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국내에 몰아닥친 퍼스널컴퓨터 열풍이 이상과열현상이었다고 한다면 올해부터 서서히 일기 시작한 퍼스널 컴퓨터의 수요 증가 현상은 ‘퍼스널 컴퓨터의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건강한 수요라 할 수 있다. 유행에 따른 옷갈이도 아니고 엄청난 불로소득을 노려 이리뛰고 저리뛰는 복부인들의 투기현상은 더 더욱 아니다.
국내에 컴퓨터가 첫발을 내디딘지 20년. 이제 ‘제3의 물결’이라 불리는 새로운 문화를 맞아들이기 위한 우리 나름대로의 준비가 무엇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모든 세상사에는 순서가 있고 순서에 입각한 내실을 기했을 때, 어떤 외부의 충격에도 뒤뚱거리지 않는 건실함이 존재한다. 컴퓨터문화의 수용은 슈퍼컴퓨터나 메인프레임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오락적 교육을 중심으로 한 8비트 퍼스널컴퓨터의 건강한 받아들임에서부터라 할 수 있다. 뭐든지 해결해 준다는 컴퓨터의 물신화(物神化)현상을 극복하여 생활의 도구로서 이용하고 그 장단점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새문화의 터전이 마련되는 것이다.
35세의 젊은 나이로 우리나라 컴퓨터 산업을 이끌어나가고 있는 대우전자 컴퓨터사업 본부장 안경수이사를 만나 컴퓨터산업의 기저를 이루고 있는 퍼스널 컴퓨터의 제반 현황에 대하여 알아보았다.
기반이 튼튼해야
─요즈음 퍼스널컴퓨터의 생산이나 소비가 점차 활기를 찾고 있는데 어떤 이유 때문입니까?
“우리나라가 16비트 PC(퍼스널 컴퓨터) 수출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만, 그보다도 컴퓨터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8비트 PC의 국내 수요가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이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됩생각됩니다. 8비트 PC에 대한 기반없이 그보다 상위기종인 16비트 PC나 미니컴퓨터의 생산에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절름발이식 구조일 수 밖에 없지요.”
─상위기종을 생산해내고 사용할 수 있다면 수요자나 생산자 양자 모두가 바람직한 것 아닙니까?
“컴퓨터는 냉장고나 세탁기와 같이 단순한 가전제품이 아닙니다. 가전제품인 경우 신제품이 나와도 아무 지장없이 쓸 수 있지만 컴퓨터는 사용자가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같은 기계라 하더라도 그 성능은 천차만별이 됩니다. 즉 컴퓨터의 활용능력이 사용자에게 숙달되는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8비트 PC를 통해 컴퓨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아울러 개발된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고 스스로 사용자가 프로그램을 짤 수 있는 정도까지 되어야 속된 표현으로 ‘본전을 뽑는데’초보자가 대뜸 16비트 PC부터 사서 사용한다면 제대로 활용이 되겠읍니까. 물론 경제적으로도 8비트 PC의 가격이 몇십만원대인데 비해 16비트 PC의 가격은 백만원대를 웃도니 그 효용성은 따져볼 필요도 없겠지요. 외국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이 소설부터 사서 읽으려면 아무리 노력해도 효과를 낼 수 있겠읍니까.”
─기업측의 입장에서는 어떻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컴퓨터의 생산기술을 완전 습득해서 우리 것으로 만드는 과정도 필요하지 않겠읍니까. 특히 컴퓨터는 개발능력에 따라 같은 8비트라도 여러기능을 가진 ‘똘똘이’가 될 수도 있고 그저 흉내만 내는 ‘멍청이’로 머무를 수도 있으니까요.
미국이나 일본의 경우 8비트 PC시장이 성숙되고 이를 기반으로 성능이 향상된 16비트 PC수요 요구가 자연스럽게 나왔읍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컴퓨터 생산업체들이 8비트에 대규모 투자를 했다가 엄청난 적자를 본 채 16비트 쪽으로 몰린 것이 현실입니다.”
─그렇다면 국내 수요자의 요구와는 전혀 별개의 흐름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데···
“맞습니다. 우리나라의 컴퓨터 생산구조는 ‘생산과 소비의 엄청난 불균형’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읍니다. 좀더 심하게 이야기한다면 기업측에서는 스스로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나라 컴퓨터 시장은 안정성 있는 피라밋구조가 아니라 기형적인 다이아몬드구조라고 설명하는 안이사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든 외형적인 장사에 치우친 기업측에 책임이 있다는점을 솔직히 인정한다. 외국 제품의 복사에 치우쳐, 한회사 제품에서 조차 소프트웨어 호환성이 없을 정도였으니 오죽했겠냐는 이야기다.
교육용으로서 8비트 PC활용
─83년 우리나라에서 퍼스널컴퓨터 열기가 불어닥칠 때와 지금의 상황은 어떻게 다릅니까?
“그당시는 대단했읍니다. 제가 미국에서 귀국할 당시가 83년 10월이었는데 84년 초까지만 해도 컴퓨터전시회를 한번 하면 관람인원이 보통 20만은 넘었으니까요.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서 발생했읍니다. 컴퓨터는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만물박사라는 사고가 만연한 것이지요. 기업측의 홍보도 그랬고 언론이 옆에서 상당부분을 거들었고요. 막상 수요자가 컴퓨터를 사서 써보니 기대에 못미치는 것은 당연지사 아니겠읍니까.
컴퓨터는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5만원짜리 카셋과 30만원짜리 뮤직센터와 1백만원 이상가는 컴포넌트 시스팀이 다르듯이 컴퓨터의 성능과 가격은 여러 종류가 있는 것입니다. 5만원짜리 카셋을 사놓고 컴포넌트시스팀의 성능을 요구한다면 문제지요. 당연히 이상과열현상은 수그러들 수밖에 없고 사용자들도 애써 산 컴퓨터를 먼지쌓인 창고에 처박아 놓을 수밖에 없지요.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릅니다. 소프트웨어개발이 가속화되면서 PC의 활용도도 많이 다양해져, 단순한 오락용에서 벗어나 교육학습기자재로서 효율성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읍니다. 올해 국내의 8비트 PC 예상판매량은 6만대 정도이고 88년에는 10만대까지 내다보고 있읍니다”
─흔히들 PC의 고유기능을 오락용 가정용 교육용 업무용으로 나누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용도의 활용이 두드러질 것 같습니까?
“용도가 분명히 나누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컴퓨터를 배우는데 오락적인 게임기능이 없어서는 안되고, 업무용이 가정용이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나라에서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보급된 20만대 이상의 8비트 PC가 오락용 내지 교육용으로 많이 활용됐다고 봐야지요. 특히 앞으로 몇년간은 교육용으로 많이 활용되리라 생각합니다. 일본에서도 86년 한해동안 2백만대 이상의 교육용 PC가 생산됐고 통신기능을 어느 정도 갖춘 신종 PC가 쏟아져 나와 교육계에 일대 혁신을 예고하고 있으니까요.
요즘 국내에서도 8비트 PC를 업무용으로 활용하는 소프트웨어가 많이 개발돼 개인사업을 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읍니다. 가정용의 경우 우리나라 여건 상 당분간 특별한 수요는 발생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컴퓨터를 사용할만한 경우가 별로 없으니까요. 물론 전국적으로 컴퓨터통신망이 확대되어 과기처가 추진하는 1가구 1단말기 설치 계획이 일정 단계에 오르면 상황은 많이 달라지겠지요. 이는 컴퓨터라기 보다는 비디오텍스라고 부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당분간 우리나라는 교육용으로 8비트 PC를 활용함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역설한다. 안이사는 특히 컴퓨터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는 오락적 기능이 필수적임을 지적한다. 초기 8비트 PC가 오락용에만 치우쳤다는 사회 각계의 의견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것. 초보단계에서는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게 하는 것’이 교육적 가치가 더 높다는 설명이다. 컴퓨터 이론체계를 교과과정에 넣는 것보다는 컴퓨터로 게임 한번 하게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지속적인 지원이 문제
─요즈음 나오는 성능이 향상된 8비트 PC는 어떤 것들이 있읍니까?
“저희 대우전자의 경우 초기부터 MSX 방식의 8비트 PC를 생산해왔는데, 최근에 개발된 것이 MSX II 방식의 CPC-300이며 앞으로 나올 것이 CPC-400입니다. 초기 것을 IQ-1000이라 부르며 요즘 개발돼 나오는 것을 보통 IQ-2000이라고 하지요. 메모리 용량이 2배이고 그래픽 기능이 확대됐으며 비디오 오디오 기능도 추가되었읍니다. 특히 컬러 한계가 크게 확장돼 5백12색까지 나타낼 수 있읍니다. 또한 가까운 거리의 통신기능도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 교육용으로 활용이 기대됩니다. 삼성전자에서도 최근 8비트 PC인 SPC-1500 등을 개발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초기에는 가전 3사를 비롯 많은 컴퓨터 생산업체가 8비트 PC를 생산했으나 지속적으로 8비트 PC에 주력해온 곳은 저희가 유일합니다. 그 결과 대우전자는 가장 낮은 단계의 PC부터 16비트 AT까지 완벽한 시스팀을 갖추고 있읍니다. 물론 호환성은 1백% 완벽하지요.”
유행에 뒤쫓지 않고 나름대로의 차분한 성장을 이룩한 결과, 현재 8비트 PC시장을 주도하는 위치에 있다는 것(유럽지역과 남미지역에 수출도 꾸준히 늘어나 수출 80% 내수 20%를 기록하고 있다).
─MSX 기종이 애플기종에 비해 소프트웨어가 충분히 못하다는 것은 사실아닙니까.
“애플기종 컴퓨터의 소프트웨어가 풍부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풍부한 소프트웨어를 활용할 수 있느냐는 문제에 부딪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어느 컴퓨터이건 간에 컴퓨터를 생산해낸 업체가 그 기종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용자를 지원하느냐가 중요합니다.”
3명이 1천2백명의 대가족으로
국내 대그룹 최연소 이사로 첨단제품인 컴퓨터의 사업책임을 맡고 있는 그가 어떻게 이 분야와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물어보았다.
“저는 대학에서 컴퓨터하고는 거리가 먼 화학공학을 전공했읍니다. 물론 유학갈 생각도 없었고요. 대학을 졸업하자 마자 삼성그룹에 입사해 신입사원 생활을 하다가 군대에 갔읍니다. 제대할 무렵 육군화학실험소에 잠깐 근무했는데, 서로들 모르는 것이 많아 애를 많이 먹었읍니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고 미국 스탠퍼드 대학에 유학을 갔지요. 요즘 자주 거론되고 있는 화합물 반도체에 관한 박사학위를 받고 미국 회사에서 한 2년 근무하다 귀국했읍니다. 귀국 후 대우그룹 수출부에 잠깐 일하다 84년 1월부터 컴퓨터 사업본부가 생겨, 저까지 3명의 인원이 출발한 것입니다.”
3명의 인원이 지금은 1천2백명의 대가족이 되었단다. 자신을 포함 3명 모두가 컴퓨터 전문가는 아니었다는 것. 그당시 상황은 대기업 생산부장이나 대학을 갓 졸업한 신입사원이나 컴퓨터에 대해 아는 지식은 대동소이한 실정. 단지 유학시절 컴퓨터로 과제를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서 컴퓨터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고 즐거이 컴퓨터를 사용했던 경험이 전부였다는 것이다.
컴퓨터 분야가 무한한 발전 가능성이 있다는 막연한 신념만으로 뛰어들어 오늘의 상황을 만들었다. 1천2백명이라는 대식구는 모두 안이사가 중심이 되어 끌어모으고 안에서 키운 사람들이다.
─기술이 모자라 겪는 어려움은 없읍니까?
“현재 저희들의 경우 상당수의 연구원들이 해외에 나가 기술습득을 하고 있읍니다. 무엇부터 손대야할지 모르는 초기의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지요. 그렇지만 아직도 엔지니어링 맨파워는 부족합니다. 또한 컴퓨터는 종합제품이기 때문에 부품산업에서의 약세가 두드러져 국제경쟁력이 약화될 때가 많습니다. 이런 부분은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최근 반도체를 비롯 첨단산업에서 세계 몇위라는 식의 성과를 내는 것은 전체가 아니라 극히 일부분이라고 지적하면서 모든 산업의 수준이 골고루 일정 단계에 올랐을 때만이 진정한 의미의 기술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아직 우리는 기술선진국이 아니며 계속 겸허한 자세로 배워야 하는 과도기에 불과하다”는 안이사의 사고방식은 ‘착실한 성장’이라는 모토로 대우전자 컴퓨터 사업본부 운영에 반영되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 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안이사는 선천적으로 건강을 타고난 과중한(?) 업무를 잘 견뎌내지만 회사일에 밀려 개인적인 계획을 전혀 세울 수 없는 자신의 처지에 짜증이 날 때도 있단다.
연구소에 틀어박혀 한창 연구에 몰두할 나이에 사업 일선에서 야전사령관 역할을 하는 안이사. 어쩌면 쉽게 거꾸러지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도 없지는 않지만, 젊은 사람의 생동감 넘치는 활력과 나이에 걸맞지 않는 침착한 판단을 소유한 그가, 세계의 열강들과 겨루는 첨단산업전쟁에서 꼭 필요한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