욱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신규 기술만을 대상으로 할 때 72년을 기점으로 일본은 이미 기술수출이 기술 수입을 상회하는 국가로 발돋움했다는 것이다. 83년에는 신규기술에 대한 수입 4백24억엔에 비해 수출이 약 8백억엔에 달해 거의 두배에 가까운 기술 무역 수지율을 보여주고 있다.
특허출원 건수도 89년 일본은 35만7천건에 달해 미국의 16만2천건에 비해 두배 이상 높은 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70년 일본이 미국에 출원한 특허건수의 비율은 5.1%에서 89년 20.5%로 증가했으며 미국에 등록된 특허건수도 같은 기간에 4.1%에서 21.1%로 급신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과학심의회가 조사한 91년 OECD 국가에 대한 첨단제품의 국제시장 점유율에서도 일본은 첨단 과학기술의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다. 첨단 제품 전분야에 걸친 일본의 시장점유율은 85년 23.6%에서 90년 29.2%로 신장했다. 반면 미국은 같은 기간에 36.5%에서 35.9%로, 또 독일은 12.0%에서 9.4%로 하락했다. 특히 전자계산기를 포함한 사무관련 기기와 전자제품의 경우 일본은 세계시장점유율에서 미국을 능가하고 있다.
당분간은 세계제패 힘들다.
그러면 일본의 과학기술은 지속적인 성장을 보여 21세기 테크노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가. 이에는 몇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는 것이 일본 국내외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먼저 기존 과학기술의 개발이 지나치게 산업제품 지향적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학기술의 수단적 가치만을 강조하게 될 때 과학기술의 진보는 한계를 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일본의 경우 과학기술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나 과학기술 개발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연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현상은 일본 민간 기업의 제품 관련 응용 및 개발 연구는 활성화 되는 반면, 기초과학에 대한 인식은 점차 퇴조하는 양상과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둘째 과학기술 인력 양성 및 충원에 적극적인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점도 지적된다. 산업화 과정에서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널리 인식돼 대학진학이나 직업선택에서 이공계에 대한 선호가 높았으나 경제력이 축적되면서 이에 대한 인식이 점차 희박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국공립 시험연구기관의 연구원 평균연령이 45세를 넘고 있으며, 젊은 연구원들의 연구소 기피현상도 심각하다. 최근 국제 기술협력의 일환으로 일본 국공립연구기관에 진출한 외국인 연구원들이 늘어나면서 엄청난 연구설비가 모두 외국인 연구원용이 돼버린 현상 때문에 일본은 매우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다.
셋째 일본의 암기 위주 교육이 초래하는 과학 기술 개발에 대한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기존의 일본 교육은 주어진 틀 안에서 집단적 문제 해결을 하기에는 매우 효율적이었으나 독창적인 기술개발을 위해서는 효과적인 교육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개인의 창조적인 능력이 강조될 수 있는 교육 풍토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입시제도의 개선 및 대학을 포함한 다양한 교육기관의 제도개편이 뒤따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넷째 이른바 '선진국병'이라 할 수 있는 '산업의 재테크화'도 과학기술 개발에 심각한 문제로 지적될 수 있다. 일본의 거품 경제기 동안 나타났던 민간기업들의 재테크에 대한 관심의 증가는 일본의 과학기술 개발의 한계로 나타난다. 따라서 산업의 고도화를 위한 지속적인 과학기술 개발 체제의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결국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 없이는 일본의 테크노헤게모니 장악의 가능성은 매우 낮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일본이 최근 추구하고 있는 과학기술 개발의 국제화 전략이나 기초과학 및 거대기술 개발을 위한 일련의 정책적 노력이 효과를 거두게 될 때 일본의 과학기술 수준은 지속적으로 증가될 가능성이 높다.
특히 최근 항공우주 및 해양연구를 포함한 기초과학기술 개발을 위한 대형 프로젝트의 추진과 국제 공통연구개발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은 일본의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초래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일본이 가까운 장래에 서구와 같은 테크노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