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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1. "나는 1년 계약직 과학자 입니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S박사는 수 년 전 서울 명문대 병원의 한 교수 연구실에 전일제로 취직했다. 교수는 월급을 200만 원씩 주겠다고 약속했다. 계약서를 쓰진 않았지만, S박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고 봤다. 빨리 좋은 논문을 써서 더 좋은 연구실로 자리를 옮기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았다. 교수가 “연구비가 줄었다”는 말을 할 때마다 S박사는 심장이 내려앉았다. 월급은 교수 사정에 따라 고무줄처럼 날뛰었고, 생계걱정 때문에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부양할 가족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모아 놓은 돈도 바닥이 났고, 새벽에 과외를 뛰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논문을 빨리 완성해야겠다는 마음은 강해졌다. 논문이 있어야 다른 직장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수가 허락하지 않았다. 좀 더 완성도를 높여보자며 몇 번이고 논문수정을 지시했다. 교수가 논문을 ‘포로’로 잡고 자신을 싼값에 부려먹고 있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3년을 꼬박 채우고 나서야 교수는 S박사를 놔줬다. 퇴직금은 없었다.
 
 

물리학을 전공한 K박사는 서울 명문대의 연구교수다. ‘교수님’이라는 호칭도 듣지만, 사실 2년마다 계약을 새로 하는 비정규직이다. 취직에 성공하면 바로 다음 자리 걱정을 시작해야 한다. 연구를 고민하는 시간보다 가족의 미래를 걱정하는 시간이 더 길다. 이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지금 그만두는 게 나을지 매일같이 고민이다.

K박사에겐 아픈 기억이 있다. 수 년 전, 젊은 혈기로 독창적인 연구를 시도했다가 망한 경험이다. 언젠가 세계적으로 주목받을 분야라는 생각이들어, 잠자는 시간을 세 시간으로 줄여가며 연구에 몰두했다. 국내에연구자가 없던 분야라 혼자 끙끙대다가 1년 동안 논문을 한 편밖에 못썼다. 다니던 대학에서 계약연장에 실패했다. 몇 달간 월급이 끊겼다. 다행히 주변 교수들이 연구비를 십시일반으로 모아줘 하루하루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한 걸까’라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가 알던 한 동료는 병에 걸려서 학계를 떠났다. 이 바닥에선 무슨 이유로든 논문을 2~3년 못 쓰면 ‘아웃’이다. 이렇게 한번 떠나면 다신 돌아올 수 없다. 국내 물리학계에서 또 하나의 세부 연구주제가 사라졌다.

“제가 우주가속팽창을 발견한 건, 학교(호주국립대)와의 ‘계약’이 종료되기 불과 5주 전이었습니다. 하마터면 연구를 끝맺지 못하고 학교를 떠날 뻔했죠.” 2011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브라이언 슈미트 교수(호주국립대 천체물리학과)는 작년 10월 호주 멜버른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만 31세였던 1998년, 계약직 박사후연구원 신분으로 우주의 팽창속도를 연구하다 천문학 역사에 길이 남을 발견을 했다. 그런데 이 발견, 아슬아슬했다. 만약 계약이 1~2년이라도 더 짧았다면 그가 연구 성과를 낼 수 있었을까.
 

슈미트 교수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건, 젊은 과학자들이 단기계약 때문에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호주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도 기초과학분야의 20~30대 과학자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그것도 1~3년 단위로 계약을 새로 맺어야 하는 저임금 단기계약직이 상당수다.

원래 과학계에서 비정규직은 나름의 합리성을 가진 제도였다. 젊은 연구자들이 한 직장에 얽매이기보다 연구주제와 연구비에 따라 자유롭게 이동하며 다른 학자들과 협업할 수 있도록 했다. 지금도 이런 장점을 잘 살려 국내외에서 활발히 연구하는 젊은 과학자들이 있다. 이 가운데 일부는 고임금에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를 갖고 있다. 하지만 소수에 불과하다.

시대가 변했다. 박사 졸업자 수는 크게 늘었는데 그에 걸맞은 일자리는 별로 늘지 않으면서 모든 게 달라졌다(40쪽 박스 참조). 일단 비정규직으로 머무는 기간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대표적 비정규직인 박사후과정(포닥)을 예전엔 2~3년이면 마쳤지만, 지금은 5~10년씩 하는 사람도 많다. 이강수생물학연구정보센터(BRIC) 실장은 “생명과학자들 사이에 ‘만년 포닥’이라는 말이 유행한다”고 했다. 임시직을 평생 전전하는 과학자가 늘고 있다는 뜻이다.

단기계약의 저질 일자리도 덩달아 늘었다. 박사졸업자들의 낮아진 눈높이를 악용한 것이다. 심지어 계약서와 4대 보험 없이 일하는 연구원들도 있다. 생명과학을 전공한 H박사는 국립병원 연구소에서 1년 단위 계약직으로 일했다. “1년 계약직이라도 보통 2~3년까지는 계약연장이 되지만, 늘 계약종료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삽니다. 계약종료 몇 주 전에 ‘연장이 어렵다는 통보를 받는 연구원도 있었으니까요. 생사여탈권(계약연장 여부)이 전적으로 교수에게 달려있으니, 갑을 관계가 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도 심각하다. 비정규직 연구원은 경력이 쌓여도 월급이 거의 오르지 않는다. 이론물리학 분야의 비정규직 연구자 K박사는 “마흔이 넘었고 아이도 커 가는데, 10년 넘게 기업체 대졸 초임에도 못 미치는 월급을 받고 있다”고 토로했다. 최연택 국가수리과학연구소 박사는 “과거 국가수리과학연구소에선 비슷한 일을 해도 비정규직은 정규직 임금과 차이가 있었다"고 말했다(2013년부턴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을 동일하게 지급하고 있다).
 

고용불안은 과학연구에 악영향을 미친다. H박사는 “늘 떠날 준비를 해야 하다 보니 단기성과를 내는 데 치우치기 쉽다”고 말했다. “계약이 끝나기 전에 현재하던 연구를 빨리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계약이 끝나면 연구하던 자료를 실험실에 놓고 가야 하거든요. 시간에 쫓기다보니 연구자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기 힘든 데이터를 논문으로 내기도 합니다. 조금 더 연구해서 완벽하게 발표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습니까.”

겉으로 보기엔 화려해 보이는 분야도 속을 들여다보면 마찬가지다. 얼마 전 중력파 발견에 기여해 주목받은 한국중력파연구협력단의 강궁원 박사는 “국내 중력파 연구자 중에 (대학 등에 머무는) 단기계약직도 꽤 포함돼 있다”며 “자리가 안정되지 않은 상황에선 그 사람의 능력을 최대한 끌어내기 힘들다”고 했다. 경력이 쌓여도 자신만의 연구 분야를 갖기 힘들어 연구주제 확장에 제한을 받기 때문이다.



단기계약이 과학지식축적에 불리하다는 지적도 있다. 신명호 항공우주연구원(항우연) 책임연구원은 “지식은 결국 사람을 통해 축적된다”며 “단기계약직이 많고 이동이 잦으면 지적역량과 전문분야의 경험을 쌓기 힘들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신 책임연구원이 속한 공공연구노조 항우연지부는 2010년 비정규직 사용을 20% 이하로 제한하는 단체협약을 체결했다.

더 큰 문제는 한창 창의성을 발휘할 젊은 과학자들이 독창적인 연구를 할 수 없다는 점이다. K박사(물리학분야 연구교수)는 유행을 따라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꼬집었다. “학계 유행에서 벗어나 독창적인 연구를 하면 당연히 논문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당장 2~3년만 논문이 없어도 연구비와 월급이 끊길 위험이 있습니다. 결국 생계를 위해 논문이 당장 나올 수 있는 주제를 선택해야 합니다. 현실과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에 과학자로서의 자존심까지 상합니다.”

세계적으로 과학을 선도하기도 힘들다. 양현석 서강대 양자시공간연구센터 연구교수는 “한 분야를 꾸준히 연구하는 사람이 사라졌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이론물리학계는 미국의 명문대에서 만든 유행을 쫓아가기 바쁩니다. 그런데 유행이란 게 사실 돌고 돕니다. 과학자들이 다양한 분야에서 독립적인 연구를 하도록 지원하는 일본을 보세요. 어떤 세부 분야라도 최소 1~2명의 전문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유행이 돌아왔을 때 세계적으로 연구를 선도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이슈가 생기면 백지에서 시작합니다.”
 

과학계에 정규직 일자리가 워낙 적다보니 경쟁이 치열하다. 국내 연구중심대학에서 교수채용을 담당하는 Y교수는 “1년에 교수를 2명 정도 뽑는데, 지원자가 400~500명”이라고 했다. 이러다 보니 국내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고 해외를 떠도는 과학자도 많다. Y교수는 “미국 스탠퍼드대 생명과학대에서 연구하는 한국인 박사후과정만 60명에 이른다”며 “최상위 저널에 논문을 내는 과학자들이지만, 이들 중 한국으로 돌아오는 건 겨우 10%”라고 말했다. 남궁석 충북대 축산학과 연구교수는 “상당한 연구역량을 갖춘 고급인력들이 떠돌이 생활을 하게 두는 건 국가적으로 엄청난 낭비”라고 지적했다.

문제를 해결해야 할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정규직보다 비정규직 일자리를 크게 늘리고 있다. 작년 9월 국정감사 때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출연연 전체 연구직 인력 1만8059명의 48.6%인 8776명이 비정규직이다(학·연 학생과 박사후연수생 포함). 신규 고용자만 따지면 비정규직 비율이 더 높다. 2012년부터 2015년 6월까지 출연연에서 뽑은 연구직 인력 5903명 중 무려 71.1%인 4197명이 비정규직이다.

2012년 공공연구노조에서 출연연 연구책임자 4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응답자 중 “정규직과 같은 업무를 수행하는 비정규직이 있다”고 대답한 사람이 절반을 넘는다. 딱히 업무가 달라서 비정규직을 뽑은 게 아니라는 말이다. 연구책임자들은 비정규직의 ‘고용안정성’을 빨리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비정규직 연구원의 평균 근속년수는 2.6년으로, 정규직(12.1년)의 5분의 1밖에 안 된다. 연구책임자의 82.5%가 ‘비정규직의 잦은 이직으로 연구효율이 저하된다’고 대답할 정도로 연구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 때문에 출연연에서 비정규직을 줄이고 대신 정규직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런데 이 방법만으론 젊은 과학자들의 고용불안을 해결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 대학을 포함한 전체 과학계 차원에서 좀 더 구조적인 해법이 필요하다. 다음 파트에서 살펴본다.
 

2016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변지민 기자
  • 일러스트

    권오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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