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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당A 사장 1명에 수습요리사 10명이 일한다. 메인요리사인 사장은 ‘고참’ 수습요리사와 함께 요리를 한다. 갓 들어온 수습요리사들은 재료준비, 요리도구세팅, 설거지, 청소 등 잡무를 나눠 하며 요리를 배운다. 사장을 빼곤 다들 요리경험이 적어 시행착오가 많다.











식당B 사장 1명에 베테랑요리사 3명, 수습요리사 2명, 보조요리사 2명이 일한다. 베테랑요리사들은 사장과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눈빛만 주고받아도 원하는 요리가 나온다. 잡무는 보조요리사가 도맡아 갓 들어온 수습요리사도 요리를 배우는 데 전념할 수 있다.










당신이 손님이라면 둘 중 어느 식당에 가겠는가. 어느 식당 음식이 맛있을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식당A는 국내 대학원 이공계연구실 대부분의 모습이다. 교수의 지도 아래 연구경력이 짧은 석·박사과정 대학원생들이 연구를 나눠서 한다. 실험장비 관리나, 행정처리 등 자잘한 잡무도 대학원생이 떠안는다.

식당B는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의 일부 연구실 모습이다. 연구경험만 최소 5년이 넘는 베테랑(박사후
연구원 등)들이 연구를 주도한다. 대학원생은 베테랑연구자와 함께 일하며 연구 노하우를 배운다. 장비관리나 행정처리는 숙련된 지원인력이 도맡는다. 완벽히 분업화가 돼 있는 셈이다. 식당B는 전체 직원 숫자가 식당A보다 적지만 맛집으로 유명하다. 요리사들도 안정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는 구조다.

비유가 과장 같겠지만 과학계의 현실과 비슷하다. 서울대 자연대는 2001년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인 팀 헌트 교수 등 해외석학 11명을 작년에 한국으로 불러, 자연대 학과들을 평가해달라고 부탁했다. 해외석학들은 공통적으로 연구실에 박사후연구원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미국 대학의 연구실은 전체 연구원 중 30~40% 이상이 박사후연구원인데 반해, 서울대 자연대에선 10%에도 못 미쳤다. 석학평가를 보조한 이현숙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박사후연구원은 석·박사과정보다 훨씬 독립적이고 창의적인 작업이 가능하다”면서 “선진국의 연구실에선 이들이 핵심인력”이라고 했다.

잠깐 용어를 정리하고 넘어가면, 박사후연구원은 박사학위를 받은 직후부터 수년간 연수를 겸해서 연구개발 업무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신진연구자’라고 보면 된다. (경계가 모호하긴 하지만) 경력을 쌓은 박사후연구원은 방문연구원, 객원연구원, 연구교수 등 다양한 지위를 가진다. 이들을 통틀어 ‘박사급연구자’라고 부른다. 보통 박사급연구자는 한정된 연구책임자(PI) 자리를 놓고 경쟁한다. 우리나라에선 연구책임자와 그렇지 않은 연구자 사이에 간극이 너무 크다. 일반 기업의 정규직-비정규직에 비할 정도로 임금과 대우가 양극화 돼 있다.

선진국에선 박사급연구자가 연구책임자가 되지 않아도 비교적 안정된 직장을 잡는 길이 있다. 대표적인 자리가 ‘스태프 과학자’다. 연구소나 대학에 준 정규직으로 고용돼 실험을 돕고 연구원들에게 기술적인 도움을 준다. 베테랑요리사 겸 보조요리사다. 구본경 영국 케임브리지대 줄기세포연구소 그룹리더는 “이런 시스템이 선진국의 연구효율을 높이는 비결”이라고 말했다. “저희 실험실엔 박사과정 또는 박사후연구원이 6~7명밖에 없어서, 한국연구자들은 ‘연구원 수가 너무 적지 않냐?’는 질문을 자주 합니다. 하지만 연구소에서 지원해주는 스태프 과학자와 행정원들이 4~5명분의 일을 해주기 때문에 연구원 수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같은 업무만 5~10년씩 한 사람들이라 아주 효율적으로 일합니다.”

구 그룹리더는 “한국과 영국의 연구실을 비교하면 가내수공업과 공장식분업화의 차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엔 연구실마다 대학원생 10~15명이 있습니다. 이 중 5~7명은 주력이기에 교수와 함께 논문을 낼 수 있습니다. 나머지는 비주력이지만 다른 잡일을 도우면서 같이 연구를 해 결국 모두 학위를 받습니다. 학위를 받으니 좋아 보이지만, 이분들이 갈 곳이 없습니다. 반면 영국에선 소수의 인재만이 박사과정에 들어갈 수 있고, 들어간 뒤에는 모두 주력이 됩니다.”

국내에 박사급연구자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과거에는 식당A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박사급연구자가 많아진 뒤에는 자연스럽게 식당B와 같은 구조로 바뀌어야 연구생태계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정부나 과학계가 나서서 공급(신규 박사학위자)을 줄이고 수요(스태프 과학자 등 박사급 연구개발 일자리)를 늘렸어야 했는데,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그래서 1파트와 같은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30대 중반의 가정까지 있는 박사급연구자 상당수가 학사학위만 받아도 충분한 일자리라도 얻으려 헤매고 있다(박스 참조).



우리나라 과학계도 선진국처럼 박사급연구자 중심의 ‘마름모꼴’ 인력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목소리는 오래 전부터 있었다. 이를 반영해 2011년 출범한 기초과학연구원(IBS)은 국내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에 가까운 인력구조를 갖춘 곳이다. 현재 26개 연구단 중 본원 및 캠퍼스연구단에 속한 19개 연구단의 인력분포를 분석해 보면, 박사후연구원이 전체 연구원의 34% 수준이다. 연구지원인력도 10%가 넘는다.

심시보 IBS 대외협력실장은 “IBS는 설립 초창기부터 각 연구단에 박사후연구원 비율을 높이도록 장려
해 왔다”고 말했다. 명경재 IBS 유전체항상성연구단장(UNIST 생명과학부 교수)은 “우리 연구단의 경우 절반이 박사후연구원”이라며 “박사후연구원들이 자율적으로 팀을 구성하고 연구를 진행할 수 있게 했더니 비율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IBS에 이런 인력구조가 가능한 건, 충분한 연구비가 10년 가까이 지원되는 대형 연구단이기 때문이다.

연구비가 충분치 않은 일반 대학의 연구실에서 IBS처럼 박사급연구진을 갖추기는 쉽지 않다. 박사급연구자의 인건비는 대학원생보다 훨씬 높다. 스태프 과학자나 기술지원인력(테크니션), 행정인력을 준 정규직으로 쓰려면 임금을 꾸준히 지급할 수 있어야 한다. 연구비가 들쭉날쭉한 개별 연구실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여기엔 공유경제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구본경 그룹리더는 “교수들이 힘을 합쳐 학과에 스태프 과학자와 행정직원을 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가 속한 대학 부설 연구소에선 25개 연구실이 공동으로 30~40명에 이르는 스태프 과학자와 행정직원을 고용해 도움을 받고 있다. 각 연구실이 각개약진하지 않고 협업하는 분위기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인건비는 각 연구실이 계획을 세워 십시일반으로 마련한다. 서인생 미국 노트르담대 연구계산센터 박사는 “우리 센터에선 중장기적으로 스태프 과학자와 테크니션의 인건비를 위해 펀드를 조성하고 있다”고 말했다. 연구비는 비정기적으로 들어오지만 적금을 붓듯 돈을 모아 고정적인 인건비를 처리하는 셈이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연구성과를 높이고 젊은 연구자들의 처우를 개선하는 길이다.



박사급연구자 고용을 늘리는 추가적인 방법이 있다. 조성민 독일 막스플랑크 고분자연구소 박사후연구원은 “대학서열 완화”를 꼽았다. “한국은 극단적인 대학서열화 때문에 연구비가 최상위 5개 대학에 과도하게 몰려있습니다. 여기서 만들 수 있는 박사급연구자 일자리는 한계가 있습니다. 독일은 대학평준화로 평균 이상의 연구 환경을 제공하는 대학이 많고, 인재도 고루 분포돼 있습니다. 당연히 박사급연구자 일자리도 많죠.”

조 연구원은 또 “연구비 중 인건비 비중을 높여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에서 연구비를 지원할 때, 일정 부분은 반드시 인건비에 투자하게끔 만들어야 합니다. 한 사람 당 인건비 하한선도 잘 지켜져야 하고요. 한국은 아직도 가능한 싼 임금으로 많은 노동력을 투입해 결과를 뽑는 방식에 익숙합니다. 대학원생에게 밤새 고민해 문제를 풀어오라고 시키죠. 막스플랑크연구회는 다릅니다. 경험 많은 박사후연구원이나 선임연구자를 고용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연구비 중 인건비 비중이 굉장히 높습니다. 부양가족이 있는 경우 그에 맞춰 인건비가 높아지는 점도 한국과 다릅니다.”
 

2016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송준섭 기자
  • 일러스트

    권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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