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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제프리 프리드먼 교수의 렙틴 유전자 발견


최근에는 여름철에 해변 뿐 아니라 도심에서도 핫팬츠(아주 짧은 반바지)나 민소매 옷차림의 여성들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런 패션이 일상화되면서 이제 여성들이 노출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유행을 따라갈 자신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효과가 있다는 ‘다이어트 비법’은 초미의 관심사인 듯하다. 무리한 다이어트는 건강에 해롭다는 기사는 여전히 여름철 단골메뉴다.

1994년 미국 록펠러대의 제프리 프리드먼 교수팀이 과학저널 ‘네이처’에 비만 유전자의 실체를 밝혔다는 논문을 발표했을 때만해도 인류는 비만의 문제에서 해방되는 듯 보였다. 이 논문은 ‘비만은 의지의 문제’라는 심리학적 접근이 주류였던 그 이전까지의 시각을 완전히 바꾸며 ‘비만의 생리학’ 시대를 열었다. 그럼에도 논문이 발표된 지 16년이 지난 지금, 비만은 오히려 더 심각한 사회문제가 돼 있다. 비만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꿨지만 비만은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유전자 하나만 고장나도 초고도비만

비만에 유전적 경향이 있다는 관찰은 이전부터 있었지만 ‘비만 유전자’가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된계기는 195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연구자들은 엄청나게 뚱뚱한 돌연변이 쥐를 얻었는데 교배실험을 한 결과 이 형질이 열성으로 유전됨을 확인했기 때문이다.즉 어떤 유전자에 문제가 생길 경우 부모로부터 다 돌연변이 유전자를 받은 새끼는 식욕을 주체하지 못해 토끼로 착각할 만큼 살이 찌는 것이다. 이 가상의 유전자는 ‘obese(뚱뚱한, 줄여서 ob)’로 이름이 붙여졌다. 그 뒤 분자생물학이 발달하면서 많은 연구자들이 ob 유전자 사냥에 뛰어들었다.

제프리 프리드먼 교수도 1980년대 중반부터 이 대열에 합류했다. 연구팀은 유전자를 찾는 여러 기법을 동원해 게놈에서 유전자의 위치를 좁혀가는 데 성공해 마침내 쥐의 6번 염색체에서 ob 유전자의 위치를 확인했다. DNA염기서열을 분석하자 ob 유전자는 아미노산 167개로 이뤄진 작은 단백질을 암호화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극단적인 비만인‘ob 쥐’의 경우 ob 유전자의 DNA 염기 하나에 변이가 일어나 105번째 아미노산(아르기닌)이 종결코돈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결과 중간에 잘린 반쪽짜리 단백질이 만들어져 기능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연구팀은 이 단백질이 식욕을 억제하는 호르몬으로 작용한다고 추정하고(고장난 경우 엄청난 식욕을 보이므로) ‘마르다’는 뜻의 그리스어 ‘렙토스(leptos)’에서 따온 ‘렙틴(leptin)’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 뒤 지방세포에서 렙틴 호르몬의 존재를 확인했다.이 연구 결과가 밝혀지자 학계는 물론 대중들도 엄청난 관심을 보였다. 체내 렙틴 호르몬의 양을 조절하면 비만을 해결할 수도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 때문이다.

인슐린이 당뇨병 환자들에게 구원이 된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인슐린도 단백질 호르몬이다. 인슐린 발견 이전에 당뇨병은 치료약이 없는 불치병이었다. 그 원인이 인슐린 부족 때문이라는 게 밝혀진 뒤 처음엔 돼지에서, 나중엔 인슐린 유전자를 집어넣은 미생물에서 인슐린을 추출해 투여함으로써 놀라운 증상개선 효과를 봤다. 오늘날도 수많은 당뇨병 환자들이 인슐린 주사 덕분에 정상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사실 렙틴 발견이 의심없이 즉각적인 호응을 얻은 건 호르몬이 식욕을 조절할 것이라는
정황증거가 이미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쥐 두 마리를 외과수술로 혈관이 연결되게만든 뒤(이를 병체결합이라고 부른다) 한 마리에게 무제한 먹이를 먹게 하면 나머지 한마리는 체중이 준다. 과식한 쥐의 몸에서 “이제 그만 먹어!”라고 하는 신호분자, 즉 호르몬이 분비돼 혈관을 순환해 결국 옆에 있는 쥐까지 식욕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또 ob 쥐와 정상 쥐를 병체결합하면 ob 쥐의 식탐이 줄고 체중도 준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정상 쥐의 식욕억제 호르몬이 영향을 미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ob 쥐는 ‘식욕억제 호르몬’ 유전자가 고장난 결과라는 강력한 증거이기도 하다.

또 과식한 쥐의 지방조직에서 얻은 추출물을 다른 쥐에게 주사할 경우 12시간 이상 식욕이 억제됨을 보여준 실험결과도 있었다. 따라서 ob 유전자가 지방조직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을 암호화하고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실제로 렙틴은 지방조직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고 지방조직이 커질수록 렙틴의 수치도 올라갔다. 비만으로 지방을 저장하는 지방 세포가 커질수록 “이제 그만 먹어!”라고 하는 신호를 강하게 보내는 셈이다.

비만 정복 환상은 깨지고

프리드먼 교수팀은 이듬해 사람의 7번 염색체에서 쥐의 ob 유전자에 해당하는 유전자를 찾는 데 성공했다. 사람의 렙틴 단백질의 아미노산 서열을 쥐의 렙틴과 비교한 결과 84%나 동일했다. 그리고 곧 사람의 지방세포도 렙틴을 분비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제 남은 일은 한 가지. 인슐린처럼 렙틴의 유전자를 미생물에 넣어 렙틴 단백질을 대량으로 얻으면 비만치료에 새 장이 열릴 것이다.

렙틴의 상업화 연구는 미국의 생명공학회사 암젠(Amgen)이 떠맡았다. 암젠은 프리드먼 교수에게 2000만 달러(약 240억 원)를 지불하고 독점사용권을 확보했다. 물론 상용화에 성공하면 프리드먼 교수는 별도의 로열티를 받는 조건이다. 렙틴 생산에 성공한 암젠은 바로 임상시험에 들어갔다. 여기서 뚜렷한 효과를 보이면 아마도 제약업계 사상 최고의 바이오신약이 나올 터였다.

그러나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뚜렷한 체중감소 효과를 본 사람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 렙틴의 효과는 미미했다. 렙틴은 단백질이기 때문에 인슐린과 마찬가지로 먹을 수는 없고(장에서 소화가 되므로) 주사제로 혈관에 직접 투여해야 한다. 그런데이런 미미한 효과를 얻자고 매일 렙틴 주사를 맞을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암젠의 입장에서는 달콤한 꿈이 악몽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물론 ob 쥐처럼 ob 유전자가 고장나 몸이 렙틴을 만들지 못해 초고도비만이 된 사람은 렙틴 주사로 뚜렷한 효과를 봤다. 그런데 문제는 비만인 사람 가운데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는 것. 비만 환자 대부분은 ob 유전자에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다. 게다가 이들의 혈중 렙틴 수치를 보면 정상치보다 높다. 이는 비만세포가 커질수록 렙틴을 많이 만들어낸다는 가설과 일치하는 결과다.

결국 비만인 사람 대다수는 렙틴이 부족해서 식욕이 높아진 결과라기보다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렙틴의 명령을 제대로 듣지 않게 생리적 밸런스가 무너진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렙틴을 주사한다고 해도 별 효과를 보지 못한다. 렙틴은 정상체중을 유지하는 데 필요조건이지만(렙틴이 없으면 초고도비만이 되므로) 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비만인 사람 다수가 오히려 렙틴 농도가 높으므로).

비만의 생리학은 여전히 미스터리

상업화 시도는 실패했지만 렙틴의 발견은 비만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려는 기초연구의 초석이 됐다. 먼저 렙틴 호르몬의 수용체 단백질이 뇌의 시상하부에 분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는 시상하부가 식욕조절과 관련이 있다는 이전 연구 결과와 부합하는 결과다. 예를 들어 시상하부가 손상된 쥐 가운데는 ob 쥐와 비슷하게 비만이 심한 경우가 있다. 렙틴 수용체가 있는 세포가 파괴된 결과 렙틴의 식욕억제 신호를 받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식욕중추’인 시상하부는 어떻게 식욕을 조절할까. 먼저 렙틴 호르몬은 시상하부에 있는 뉴런 가운데 식욕을 일으키는 신경펩티드Y를 방출하는 뉴런의 활동을 억제하고 대신 식욕을 없애는 호르몬인 알파-MSH를 분비하는 뉴런을 활성화한다. 렙틴과는 별도로 위에서 분비되는 식욕 호르몬인 그렐린 역시 시상하부에 작용해 식욕을 불러일으키는작용을 한다. 이 밖에도 많은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이 식욕을 결정하는데 관여하고 있다.

그런데 왜 비만인 사람들은 렙틴의 강력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식탐을 줄이지 못하는 걸까. 렙틴의 신호가 무시되는 현상, 즉 ‘렙틴 저항성’은 비대한 지방조직에서 많은 양의 렙틴이 지속적으로 분비되면서 결국 이 신호에 무감각해지게 몸의 비만 회로가 변형된 결과로 보인다. 한편 단당류인 과당(fructose)의 지나친 섭취가 렙틴 저항성을 유발한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 과당함량이 높은 옥수수 시럽이 듬뿍 들어있는 음식을 제공받은 쥐는 고지방 사료를 제공받은 쥐보다 더 먹고 체중도 더 많이 늘어났다.

1994년 비만 유전자의 발견과 렙틴의 규명 이후 비만의 생리학에 대한 연구 결과가 엄청나게 쌓여왔지만 비만을 치료하는 ‘묘약’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아마도 비만에 대한 최선의 해결책은 ‘덜 먹고 더 활동하라’는 상식이 아닐까. 물론 여전히 많은 과학자들은 ‘기적의 비만 치료제’를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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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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