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7000년 전, 미국 뉴욕시 한복판 을 아메리칸마스토돈 한 마리가 가 로지르고 있었다. 길을 잃은 게 틀림없었 다. 무언가를 찾아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 번거렸다. 코에서 하얀 콧김이 났다. 마스토돈의 눈에 비친 뉴욕의 풍경은 지금과 사뭇 달랐다. 단단하게 얼어 붙 은 땅이 거북 등처럼 갈라진 채 끝도 없 이 펼쳐져 있었다. 갈라진 틈에는 흰 눈 이나 얼음이 쌓여 있었다. 여름이 돼 얼 음과 토양이 살짝 녹으면 순간 푸른 빛이 도는 듯도 했지만, 잠시였다. 거의 대부분 의 시간 동안 땅은 깊숙한 곳까지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고, 생물이라고는 키 낮은 벼과 식물 몇 종과 지의류 정도만 힘에 부친 듯 겨우 버티고 있었다.
매서운 바람과 함께 눈보라가 불었다. 마스토돈은 눈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길고 뻣뻣한 털로 감싸인 몸을 움직였 다. 움직일 때마다 차양처럼 드리운 다리 털이 출렁였다. 지금 이 마스토돈은 고민 에 싸여 있다. 빙하시대의 혹독한 추위 는 전혀 겁나지 않지만 배고픔은 두려웠 다. 식물이 달랐다. 너무 빙하 쪽으로 올 라온 건 아닐까. 기진해 쓰러지기 전에 다 시 원래 살던 곳으로 걸어가야 했다. 마스토돈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북쪽 을 봤다. 북쪽의 풍경은 언제 봐도 이질 적이었다. 거대한 얼음이 지표면을 덮고 있었다. 비록 건조한 대기 때문에 하늘엔 먼지가 가득했고 시야는 뿌옜지만, 그래 도 오후의 태양이 지표를 덮은 하얀 얼 음에 반사돼 눈이 부셨다. 얼음은 언제나 매머드의 상상을 초월했다. 단단하게 다져진 거대한 얼음 덩어리가 지표를 가 득 덮은 채 땅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얼 음은 가장 끄트머리에서도 두께가 수십 ~수백m에 달할 정도로 두꺼웠으며, 끝 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었다.
마스토돈은 몰랐다. 이 얼음이 북쪽으 로는 그린란드 바로 직전까지, 서쪽으로 는 록키산맥 서부까지 한 몸으로 이어져 있다는 걸. 면적이 남한의 130배가 넘는 1300만km2에 달한다는 걸. 가장 발달 한 곳에서는 두께가 3.3km나 되고, 알래 스카와 캘리포니아 쪽에 있는 또다른 빙 상까지 더하면 사실상 북미대륙의 북쪽 대부분이 얼음에 뒤덮여 있다는 걸 말이 다. 호기심 많은 마스토돈은 흰 김이 나 는 콧바람을 한 번 뿜고는 천천히 남쪽을 향해 발걸음을 뗐다. 거기에는 먹기 좋은 식물이 나는 천국이 있을 것이다. 가문비나무와 풀이 가득한 숲이.
얼음이 뒤덮은 최후빙하전성기
2만5000년 전부터 1만5000년 전까지, 세계의 풍경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뉴욕은 가장 극적으로 다른 곳 중 하나였다. 지구에서 가장 커다란 빙상의 가장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최후빙하전성기라고 불리는 이 시기는 현재와 같은 따뜻한 시기(빙하가 녹는 간빙기)가 되기 직전의 마지막 빙하기였다. 상당히 혹독했던 이 시기에는 대륙마다 큰 빙하가 발달했는데, 북아메리카의 경우 거대한 얼음 덩어리 두 개가 대륙 거의 전체를 덮었다. 그 남동쪽 한계가 바로 뉴욕이었다.
북아메리카의 빙상은 당시 남극에 있던 빙상보다 컸다. 현재 빙하의 86%는 남극대륙에 몰려 있다. 2만1000년 전에도 남극은 빙하로 덮여 있었고 크기는 지금보다 10% 이상 더 컸다. 그럼에도 지구에 있는 빙상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겨우 32%에 불과했다. 훨씬 더 많은 얼음이 극지를 제외한 다른 곳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 중 하나가 북미대륙이었다. 북미의 빙하는 당시 남극보다 많아 지구 전체 얼음의 35%를 차지했다.
최후빙하전성기라 불리는 마지막 빙하기는 꽤 혹독했다.
빙하가 북미와 유럽대륙 북부를 뒤덮었다.
빙상만 지구의 풍경을 바꾼 것은 아니었다. 지상의 물이 얼음에 갇히며 바다의 면적은 줄어들었다. 해수면은 지금에 비해 120m나 낮아졌다. 영국과 유럽, 인도네시아와 베트남 등이 육지로 연결됐고, 한반도는 중국, 일본과 연결됐다. 러시아 동부와 알래스카 사이에도 긴 육교가 생겼다. 유라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은 한 덩어리가 됐다. ‘베링기아’라고 불린 이 육교를 통해 털매머드 등 많은 동물이 대륙을 넘나들었다. 인류도 북아메리카에 첫 발을 내딛었다. 마지막 빙하시대는 혹독했다. 지구 전체의 기온이 지금보다 6℃ 낮았다. 저위도는 2~5℃ 낮아지는 데 그쳤지만, 고위도는 12℃까지 온도가 떨어졌다. 비가 오지 않아 몹시 건조했고, 대기는 풀풀 날리는 먼지로 가득 찼다. 먼지가 떨어져 쌓인 곳에는 고운 황토(뢰스) 퇴적층이 발달했다.
한반도의 빙하시대
한반도는 어땠을까. 중위도에 위치한 한반도는 큰 규모의 기후 연구가 거의 안 돼 있다. 하지만 이 때의 기후를 짐작하게 하는 연구 결과가 지난해 ‘네이처’에 발표됐다. 조경남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사와 우경식 강원대 교수팀은 석순 등 동굴생성물에 남은 기록을 추적해 55만 년 전 이후의 중위도 기후 변화를 추적했다.
그 결과 빙하가 적고 남극이 따뜻하며 비가 많이 올 때 동굴생성물의 성장이 많았다. 보통 간빙기에는 비가 많이 오고 식생이 발달하기 때문에 토양의 산성화가 심하고 석회암이 잘 녹아 생성물 양이 많아진다. 즉 이 때는 간빙기였다는 뜻이다. 흥미롭게도 남반구인 호주와 비교해 보니 양상이 반대였다. 즉 남반구와 북반구의 기후가 마치 시소처럼 반대 경향을 보인다는 뜻이었다. 이 경향은 열대와 아열대지방에서만 밝혀져 있었는데 이번에 중위도에서 처음 밝혀졌다. 조 박사는 “(많은 비와 온난화를 불러오는) 열대수렴대(ITCZ)가 북상하거나 남하하면서 중위도 지역의 기후에 변화를 불러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조 박사는 “빙하기와 간빙기라는 거시적 기후변화를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식물을 통해 추정해 보면 기후는 아한대였을 가능성이 높다. 예를 들어 경기도 하남시의 꽃가루 화석을 분석한 이상헌 한국지질자원연구원 박사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최종빙기에 이 지역은 건조하고 추웠으며 침엽수림이 발달해 있었다.
춥고 덥고 ‘기후의 롤러코스터’
최후빙하전성기는 약 1만 년 동안 지속됐다가 서서히 물러났다. 전 세계의 평균 기온이 올라갔고, 뉴욕을 뒤덮었던 얼음도 서서히 후퇴했다. 여기저기에서 어마어마한 두께의 빙하가 수천 년 동안 천천히 밀고 들어오며 새긴 상처가 드러났다. 산이 깎여 만들어진 U자 모양의 거친 계곡, 노르웨이 등의 아름다운 피오르 지형이 이때 만들어졌다.
이제 따뜻한 간빙기가 됐다. 온도가 오르며 대륙의 빙하가 녹았다. 가장 컸던 북미대륙의 빙하도 녹았다. 이 물은 캐나다 서부에서 호수를 이뤘다가, 넘쳐서 대륙을 관통하는 강이 됐다. 허드슨 강과 미시시피 강이다. 이 물은 1만2800년 전 일순간에 대서양으로 흘러 들어 바닷물을 희석시켰다. 희석된 바닷물은 당시 지구를 따뜻하게 만들어 주던 해수의 흐름에 문제를 일으켰고, 지구는 일순간 다시 빙하기로 빠져들었다. ‘영거드라이아스기’라고 불리는 일종의 소빙하기는 약 1000년 지속됐다가 급격히 회복됐다.
문명을 이룩한 뒤의 인류는 바로 이 영거드라이아스기 이후의 삶에 익숙하다. 따라서 지금은 따뜻한 시기이고, 빙하기와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지금도 빙하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경식 강원대 지질학과 교수는 “현재는 현생이언(고생대 캄브리아기 이후의 지질시대) 중 가장 추운 시기”라고 말했다. 따뜻했던 신생대 초기인 에오세와 올리고세(약 5600만~2300만 년 전) 이후 기온은 계속 내리막이기 때문이다. 신생대 초기에는 남북극이 온대기후였다. 빙하는 없었고 해수면은 높았다.
하지만 달도 차면 기울 듯, 변화가 일어났다. 대륙이 지금의 형태를 갖춰가면서 해류에 변화가 생겼다. 다른 대륙이 떨어져 북쪽으로 가자 남극이 고립됐고, 남극 주위를 도는 순환해류가 생겼다. 남극이 바닷물의 흐름에서 고립됐다는 뜻이다. 해류는 남극대륙의 열을 저위도로 퍼날랐다. 대신 난류가 심층수의 형태로 다가와 수분을 공급하자 대륙에 눈이 쌓이기 시작했다. 마침 파나마 지역이 융기하며 아메리카 대륙은 남북을 잇는 거대한 띠 모양이 됐다. 태평양과 대서양은 이제 완전히 분리됐고, 해류의 움직임은 또 달라졌다. 이제 지구의 온도는 내리막길에 들었다.
그 정점이 약 250만 년 전부터 이어진 플라이스토세다. 이 시기를 우리는 흔히 빙하시대라고 부른다. 하지만 내내 빙하가 대륙을 덮었던 것도 아니고 마냥 춥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따뜻했던 간빙기가 짧게는 수천 년에서 길게는 수만 년 동안 빙하기 사이에 끼어들었다. 빙하시대 전문가인 미국 캘리포니아대 브라이언 페이건 교수는 이 시대를 ‘기후의 롤러코스터’로 묘사한다. 온도가 급격히 오르락내리락 하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거대한 빙상이 생겼다 녹았다 했다.
추운 빙하기 다시 올까
빙하기와 간빙기가 교차한 시기는 매우 규칙적이다. 동유럽의 공학자 밀란코비치와 영국의 지구물리학자 닉 섀클턴 등은 오랫동안 기후 자료를 연구해 규칙을 찾아냈는데, 약 4만1000년과 10만 년 주기가 서로 다른 시기에 플라이스토세 내내 반복되고 있었다. 즉 250만~100만 년 전에는 약 4만1000년마다 빙하기와 간빙기가 반복됐고 그 이후로는 10만 년마다 반복됐다. 원인은 지구 공전궤도 타원 모양의 변화(이심률의 변화), 자전축의 기울기, 그리고 자전축 및 공전궤도의 세차운동 때문이다.
이처럼 최근 수백만 년 동안의 기후는 지구 외적인 원인에 의해 큰 요동을 치고 있다. 이 외적인 요동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언제고 다시 추운 빙하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 다행인 것은 빙하기에 온도가 떨어지는 과정은 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일어나나, 회복은 짧은 시간에 이뤄진다는 점이다. 빙하는 8만 년 동안 만들어진 뒤 4000년 만에 사라지곤 했다. 그렇지만 혹시 더 급진적인 변화도 가능할지 모른다. 1000년 동안 급속한 빙하기를 겪었던 영거드라이아스기의 사례는 이런 걱정이 기우가 아닐 가능성을 말해준다. 혹시 최근의 온실가스 증가는 영향이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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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 매머드왕국의 최후
PART 1. “2015년, 지금은 빙하시대”
PART 2. 빙하동물의 천국, 매머드 스텝
PART 3. 빙하시대의 거대동물들
PART 4. 추위가 불러온 '인간성'의 폭발
PART 5. 무엇이 매머드 왕국을 무너뜨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