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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만t급 대형 크루즈 ‘레전드 오브 더 시’호. 현재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 태국 연안을 운항하고 있다.]

2월 14일 오후 5시 15분(한국 시각), 말레이시아 서안 포트 클랑(클랑 항구).

“엔진 준비됐습니다!”

크루즈선 ‘레전드 오브 더 시(M.S. Legend of the Seas, 이하 레전드)’호 8층의 브리지(선교, 선장이 운항을 지휘하는 곳)는 30분 뒤로 다가온 출항 준비로 분주했다. 항해사들은 기기와 해도, 통신기기를 점검했고, 항법사들도 레이더 스코프를 보며 나아갈 방위를 계산하고 있었다.

“위잉….”

잠시 뒤 창문 밖으로 1층 데크(갑판) 위 엔지니어들이 항구에 묶어 둔 거대한 케이블과 닻을 끌어올리는 모습이 보였다. 출항 준비가 끝났다.

보조브리지 벽에 있는 버튼을 눌러 기적을 세 번 울렸다. 배는 아주 천천히 먼바다 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이타닉보다 2만t 이상 큰, 7만t의 거대한 배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미동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바로 앞 부두에 적혀 있던 ‘포트 클랑’이라는 글자가 조금씩 작아져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 뿐이다.

브리지에서 지켜본 크루즈의 출항 장면은 경이로울 정도로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다. 선장부터 부선장, 수석항해사, 2등항해사, 도선사, 조타수, 항법사 등 10여 명의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기기를 점검하고 배를 조종했다. 이들은 해도와 무선 설비로부터 얻은 정보, 그리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해상 교통 상황을 종합해 배를 잔잔한 근해까지 몰았다.

흔히 크루즈를 현대 대형 여객선의 꽃으로 부른다. 호화로운 내부 장식과 안락한 실내 환경, 그리고 안전을 책임지는 각종 설비들 때문이다. 하지만 크루즈를 최고의 여객선으로 만드는 기술은 선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크루즈는 인구 수천 명의 작은 도시 하나가 통째로 들어와 있는 배다. 승객들이 안전하면서도 흥미로운 활동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고도의 선박 안전 기술과 호텔 건설 기술, 인테리어 기술, 그리고 바다 환경을 보호하는 환경 기술이 집약돼 있다.


[브리지(선교, 또는 조타실)는 선장이 운항에 필요한 명령을 내리는 곳이다. 안전을 위한 항법정비와 통신설비가 모여 있다. 사진은 출항 중인 레전드호의 브리지.]

안전, 크루즈의 기본

지난 1월, 이탈리아 연안에서 침몰해 20여 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낸 이탈리아 크루즈 ‘코스타 콩코르디아’는 얕은 해안선에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갔다가 사고를 당했다. 당시 선장과 승무원이 승객을 버리고 먼저 탈출했다는, 조셉 콘래드의 소설 ‘로드 짐’ 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소문이 나 사람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이 사고의 원인으로는 암초에 크루즈 하단이 긁히며 선박부에 틈이 생겼다는 점이 꼽힌다. 타이타닉호 역시 빙산에 선박부가 긁히며서 배 안에 물이 들어와 침몰했다. 무게 때문에 작은 배보다 바다 깊숙이 가라앉는 대형 선박의 경우, 얕은 바다에 가기는 더 어렵다. 운항 중일 때 배의 후미(뒷부분)는 거의 10m 깊이까지 잠긴다. 레전드호가 포트 클랑을 빠져나가던 때, 배 후미는 9.6m까지 잠겨 있었다(반면 선두는 절반도 안 되는 4.4m였다. 한창 운항 중인 배는 앞부분이 뒷부분에 비해 5m 이상 번쩍 들린 채 운항하는 셈이다).

좌초가 일어나면 배 안에 물이 들어오는데, 물이 한정된곳에만 차도록 유도하면 배 전체가 무거워지지 않아 침몰을 막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대형 선박은 안에 벽 같은 세로 시설물을 설치해 들어온 물을 가둔다. 이런 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화재가 날 경우 닫혀 더 이상 불이 번지지 않도록 하는 ‘내화격벽’과 물을 가두는 ‘수밀격벽’이다. ‘해상인명안전협약(SOLAS)’에 따르면 배 안의 내부 공간은 내화격벽으로 간격이 40~48m 이하가 되도록 나눠야 하며, 수밀격벽으로 한 번 더 촘촘히 공간을 분할한다.

또 하나, 입항과 출항 때 미세하게 배를 조정하는 방법이 있다. 포트 클랑의 접안 부두를 벗어날 때, 레전드는 특이한 움직임을 보였다. 배가 포트 클랑 반대쪽, 그러니까 배에서 보면 왼쪽으로 마치 게가 걷듯 옆걸음으로 움직였다. 배는 평소 운항할 때는 로켓이 추진하듯 후미에 있는 거대한 프로펠러(레전드 호는 2개가 있으며 더 큰 배는 3개까지 있다)를 이용해 앞으로 나아간다. 방향을 바꿀 때는 꼬리지느러미처럼 생긴 키(러더)가 추력의 방향을 좌우로 바꾼다.

레전드가 옆걸음으로 부두에 닿을 수 있는 것은 ‘선측추진기(사이드 스러스터)’라고부르는 장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선측추진기는 배가 앞으로 나아가는 방향과 수직이 되게 설치한 보조 프로펠러로, 입항과 출항을 할 때 부두로 배를 접근시킨다. 입출항이 잦은 크루즈는 거의 모두 여러 개의 선측추진기를 가지고 있다. 레젠드호도 배의 앞부분에 두 개, 뒷부분에 한 개를 갖고 있다. 가장 많이 갖고 있는 배는 4개까지 있다. 반면 입출항이 뜸한 상선은 아예 없거나 한 개만 있어 항구에 접근할 때 작은 동력선(터그보트)이 끌거나 밀어줘야 한다.

최근 짓는 대형 선박에는 좌우로 180° 회전이 가능한 가변형 추진기(아지포드)를 달기도 한다. 방향을 직접 바꿀 수 있기 때문에 키는 물론 후미의 선측추진기가 따로 필요 없다. 크루즈 중에서는 레전드호가 속한 RCCL이 보유한 ‘보이저 오브 더 시’호(14만t급)가 1999년 최초로 장착했다. RCCL은 2006년 만든 ‘프리덤 오브 더 시’, 2009년 만든 현존 최대 크루즈 ‘오아시스 오브 더 시’와 ‘얼루어 오브 더 시’에도 세 기씩의 아지포드 추진기를 설치했다. 추진기를 만든 핀란드 ABB사는 “기존 추진기에 비해 추진 효율이 10~15% 높다”고 말했다.



[지난 1월 좌초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해상 교통사고 막는 충돌 방지시스템

수심이 얕은 해안선에서 충분히 멀어지면 배는 비로소 주 추력기를 가동해 근해로 나간다. 하지만 아직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출항할 때는 안전을 위해 세 단계의 조건을 거칩니다. 먼저 막 항구를 출발한 단계로, 통행하는 배가 많고 수심이 얕아 가장 위험합니다. ‘적색조건(레드컨디션)’이라고 부르며 모든 항해사와 조타수, 항법사, 도선사가 초긴장상태로 운항을 합니다. 두 번째는 통행하던 배가 조금 적어지거나, 얕거나 좁은 위험 지역을 벗어나 위험이 다소 낮아진 단계입니다. ‘황색조건(옐로 컨디션)’이라고 하죠. 마지막으로 위험한 지역을 완전히 벗어나 연안 항해를 시작한 ‘녹색조건(그린 컨디션)’ 단계입니다. 이 단계가 되면 선장 대신 부선장이 전체 운항을 맡습니다.”

레전드 호의 최고 책임자인 스베레 라이언선장이 말했다. 말을 듣고 창 밖을 보니 정말 말라카해협을 넘어 온 수많은 상선과 LNG선이 시야 가득 바다를 가리고 있었다. ‘적색조건’의 뜻이 실감났다. 게다가 해도를 보니 곳곳이 얕고 좁은 위험한 지역투성이였다. 이런 곳을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은 없을까.

항공기나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배에도 ‘충돌방지시스템’이 있다. 해상 충돌방지시스템은 배가 장애물과 충돌하지 않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기기다. 레이더와 관제정보, 해도를 종합해 접근하는 배나 장애물을 자동으로 찾아내고(자동식별장치) 레이더로 궤적을 추적한 뒤(자동레이더궤적표시기), 안전한 경로를 계산해 보여준다. 모든 위험이 사라지면 원래 항로로 복귀하는 최단경로를 제시한다.

하지만 첨단 장치들도 오랜 세월 이어져 온 현장의 지혜 앞에선 초라하다. 바다는 늘 변수가 많다. 0.1m 단위까지 표시된 상세한 해도와 레이더장비, 항법장치, 관제시설을 갖췄다 해도 항구를 벗어나는 일은 아직 사람의 세심한 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코스타 콩코르디아호 사고 직후인 지난 1월 말,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해양법률가의 말을 빌려 “항법장치에만 의존한 채 기존 항로를 벗어나 해안에 접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항구 정보를 잘 아는 경험 많은 도선사의 동행이 필수”라고 말했다.

이 날 레전드호에는 현지인 도선사 두 명이 탑승했다. 이들은 배가 황색조건을 벗어날 때까지 조언을 하다 녹색조건에 접어들자 작은 배를 타고 떠났다. 도선사의 배는 포트 클랑에 입항하려고 대기 중인 다른 상선을 향했다.


[선측추진기(➊)는 배 앞뒤에 있는 보조 프로펠러로, 배의 진행방향과 수직으로 추력을 발생시켜 항구에 접근시키거나 멀어지게 한다. 배 뒤에 있는 선측추진기와 기존의 고정형 추진기(➋)를 하나로 통합한 가변형 추진기(➌)도 최근 쓰이고 있다.]


[STX유럽이 2009년 만든 세계 최대 크루즈 ‘오아시스 오브 더 시’호의 후미호텔 부분. 거대한 빌딩숲에 둘러싸인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쾌적하고 깨끗한 여행을 꿈꾸다

“삐-!”

이틀 후인 2월 16일 오후 3시. 레전드 호 1층에 위치한 기관부 종합통제실에 경고음이 울렸다. 이어 모니터에 나온 데크 평면도의 한 지점에 붉은 점이 찍혔다.

“화재 경보예요. 4층 주방에서 울렸어요.”

잉마르 닐슨 레전드호 기관장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비상 전화가 울렸다. 전화를 받고 돌아온 닐슨 기관장은 가벼운 표정으로 말했다.

“4층 데크 승무원에게 온 전화입니다. 연기 때문이지, 불이 난 게 아니라고 합니다. 조그만 화재 가능성에도 주의해야 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경보가 잘못 울리는 사례가 대부분입니다. 그래도 늘 긴장하고 감시하고 있죠. 특히 화재 위험이 높은 세탁소, 주방, 엔진실은 특별 관리합니다.”

모니터를 보자 이상이 발견된 항목 목록이 떴다. 방금 경고음이 울린 4층 데크의 화재경보기도 있었다. 옆에는 바로 ‘복구됐음’을 의미하는 ‘RET(RETURNED)’라는 표시가 붙었다. 종합통제실은 엔진과 전기, 물 공급 등 공학적인 면을 총괄하는 곳이다. 배 내부의 비상 상황을 감지하는 센서, 배의 균형을 맞추는 선박평형수(밸러스트), 에어컨, 공조시스템 등 3000개가 넘는 항목의 상태를 한눈에 확인하고 조절한다.

“안전과 환경에 특히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화재 감시기 외에도 정전 시 15초 이내에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비상발전기 2대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안전 장치를 갖추고 있습니다. 환경 장비로는 엔진의 폐열을 이용해 공조기 온도를 조절하는 폐열 재활용 시스템과, 바다에 배출하는 물을 최대한 정화시켜 배출하는 정화장치 등이 포함됩니다. 배출수는 국제적인 기준이 엄격합니다. 오염물 농도를 15ppm(우리나라 해역수질기준 1등급과 2등급 사이에 해당) 이하로 정화한 뒤, 해상 약 22km 밖에서 시속 11km 속도로 달릴 때만 내보내야 합니다. 우리 배는 최고 5ppm으로 더 엄격하게 정화해 내보내죠.”

최근 크루즈는 항해 중일 때뿐만 아니라 정박할 때도 환경을 생각하고 있다. 관광자원이 풍부한 항구에 정박해 육상 관광도 함께 하도록 하는데, 이렇게 정박해 있는 동안에도 배 안에 전기를 공급해야 한다. 크루즈는 보통 자체 발전기가 있어서 전기를 해결한다. 레전드호는 디젤발전기 5개로 선상에서 필요한 전기를 모두 생산한다. 만약 정박해 있는 동안만이라도 외부 전력을 끌어 쓴다면 디젤 엔진을 꺼도 돼 온실가스 배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유럽과 북아메리카 일부 항구에는 크루즈에 육지의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설비를 설치하고 있다. ‘세계항구기후계획’에 따르면, 이 설비를 쓸 경우 이산화탄소는 절반, 대기오염물인 황산화물(SOx)과 질소산화물(NOx)은 각각 96%와 97% 줄일 수 있다.

이튿날인 2월 17일 새벽, 레전드호는 처음 출발했던 싱가포르항으로 돌아왔다. 동이 트는 고요한 도심을 거대한 배로 가로지르는 느낌이 기묘했다. 선측추진기를 가동해 천천히 부두에 몸을 가져다 대는 것으로 여행은 끝났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안전을 책임졌던 과학은 그제야 조용히 잠에 빠졌다.




[레전드호의 폐기물을 처리하는 기관부 내부]




[스베레 라이언 레전드호 선장(아래 왼쪽 세 번째)이 여수엑스포 ‘바다토끼’ 팀에게 해도를 읽어주고 있다. 해도는 0.1m 단위까지 표시돼 있을 정도로 정밀하지만, 항구에 드나드는 일은 언제나 긴장의 연속이다.]

 

 



▼관련기사를 계속 보시려면?

Intro. 타이타닉에서 크루즈까지
Part1. 초호화 여객선 타이타닉은 왜 침몰했을까
Part2. 안전·환경·쾌적-크루즈, 보이지 않는 과학

2012년 4월 과학동아 정보

  • 레전드호 윤신영 기자 | 도움 2012여수세계박람회, RCC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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