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인터넷, 위성멀티미디어방송(DMB), 무선식별(RFID)태그, 위치기반서비스(LBS)…. 연초부터 신규 방송통신서비스에 대한 계획들이 잇따라 발표되면서 전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오는 4월중 위성DMB가 첫 전파를 발사하는데 이어 5월에는 수도권 및 광역시에만 한정됐던 디지털TV(DTV)방송이 시군구로 확대되고 7월 LBS 시범서비스를 앞두고 주파수 재배치 논의가 한층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한편에선 특정주파수를 둘러싼 갈등이 점차 첨예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800MHz 주파수대역을 둘러싼 SK텔레콤과 LG텔레콤 간의 알력이 단순한 분쟁을 넘어 기업간 송사로 비화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나라간 분쟁도 예외는 아니어서 지난해 벌어진 위성DMB와 DTV를 둘러싼 한일간 알력다툼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가운데 3월초 정부는 기존 전파 체계에 일대 혁신을 가져올 새로운 전파 이용계획을 올 상반기중 발표할 계획을 공개해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최근 전파는 전세계적으로 점차 자원화되는 추세. 각국 정부와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날줄씨줄처럼 얽혀 있는 분쟁 자원으로 떠올랐다. 자사 이익을 찾기 위한 기업들의 로비도 총력전에 가까워지고 있는 실정이다.
무한매체 유한자원
최근 정보통신부가 발표한 한 보고서는 향후 전파 산업이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전파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지난 2002년 국민총생산(GDP)의 4.6%에서 2007년 6.6%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신규 방송통신서비스의 실시로 IT산업에서 전파산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2002년 34.6%에서 2007년 41.5%로 20%가량 늘어날 것으로 예측했다.
산업 규모가 급성장하자 나라간 기업간 이해관계도 점차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고 있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사용 주파수 용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인접 국가끼리 같은 주파수를 서로 다른 목적에 사용하면서 상호간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
위성통신 혼선과 관련해 우리나라와 외국간에 벌어진 조정활동은 2001년 201건에서 2003년 815건으로 4배이상 늘어났다. 특히 각국이 신규서비스들을 확대하면서 점차 그 횟수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다.
일본 위성디지털멀티미디어방송(DMB)과 국내 휴대인터넷 주파수 혼선 문제 역시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일본정부가 위성DMB서비스를 실시하면서 2.3GHz대역의 주파수를 사용하겠다고 발표해 같은 주파수 대역에서 휴대인터넷서비스를 하려던 정부 정책에 비상이 걸린 것. 이미 2003년 한국과 일본은 디지털TV ‘전파 월경’ 논란을 한차례 겪은 상황이었다.
주파수 배정을 둘러싼 반목은 기업 간에도 일어난다. 최근 800MHz 주파수 대역의 사용권을 놓고 벌어진 SK텔레콤과 LG텔레콤 분쟁이 단적인 사례다.
800MHz 대역은 모든 통신사업자가 눈독을 들이는 ‘황금 대역’. 주파수가 높을수록 장애물을 피해나가는 회절성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 보다 높은 주파수를 사용하는 사업자는 더 많은 시설비를 투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SK텔레콤측이 독점적으로 사용해온 이 대역의 사용권을 놓고 후발주자인 LG텔레콤측이 이의를 제기하면서 촉발된 분쟁은 최근 소송으로까지 이어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LG텔레콤측은 특정 주파수를 한 기업이 독점하는 것은 특혜라고 주장하는 반면 SK텔레콤측은 이 대역을 다른 기업에 공개할 경우 국내 이동전화 가입자의 50%가 넘는 사용자들이 주파수 부족으로 불편을 겪게 될 것이라는 상충된 입장을 내놓고 있다.
800MHz 주파수 배정문제는 미국과 일본에서도 발생했다. 최대 이동통신사업자인 버라이즌 와이어리스와 업계 5위 이동통신 사업자인 넥스텔커뮤니케이션스 역시 이 주파수 사용과 관련해 오랜 법적 분쟁을 벌였다. 일본의 1·2위 통신업체인 NTT도코모와 KDDI와 소프트뱅크 역시 800MHz 주파수 분배문제로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이처럼 전파가 국가간 기업간 주요 분쟁 현안으로 떠오른 것은 희소성을 갖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흔히 전파를 ‘무한매체, 유한자원’으로 묘사된다. 한국전파연구소 유충상 박사는 “전파는 이용 가능한 주파수 폭이 무한히 넓지만 사용하는 기술의 한계 때문에 한정된 자원으로 분류된다”고 설명한다. 그만큼 누가 먼저 선점하느냐에 따라 향후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는 얘기다.
지난 1990년대 후반 3개 통신사업자에게 주파수를 배분하면서 거둬들인 총액만도 1조2900억원. 각 사업자는 배정받은 30MHz당 3900억원을 지불한 셈이다. 따라서 사업자들에게 떨어지는 수익은 그 이상이라는 얘기다. 이를 전세계로 확대해 계산하면 천문학적 액수가 나온다.
이 때문에 전파는 오래전부터 공동 관리 대상 목록 1호로 올라있다.
전파도 아껴쓴다
1934년 출범한 국제전기통신연합(ITU)도 바로 이런 배경에서 출발했다. 공동자원인 전파를 좀더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상호간에 원활한 통신이 이뤄질 수 있도록 각국 정부가 서로 협력하자는 것. ITU는 매년 정기 총회와 수시 회의를 통해 각국의 입장을 절충하고 있다. 각국 정부가 아끼고 아끼는 주파수 자원이지만 항상 효율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뜻은 원대했지만 결국 기술력으로 극복하지 못하거나 실효성이 없어 사장된 경우도 허다하다. 전세계 어디서나 통화를 가능하게 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된 위성전화 글로벌스타와 이리듐은 그 단적인 사례다. 위성을 이용해 편리한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던 이들 서비스는 결국 셀룰러 방식의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경쟁력을 상실했다.
한편 식민지 체제와 분단 상황으로 미국과 일본, 유럽 등에 비해 전파 이용이 늦은 한국은 1990년대 들어 급격한 변화를 맞았다. 장파(HF), AM, FM을 비롯해 TV, 휴대이동통신 서비스가 시작되면서 주파수 이용 밀도가 급격히 늘어났다. 중앙전파연구소 자료에 따르면 현재 한국의 전파 이용밀도(한지역에서 전파를 사용하는 밀도)는 세계 최고수준이다.
이처럼 전파 산업이 급성장한 것은 CDMA방식의 이동통신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시작됐다. 유 박사는 “CDMA는 당시 전무하다시피 했던 전파산업을 이끌어낸 원동력이었다”고 회고한다. 비록 외국 기술이지만 이를 한국 실정에 맞춰 산업화에 성공한 좋은 사례라는 얘기다. 사용자수에 따라 공간을 셀로 나눠 서비스하는 이 방식은 한정된 공간에서 주파수 이용효율이 높다. 비록 GSM방식에게 세계 시장을 빼앗긴 아쉬움은 있지만 산악과 좁은 국토를 가진 한국 실정에 적합한 방식이라고 유박사는 설명한다. 이처럼 여러개의 새로운 통신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는 우리 실정에는 한정된 주파수를 좀더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기술이 각광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전파를 매개로 정보를 주고받는 유비쿼터스 시대로 접어들면서 한정된 전파자원을 이용하는 방안이 적극적으로 모색되고 있다.
전파연구소 유충상 박사는 “전파는 일종의 고속도로와 같아 차로를 넓힐수록 그 가치는 더욱 올라간다”고 요약한다. 전문가들은 이미 분배된 주파수 중 사용하지 않는 대역을 사용하거나 아직까지 사용되지 않고 있는 높은 주파수를 이용하는 방안을 내놓고 있다.
단적인 예로 ‘애드혹 네트워크’가 주목받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애드혹 네트워크는 이미 다른 목적에 배정된 주파수를 효율적으로 이용하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가까운 통신장치끼리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멀리 있는 목적지까지 정보를 순식간에 보내기 때문에 출력을 충분히 낮출 수 있어 연구자들 사이에 연구가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일정 지역에만 영향을 주는 소출력 무선 기술과 ‘조용한 영역’이라고 불리는 잡음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초광대역(UWB)기술은 비교적 최신 기술로 꼽힌다. 일정 출력 이하로 떠다니는 ‘전파 통신의 천적’ 잡음을 그냥 버리지 않고 넓게 이용하는 이 기술은 현재 3.1~10.6GHz 주파수대를 사용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이 기술은 일정 출력 미만 잡음을 사용하기 때문에 컴퓨터 주변기기나 홈네트워크, 차량용 레이더에서 사용될 수 있다.
간섭온도(Interference Temperature)기술 역시 잡음을 통신주파수로 사용하는 점은 UWB와 같지만 그보다 한단계 발전한 기술로 손꼽힌다. 이 기술은 주변 전파 잡음 환경에 따라 전파 출력을 조절해 주파수를 변칙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필요에 따라 주파수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개념인 셈이다.
주변 환경에 따라 사용주파수, 변조방식, 출력을 자유자재로 바꾸는 첨단 기법도 개발되고 있다. 현재 미국 샌드브리지사와 삼성전자가 공동 개발 중인 소프트웨어조작형라디오(SDR)가 그 단적인 사례다. SDR은 프로그램만 바꿔주면 주파수와 변조방식을 얼마든지 바꿀 수 있어 맞춤형 통신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 미국방연구계획청(DARPA)과 인텔, 필립스 등의 환경인식형라디오(CR) 역시 마찬가지다. CR은 주변환경 변화를 인식해 통신장치 스스로 전파이용방식을 바꾸는 최첨단 기술로 최근 들어 주목받기 시작했다.
한편 아직 미개척 영역에 있는 초고주파(진동수 130GHz이상)를 이용하는 방안도 적극 고려되고 있다. 130GHz, 275GHz, 3000GHz 주파수는 대역폭이 넓어 담을 수 있는 정보량도 그만큼 큰 대역으로 손꼽힌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 주파수 영역은 인공위성과의 교신이나 우주전파를 연구하는데 주로 국한돼 왔다. 그만큼 기술적인 한계가 많다는 얘기. 이 때문에 이들 주파수 영역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나라수도 선진국을 제외하곤 극히 제한돼 왔다.
주파수 고속도로를 뚫어라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런 기술개발 노력에도 불구하고 향후 주파수 부족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전망한다. 이 때문에 다른 목적으로 쓰이고 있는 기존 전파 가운데 사용하지 않는 대역을 재분배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사용되는 주파수 중 24%는 군사용 주파수로 10% 수준에 불과한 외국에 비해 군용주파수 비중이 매우 높다. 전시에 대비해 군에서 미리 상당수의 주파수를 점유해놨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신규 서비스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상당수 자원이 사용되지 못한채 방치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정부도 최근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주파수 운영방안을 올 상반기 중에 내놓을 계획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새 운영계획에 따르면 우선 현재 사용 중인 주파수 가운데 사용률이 떨어지는 주파수를 민간에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재분배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특히 군에서 전시 예비용으로 점유한 전파 가운데 사용빈도가 낮은 주파수를 골라내 이용율을 높이는 방안도 모색되고 있다. 쉬고 있는 유휴 주파수를 국민들이 필요에 따라 편하게 쓸 수 있도록 관련 규정도 개정할 계획이다. 특히 전체 주파수를 자원으로 규정하고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하는 세부 방안이 마련될 예정이다. 정통부는 이를 위해 공공주파수연구반을 구성해 미국ㆍ일본 등 주요국의 공공 주파수 관리 제도와 현황을 조사하는 한편, 우리나라의 주파수 관리체계에 대한 개선 방안을 수립키로 했다.
정통부 주파수정책과 송종옥 과장은 “최근 전세계적으로 전파를 자원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화되고 있다”면서 “새 운영계획은 사용자 입장을 중시하는 주파수 관리 체계”라고 밝히고 있다. 전파를 국민 곁으로 좀더 가까이 가져다 놓겠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