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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우유 마시면 소화 안 되는 이유

약물의 거울상이 부작용 일으키기도



영국 작가 루이스 캐럴(본명 찰스 루트위지 도지슨)이 1872년 발표한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1865년 발표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속편이다. 영국 옥스퍼드대의 평범한 수학교수였던 도지슨은 이 두 편의 소설로 불멸의 명성(필명 루이스 캐럴로서지만)을 얻었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는 어느 겨울날 앨리스가 새끼 고양이 키티와 장난을 치다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거울 속에 들어가기 직전 앨리스가 키티에게 한 앞의 말은 작가가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자연의 진실을 드러내고 있다. 오른손을 거울에 비추면 왼손으로 보이듯이 거울 속의 우유를 확대해보면 단백질 같은 분자의 구조도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거울에 비친 구조로 만들어진 우유는 먹어도 소화시킬 수 없다. 왜 그럴까.



생체 분자 대부분은 거울분자

1985년 러시아의 수학자 알렉세이 파지노프가 개발한 ‘테트리스’는 7가지 모양의 블록을 쌓아서 빈칸 없이 채워진 줄이 사라지면 점수가 올라가는 게임이다. 잘 보면 이 블록들의 모양이 재미있다. 블록은 정사각형 4개로 이뤄져 있는데, 정사각형 4개로 만들 수 있는 모든 모양이 바로 7가지다. 그런데 처음 테트리스를 하는 사람은 블록 모양이 5가지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 결과 틈을 제대로 채우지 못해 일찌감치 ‘게임 오버’가 된다. 이렇게 한참을 하다 보면 같은 모양인 줄 알았는데 뭔가가 다른 두 쌍을 발견한다.

즉 한 쌍은 ‘ㄱ’자 모양인데, 가로와 세로의 길이가 다르다. 하나는 세로가 긴 ‘ㄱ’이고 나머지는 가로가 긴 ‘ㄱ’이다. 즉 둘은 얼핏 같은 도형으로 보이지만 똑같지가 않다. 이 쌍 가운데 하나를 거울에 비추면 나머지 형태가 나온다.

즉 서로가 서로를 거울에 비추는 거울상인 셈이다. 이처럼 서로가 거울상이면서 똑같지는 않은 성질을 ‘키랄성(chirality)’라고 부른다. 또 다른 한 쌍은 앉아 있는 사람 형상으로 하나는 왼쪽, 하나는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다. 역시 서로 거울상이면서 겹치지 않는다.

테트리스는 2차원 평면 게임이지만 키랄성의 정의는 3차원 공간에서도 똑같다. 예를 들어 오른손과 왼손은 서로 거울상이면서도 겹치지 않으므로 키랄성을 띤다. 지면이 2차원이므로 테트리스에 빗대 거울 나라의 우유가 왜 소화되지 않는지 살펴보자.



우유 속의 단백질은 소화액 속의 펩신 같은 단백질분해효소로 분해해 아미노산으로 만들어 흡수한다. 단백질이 세로가 긴 ‘ㄱ’자 블록이라면 펩신은 세로가 긴 ‘ㄱ’자 홈이 파인 바닥 면이다. 블록(우유 단백질)이 홈(펩신)에 꼭 맞으면 효소작용으로 소화돼 쪼개진다.

그런데 거울 나라의 우유 단백질, 즉 가로가 긴 ‘ㄱ’자 블록은 어떻게 돌려도 홈에 맞지 않기 때문에 소화가 되지 않는다. 즉 소화효소 역시도 키랄성을 띠기 때문에 두 거울상 가운데 하나만을 인식할 수 있다. 사실 펩신 역시 단백질이다.

“단백질은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는데, 아미노산 20가지 가운데 19가지가 키랄성을 띠는 거울분자입니다. 사실 우리 몸을 이루는 분자의 많은 수가 거울분자예요.”

‘세계수준연구중심대학(WCU) 육성사업’의 일환으로 초빙돼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 부임한 미국 미네소타대 로마스 카츨라우스카스 교수는 생명체에 거울분자가 많은 이유는 생체분자 대부분이 탄소를 기반으로 한 구조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탄소 원자 하나는 다른 원자 4개와 결합할 수 있는데, 그 결합 방식이 정해져 있다. 즉 정사면체 중심에 탄소 원자가 있고 각 꼭짓점 방향에 다른 원자들이 놓여 있는 배치다. 그러다 보니 4곳에 결합된 원자나 원자 무리가 서로 다를 경우 거울분자 한 쌍이 만들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아미노산은 가운데 탄소에 수소(-H), 아미노기(-NH2), 카르복시기(-COOH), 작용기(-R)가 결합한다. -R로 표시하는 작용기는 20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 결과 아미노산도 20가지다. 글리신은 작용기가 수소인 아미노산으로, 가운데 탄소에 수소 두 개가 결합하므로 거울분자가 아니다. 작용기가 메틸기(-CH3)인 알라닌을 비롯해 그 밖의 아미노산은 겹치는 게 없기 때문에 거울분자다.



아미노산 거울분자 쌍은 각각 L형과 D형으로 표기하는데, 단백질의 성분으로 쓰이는 아미노산은 모두 L형이다. 따라서 L형 아미노산들이 일정한 순서로 결합돼 3차원 구조를 이루는 단백질은 D형 아미노산들이 똑같은 순서로 결합된 단백질과 서로 거울상일 것이다. 앨리스가 “어쩌면 거울 속의 우유는 먹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몰라”라고 한 말에는 이처럼엄격한 화학법칙이 숨어 있는 셈이다.

설탕보다 단 아스파탐, 거울 나라에선 쓴맛

거울분자 쌍은 분자를 이루는 원자가 배치된 상대적인 방향만 다를뿐 원자 사이의 거리나 각도는 똑같다. 따라서 분자량, 녹는점, 끓는점, 용해도 같은 물리적 성질도 똑같다. 따라서 이런 특징을 측정해도 둘을 구분할 수가 없다. 다만 편광이라는 특수한 빛에 대해 반응하는 성질은 반대인데, 이를 광학활성(optical activity)이라고 부른다. 거울분자를 광학이성질체라고도 부르는 이유다.

광학활성이란 한 방향으로 진동하는 빛, 즉 편광이 거울분자를 통과하고 나서 진동축이 특정 방향(예를 들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현상이다. 만일 그 분자의 거울상을 통과할 경우는 진동축이 반대방향(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간다. 이 현상은 1815년 프랑스의 과학자 장-밥티스트 비오가 발견했는데, 분자 개념이 없던 당시는 그 이유를 몰랐다. 편광이 시계방향으로 돌아가는 분자는 앞에 (+)표시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아가는 분자는 앞에 (-) 표시를 한다.



편광을 제외한 다른 물리적 방법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거울분자를 생명체는 쉽게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 단백질 소화의 예에서처럼 우리 몸속 분자 다수가 거울분자이기 때문이다. 냄새나 맛은 코나 혀에 있는 수용체 단백질이 냄새나 맛 분자와 결합해 신호를 보내 뇌가 그 패턴을 인식한 결과다. 수용체 단백질이 거울분자이므로 거울분자 쌍의 냄새나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카본(carvone)이란 냄새 분자가 대표적인 예다. 스피어민트라는 식물의 잎에서 추출한 방향유의 주성분인 (-)카본은 상쾌하면서 달콤한 박하와 비슷한 향이 난다. 스피어민트 껌의 향이다. 반면 캐러웨이라는 식물의 씨앗에서 추출한 방향유의 주성분인 (+)카본은 향신료 특유의 알싸한 향이다. 캐러웨이 씨앗을 뿌려 구운 호밀빵의 향을 생각하면 된다.

서로 거울상인 점만 다를 뿐인데, 그 향에서 이처럼 큰 차이가 난다. 감귤류의 주성분인 리모넨은 좀 더 미묘한 차이가 난다. 즉 (+)리모넨은 오렌지 향의 주성분이고 (-)리모넨은 레몬 향의 주성분이다. 얼핏 맡으면 둘의 차이를 잘 모르지만 천천히 음미해보면 좀 더 달콤한 (+)리모넨과 좀 더 새콤한 (-)리모넨의 차이가 드러난다.



물론 거울분자 사이에 냄새 차이가 없는 경우도 많다. 냄새 분자가 후각 수용체 단백질과 결합할 때 서로 거울상인 부분이 별로 관여하지 않아서일 것이다. 달콤한 장미향인 로즈 옥시드, 좀약 냄새가 나는 캠퍼, 치약에 널리 쓰이는 상쾌한 향의 멘톨이 그런 분자다.

흥미롭게도 꿀벌의 경우는 사람과 비슷한 패턴을 보이지만 사람이 구분하지 못하는 몇몇 거울분자 쌍을 구분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꿀벌은 박하의 잎 같은 자연에 존재하는 (-)멘톨과 사람이 합성한 (+)멘톨을 다른 냄새로 기억한다. 한편 다람쥐원숭이는 사람이 구분하지 못하는 펜촌이란 냄새 분자를 다르게 인식한다. 이처럼 사람의 냄새 식별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은 진화과정에서 시각에 점점 더 의존하면서 후각이 퇴화한 결과로 여겨진다.

미각도 비슷하다. 단백질을 이루는 L-아미노산은 별맛이 없는 반면, D-아미노산은 단맛이 난다. 흥미롭게도 L-아미노산 두 개(페닐알라닌과 아스파르트산)가 특이한 방식으로 결합된 구조인 아미노산계 인공감미료인 아스파탐은 설탕보다도 200배가 단 분자인 반면, 그 거울상 분자는 쓴맛이 난다고 한다. 앨리스가 거울 나라에서 아스파탐이 들어 있는 음료를 마셨다간 바로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거울분자 한쪽만 약효 보이기도



많은 약물의 작용 메커니즘을 보면 인체의 특정 단백질에 달라붙어 기능을 활성화하거나 차단해 약효를 낸다. 이 경우 약물 가운데 하나의 거울분자만이 약효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단백질 역시 거울분자이기 때문이다. 보통 화학합성 방법으로는 거울분자 쌍이 똑같은 양이 만들어지는데, 이처럼 두 거울분자가 섞여 있는 상태를 라세믹(racemic)이라고 부른다. 많은 약물이 라세믹 상태로 판매되고 있다. 물리적 특성이 같은 둘을 분리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약물에 섞여 있는 거울상 분자가 약효가 약하거나 없으면 좋은데, 문제는 엉뚱한 부작용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점이다.



어떤 약물의 거울상 분자는 구조가 원래 표적단백질에 달라붙게 설계된 약물과 다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다른 단백질에 붙을 수 있다. 1960년대 초 1만여 명의 기형아 출산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던 입덧 방지제 탈리도마이드가 이런 대표적인 예다. 탈리도마이드는 거울분자 가운데 하나만이 약효를 보인다. 그런데 부작용을 일으키는 건 그 분자의 거울상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 5월 26일자‘미국 국립과학원회보(PNAS)’에는 탈리도마이드가 기형아를 만드는 메커니즘을 규명한 논문이 실렸다. 이에 따르면 탈리도마이드의 거울상 분자는 태아의 사지에서 혈관생성을 촉진하는 단백질에 달라붙어 그 기능을 억제한다. 그 결과 혈관이 생기지 않아 손가락, 발가락이 없는 기형아가 태어난다.

1962년 판매가 금지된 탈리도마이드는 1998년 한센병 합병증 치료제로 사용이 허가됐다. 물론 임산부에만 부작용이 있다지만 혹시 모르므로, 탈리도마이드를 만들 때 거울분자를 완벽히 제거하는 방법은 없을까. 실제로 화학자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거울분자 쌍 가운데 하나만 합성하거나 분리하는 방법을 개발해왔다.

그런데 탈리도마이드는 이런 방법도 소용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보통 거울분자는 그 상태로 존재하지만 탈리도마이드는 사람의 혈액 내에서 두 거울분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즉 100% (+)탈리도마이드 약물을 주사해도 시간이 지
나 혈액 시료를 채취해 분석해보면 거의 1:1로 (+)와 (-)가 공존하고 있다는 것. 결국 탈리도마이드 같은 약물의 경우 거울상 분자를 없애는 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임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은 무조건 피해야 한다.

이 밖에도 약물의 거울상 분자가 다른 약효를 보이거나 부작용이 있는 예가 여럿 있다. 결핵치료제인 에탐부톨의 거울상 분자는 실명을 일으킬 수 있고, 관절염 진통제인 나프록센의 거울상 분자는 간 독성이 있다. L형 메트로판은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인 반면 D형은 기침 억제 작용이 있고, D형 암페타민은 중추신경을 활성화하는 반면 L형은 말초신경을 자극한다.

이처럼 거울분자의 작용이 다른 경우가 많기 때문에 최근에는 약효가 있는 거울분자만 분리해 판매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LG생명과학 연구개발본부 이태희 박사는 “기존의 약물이 라세믹일 경우 거울분자 하나만 있는 약물을 만들면 준(準)신약으로 인정한다”며 “외국에는 이런 약물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회사들이 꽤 있다”고 말했다.

‘지르텍’이란 상표명으로 익숙한 알레르기약 세티리진의 경우 라세믹 상태인데, 벨기에의 제약회사 UCB는 2001년 약물활성이 있는 L형만으로 된 ‘지잘’이라는 제품을 출시했다. 물론 거울분자 하나만으로 이뤄진 약물은 대체로 더 비싸다. 로마스 카츨라우스카스 교수는 “최근 생체 촉매인 효소를 이용해 거울분자 가운데 하나만 합성하는 방법이 연구되고 있다”며 “이 방법은 거울분자 쌍을 합성한 뒤 분리하는 과정이 생략되므로 더 효율적이고 친환경적”이라고 말했다. 화학자들이 생명체의 도구를 빌려 좀 더 정밀한 거울분자의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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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D-아미노산의 세계

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강석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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