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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중궁궐 호화로운 연회장. 화려한 옷차림의 군주가 흥에 겨워 황금잔을 집어 든다. 달콤한 와인이 목젖을 기분좋게 울리며 넘어가는 것도 잠시, 그는 곧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진다. 왈칵 토해낸 검붉은 피가 비단옷을 적신다. 그의 눈이 서서히 감긴다.
권력을 둘러싼 암투를 다룬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무소불위의 왕이 누군가가 섞었는지도 모를 독약 한 방울에 비참하게 죽어가는 것.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은 누군가를 암살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대부분의 무기는 상대와 대면했을 때만 쓸 수 있다. 상대가 나보다 힘이 세거나 무기에 더 능숙하면 오히려 내 목숨이 날아갈 판이다. 하지만 독은 다르다. 약간의 화학 지식과 들키지 않고 독을 탈 수 있는 행운만 주어진다면 어린아이라도 이용할 수 있다. 독이 약자의 ‘칼’이라 불리는 이유다.
치정과 함께 시작된 독살
고대 역사나 신화에서는 독을 이용해 상대를 해치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발견된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메데이아는 남편 아이게우스가 다른 여자에게서 낳은 아들인 테세우스가 찾아오자 그를 독살하려 한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지닌 칼을 보고 자신의 아들임을 알아차린 아이게우스가 독을 빼앗는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독을 지닌 히드라를 처치한 후, 그 피를 화살에 발라 적을 퇴치한다.
고대 역사에서도 독은 심심찮게 등장한다. 이집트가 로마에 패망하자 마지막 여왕이었던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게 가슴을 물게 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리스의 젊은이들을 미혹시켰다는 죄를 뒤집어쓴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 채 스스로 독배를 마시고 세상을 떠난다. 기원전부터 독이 자살이나 죄인의 처형 수단으로 흔히 이용된 것이다. 이렇듯 독의 효능과 이용법이 잘 알려져 있었기에,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사람들은 쉽게 독의 유혹에 빠져들기 마련이었다.
독살의 계보에서 가장 윗자리를 차지하는 이는 고대 로마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다. 네로 못지않은 폭군으로 유명했던 칼리굴라의 여동생인 그녀는 광기어린 오빠에게 미움을 받아 코르시카 섬에 유배되는 등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죽음의 위협에 시달렸다. 칼리굴라는 폭정 4년 만에 암살되고 숙부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네로)이 있었음에도 황제의 아내였던 발레리아를 독살하고 자신이 황비가 돼 16살이었던 자신의 아들 네로를 황제로 만든다. 역사는 그녀가 어떤 독약을 썼는지 기록을 남기지 않았지만 후대의 학자들은 삼산화비소를 사용했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하지만 그녀의 말로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잔인한 성품과 솜씨를 물려받은 아들 네로가 제위에 오르자마자 클라우디우스의 친아들이었던 의붓동생 브리타니쿠스를 독살하고, 곧 어머니 아그리피나마저 죽이고 말았던 것이다(비록 독살은 아니었지만). 네로가 황제가 된 지 겨우 5년 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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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 그 치명적인 유혹
이처럼 독살의 역사는 매우 길다. 이 긴 역사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독이 앞서 나온 비소(砒素, arsenic, 원소기호 As)다. 처음 비소를 분리한 것은 13세기 중엽 독일의 신학자이자 자연철학자였던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193~1280)였다. 하지만 비소의 독성은 이미 널리 알려진 상태였다. 고대 중국과 인도, 그리스, 이집트인들은 화합물 형태로 해충이나 쥐를 잡는 데 비소를 애용했다.
비소가 독약의 대명사처럼 사용된 데는 독성이 강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손쉽게 구할 수 있고 사용하기도 쉬웠던 것이 큰 이유였다.
실생활에서 흔히 접하는 독극물 중에 비소 못지않게 인명 피해를 가져온 것들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의도적이기보다는 사고나 무지의 결과물이었다. 수은과 납이 대표적이다. 영국 왕 찰스 2세는 수은 중독으로 사망했고, 아이작 뉴턴(1643~1727)과 마이클 패러데이(1791~1867)를 비롯한 근대의 유명한 화학자 대부분이 수은 중독으로 고통받았을 정도로 수은 중독은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당시 유행하던 연금술에 대해 과도하게 관심을 가진데다 수은 중독의 치명성을 몰라 사고를 당했을 뿐이다. 납 역시 체내에 들어오면 빈혈, 복통, 신장 장애, 환각과 정신 이상 등의 증세가 나타난다. 대부분의 납 중독 환자들은 납을 제련하는 곳에서 일했거나 납이 포함된 제품들을 많이 사용하다 고통을 받은 경우였다.
하지만 비소는 다르다. 비소는 자연에서 계관석과 웅황뿐 아니라 유비철석, 황비동석 등에도 섞여 있는데 이들은 상대적으로 흔한 광물이다. 또한 구리와 납 등을 제련할 때도 부산물로 나오기 때문에 비소는 항상 남아도는 물질이었다. 게다가 비소는 살충제나 살서제, 물감, 페인트, 유리제품, 벽지, 심지어는 화장품이나 강장제, 사료 첨가제 등으로도 널리 쓰였기에 구하기도 쉽고 값도 쌌다. 또 (당시의 기술로) 검출도 쉽지 않다는 점은 비소를 살인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독약으로 만들었다.
비소가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은 기록된 것만도 차고 넘친다. 가장 유명한 살인사건은 보르자 가문의 체사레와 루크레치아 남매의 엽기적인 행각일 것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서 이상적 군주상으로 등장했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었는데, 비소를 이용한 살인에서도 재능을 보인 것으로 알려져있다. 그들은 ‘라 칸타렐라’라는 흰색 가루를 이용해 그들의 정적을 제거하면서 권력의 중심부에 다가갔는데, 역사가들은 이를 삼산화비소로 추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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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소를 이용한 연쇄살인범의 목록은 계속 이어진다. 브랑빌리에 남작부인으로 유명한 마리 마들렌 도브레는 정부(情夫)였던 생트크루아
와 짜고 재산을 독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와 두 명의 남자 형제들을 차례로 독살했다. 그녀의 치밀성은 아버지를 독살하기 전에 미리 예행
연습을 했던 것으로도 드러난다.
그녀는 구빈원의 환자들에게 음식과 포도주를 기부하는 동정심 많은 귀부인 행세를 했는데, 이는 비소의 치사량을 알기 위해 실시한 생
체 실험의 일환이었다. 구빈원의 빈약한 식탁 위에 놓인 기름진 음식과 포도주를 맛있게 먹으며 귀부인의 덕에 대해 칭송했던 빈민들은 이유없는 구토와 설사 증세를 보이며 병들거나 죽어갔다. 이를 통해 브랑빌리에 부인은 비소의 치사량은 얼마인지에 대한 실질적 지식을 쌓았고, 결국 자신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죽이는 데 적절하게 이용했던 것이다.
17세기가 되자 비소는 더욱 대중화됐다. 이탈리아의 토파나라는 약재상이 판매한 비소용액 ‘아쿠아 토파나’는 화장품으로 포장되어 유리병에 담겨 팔려나갔지만 본래의 용도보다는 누군가를 해하는 데 더 많이 사용되었다. 독성이 어찌나 강했는지 포도주에 몇 방울만 섞어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같은 시기, 프랑스에서는 ‘석세시옹’이라는 이름의 가루약이 인기를 얻었는데, 석세시옹이란 우리말로 ‘상속의 가루’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즉 재산을 상속해줄 부유한 친척을 없애는 데 특효라는 속뜻이다. 아쿠아 토파나나 석세시옹 등이 유행하자, 이를 이용해 대량 살인을 저지르는 연쇄살인범들도 나타났다. 가정부로 일하면서 집주인과 가족들을 30명 가량이나 독살한 헬렌 예가도(1803~1854), 어머니와 네 명의 남편,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얻은 15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죽인 메리 앤 코튼(1832~1873)이 대량 살인의 악명을 얻은 것으로 유명하다.
비소의 탁월함에 반한 것은 서양 사람들만은 아니었던 듯 하다. 중국 청나라 11대 황제인 광서제는 37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기에 세간에서는 독살설이 끊임없이 제기되어왔다. 수수께끼가 밝혀진 것은 지난 2008년으로 광서제 서거 100년만의 일이었다. 중국의 국가중점문화공정팀이 광서제의 유골과 모발에서 치사량의 비소 성분을 찾아내면서 광서제의 사망원인을 비소 중독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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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살, 무대가 넓어지다
이처럼 비소를 비롯한 독은 많은 이들의 목숨을 빼앗은 소리없는 유령이었다. 그러나 독에 의한 살인 사건이 늘어날수록 독을 검출하는 방법에 대한 열망도 높아졌고, 1836년 제임스 마시(1794~1846)가 최초로 비소 사망자의 몸에서 비소를 검출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마시 시험법이라는 이름의 이 방식은 아연덩어리에 황산을 부어 수소를 만든 뒤, 비소를 함유한 물질을 첨가하면 수소에 의해 비소가 환원되어 수소화비소가 만들어지는 것을 이용한 방법이다. 마시 시험법은 0.7㎍ 정도의 미량 비소도 검출할 수 있어 비소를 이용한 살인사건에서 약삭빠르게 빠져나가려고 한 살인자들을 검거하는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후에도 법의학의 발전은 인체에 해로운 각종 독성 물질을 검출하는 방식을 속속 찾아냈다. 수은이나 납 등 중금속의 독성이 알려지면서 이들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거나 해롭지 않은 다른 물질로 대치하면서 독에 의한 사고나 살인의 가능성은 줄어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이 독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해주고 있는 것이다.
각종 독극물의 검출법이 등장하면서 독으로 누군가를 살해하는 비율은 예전에 비해 떨어졌다. 그러나 과거의 독살이 원한이나 유산을 위해 특정한 누군가를 겨냥해 일어나는 경우가 많았다면 20세기 들어서는 다른 범죄의 일환으로 독극물이 이용되거나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독극물이 무차별적으로 살포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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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극물이 범죄의 일환으로 사용된 사건으로는 1948년 일본의 제국은행 사건이 있다. 은행이 막 영업을 마친 오후, 깔끔한 차림의 한 남자가 은행으로 들어섰다. 남자는 ‘도쿄시 방역과 의사’라는 직함이 찍힌 명함을 내밀며 근처에서 강력한 전염성 이질이 발생해 시민들에게 이질 예방약을 나눠주는 중이라며 은행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았다. 이들 모두에게 약을 나눠준 뒤 한꺼번에 약을 먹게 했다. 잠시 후 16명의 은행원들은 바닥에 쓰러졌고, 11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남자가 은행원들에게 먹인 것은 맹독성 시안화칼륨(흔히 ‘청산가리’로 불리곤 한다)이었고, 은행원들이 죽어가는 동안 남자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유유히 은행 금고를 털어 달아났다(범인은 검거되었으나 감옥에서 95세까지 장수했다).
이처럼 현대 사회의 독살 사건은 과거에 비해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는 시안화칼륨이 든 타이레놀로 인해 도시 전체가 공포에 휩싸인 적이 있다. 익명의 범인이 가정상비약으로 흔히 이용되는 두통약 타이레놀에 시안화칼륨을 넣어 유통시켰던 것이다.
이 잔인한 테러는 7명의 무고한 희생자를 낳았고, 타이레놀 제품을 생산한 회사를 도산 위기에 몰아넣었다. 또 시민들의 불안감과 불신감을 증폭시켜 도시 전체를 패닉 상태에 빠지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채 미제 사건으로 끝이 났다.
이러한 종류의 무차별 독극물 테러는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995년 3월 20일 오전 출근시간, 일본 도쿄의 혼잡한 지하철 내에 맹독성의 사린가스가 유포되어 12명이 사망하고 500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한 엄청난 사건이 발생, 일본뿐 아니라 전세계가 경악했다. 게다가 이 사
건이 사이비종교단체인 옴진리교의 소행으로 밝혀지면서 특수 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아니라, 일반인이라도 얼마든지 대규모 독극물 테러가 가능하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들은 다시금 독극물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마음 속 독기의 해독제는 어디에?
20세기 이후 일어난 일련의 독극물 사건들을 살펴보면, 독극물의 종류와 독성뿐 아니라 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악의 역시 점점 진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가장 무서운 독기는 비소나 시안화칼륨 같은 독 그 자체가 아니라 이를 수단으로 이기심을 채우려는 인간의 마음,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이런 사회에서 독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독을 무력화시키는 물리적 해독제뿐 아니라, 인간의 어두운 악의를 정화해 줄 심리적 해독제도 반드시 같이 연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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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dge. 뇌출혈부터 암까지 뱀독으로 정복한다
Part3. 독과 해독제의 뜨거운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