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마와 바나나껍질로 필름을 만들다](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9/7462767715424f48fd2162.jpg)
늦여름 대전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뉴턴의 사과나무’ 옆에 노란 컨테이너 9개가 나타났다. 한 컨테이너 안에 들어서자 소수점 9자리까지 표시된 디지털시계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사진작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0.01초까지만 인식했던 자신과 달리 그보다 1000만배 더 정밀한 1억 분의 1초까지 정확히 측정하려는 과학자의 모습이 신기했다. 무엇보다 실험실에서 보았던 그의 미소가 잊히지 않았다. 그 공간을 담기로 했다. 언뜻 보기에는 뭔가 복잡한 실험 장치만이 놓인 공간. 사진작가는 그 곳에서 ‘과학자의 즐거움’을 발견했다.
다른 컨테이너에는 다시마와 바나나껍질이 놓여 있었다. 작가는 기술이 사라져버린 세상을 상상했다. ‘그때는 어떻게 영화를 보게 될까?’ 과학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다시마와 바나나껍질로 필름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상상은 예술가의 몫이었지만 그걸 현실로 만들어낸 것은 과학자였다. 다시마와 바나나껍질로 만든 필름이 컨테이너 한 편 스크린에 투영되고 있었다.
많이 만나고 친해지자!
“과학자의 공간에서 예술가가 시간을 보내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에서 시작했죠.” 연구원 안에 전시장을 만들게 된 이유에 대한 이다영 대전문화재단 아티언스 프로젝트 매니저의 답변이다.
올해 프로그램을 준비하면서 제일 염두에 둔 것은 ‘친해지자’였다. 아무리 좋은 주제로 훌륭한 전문가들이 만나도 서로 서먹하면 한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직접 만나는 기회를 늘리기 위해 과학자의 공간, 연구소에 직접 들어가기로 했다.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이 여기에 호응했다. 예술과의 만남이 과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라 봤다. 연구원은 작가들이 머물면서 작업할 수 있도록 기숙사와 사무실을 제공했다. 연구실을 돌아다니며 관심분야를 정할 수 있는 랩투어도 실시했다. 과학자의 장소로 예술가가 입장하는 순간이었다.
![김원희 작가가 제작한 1억분의 1초까지 표시되는 기계](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9/16414778505424f5de34d64.jpg)
과학자와 예술가의 차이
살아온 환경이 다른 만큼 생각하는 방식도 달랐다. 설치 미술가 ‘로와정’과 협업한 김민영 생체신호센터 책임연구원 관점의 차이를 얘기했다. “저희는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뇌파에 관심이 있는데, 작가님은 사람마다 나타나는 차이에 관심이 많으시더라고요.” 작가는 아무 의미없는 사진을 골라 과학자에게 보여주고, 그때의 뇌파를 찍어달라고 했다. 과학자에게는 노이즈로 보이는 신호만 찍혔지만 작가에게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품이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456개의 채널’이다.
과학자가 직접 찍은 단편영화
영화와 시나리오 작업을 해온 심소연 작가는 과학자에게 무엇이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찍게 했다. 참여열기가 예상 외로 뜨거웠다. “재밌다 느껴지면 몰입도가 대단하셨어요. 연구하시는 것처럼 여러 개의 버전으로 찍어온 분도 있었어요.”
등산이 취미인 박세일 양자측정센터 책임연구원은 계룡산을 주제로 만든 영상 ‘내 마음의 산’이 만족스럽지 않자 수차례 다시 오르며 재촬영을 이어갔다. 과학자만의 집요함이 엿보이는 장면이다.
박창용 시간센터 책임연구원의 작품 ‘인간측정기’도 인상적이었다. 손가락 사이를 이용해 재는 각도에서 팔의 진동을 이용해 측정하는 시간까지. 과학자만의 상상력이 돋보였다. 가장 압권은 입으로 직접 물의 양을 맞추는 장면이었다.
점점 서로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예술과 과학 모두 아무도 가보지 않은 영역을 탐색하는 외로운 여정이라는 점에서 동료이자 친구였다.
![미나미 순스케 작가가 사용한 다시마와 바나나껍질.](https://images.dongascience.com/uploads/old/article/2014/09/17406397345424f5c9612f4.jpg)
이제 시작일 뿐
시간적, 지리적 제약으로 실제 같이 작업할 수 있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는 점을 모두 아쉬워했다. 또한 ‘하는 사람만 계속하는’ ‘바쁜 사람만 바쁜’ 구조에 대한 지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변화도 엿보였다. 홍석환 한국표준과학연구원 홍보실장은 처음에는 관심없던 연구원 사람들도 전시장을 오가며 흥미를 보였다고 귀뜸했다. “신선한 질문에 매력을 느끼시면서 점차 관심도가 높아지더군요.”
“10~20년은 해봐야 경험이 축적되고 무언가가 시작 될 것”이라는 박창용 책임연구원의 말을 새겨 봄직하다. 처음부터 엄청난 것을 기대하면 금물이다. 아직은 서로 더 많이 친해질 시간과 기회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