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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D-아미노산의 세계

천연 항생제 상당수의 핵심골격



메탄과 수소, 암모니아 혼합물에 전기 스파크를 일으키면 아미노산이 합성됨을 증명한 1953년 미국 생화학자 스탠리 밀러의 실험은 생명의 자연발생설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연구 결과로 인용돼 왔다. 아미노산은 생명 현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대표적인 분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단백질은 20가지 아미노산으로 이뤄져 있다. 이 20가지 아미노산 중 글리신을 제외한 19개의 아미노산이 키랄성, 즉 왼손 형태(L-아미노산)와 오른손 형태(D-아미노산)의 두 가지 거울상 이성질체 분자 구조를 갖고 있다.

생명 현상에서 불가사의한 일 가운데 하나는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이 모두 L-아미노산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보통 아미노산이라고 말하면 L-아미노산을 의미했다. 실제로 화학이나 생명과학 분야의 연구를 봐도 자연스럽게 L-아미노산이 연구대상이었다. 한편 D-아미노산은 생명 현상과 관련이 없다는 선입관 속에 간과돼 왔다. 하지만 이러한 선입관을 깨려는 선구자적인 연구자들의 지속적인 노력 덕분에 베일에 가려 있던 D-아미노산의 세계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박테리아 세포벽 뚫는 페니실린의 전략

20세기 중반까지 과학자들은 D-아미노산이 L-당(sugar)과 함께 비자연적인, 즉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성질체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생명체에 존재하는 포도당이나 과당은 모두 D-당이다. 그런데 1943년에 최초로 D-아미노산이 생명체 내에서 생리적 활성을 갖고 있음이 밝혀졌다. 미국의 미생물학자 에스몬드 스넬은 박테리아인 스트렙토코코스 페칼리스(Streptococcus faecalis )와 락토바실러스 카제이(Lactobacillus casei )가 증식할 때 아미노산의 하나인 D-알라닌이 비타민 B6를 대신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비타민 B6는 박테리아의 증식을 촉진한다.

그 뒤 연구자들은 모든 박테리아의 세포벽에서 발견되는 펩티도글리칸이라는 구조를 규명하는 과정에서 D-알라닌과 D-글루탐산(또는 D-글루타민)이 펩티도글리칸의 주요 성분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했다. 펩티도글리칸은 당 분자와 아미노산 분자가 규칙적으로 배열돼 그물망 구조를 이뤄 세포벽을 단단하게 해주는 고분자다. 펩티도글리칸 덕분에 박테리아는 이온 농도가 낮은 환경에 놓여 삼투압으로 물을 흡수해도 터지지 않고 버틸 수 있다.

그렇다면 펩티도글리칸에 L-아미노산뿐 아니라 D-아미노산도 쓰인 이유는 무엇일까. 아미노산은 펩티드결합으로 연결돼 사슬이나 단백질을 이룬다. 따라서 생명체가 다른 생명체를 공격할 때는 펩티드 결합을 파괴하는 효소를 분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런 효소는 생명체에 흔한 L-아미노산 사이의 펩티드 결합을 끊을 수 있지만, 그 거울상인 D-아미노산이 끼어 있는 펩티드 결합은 끊지 못한다. 결국 박테리아가 세포벽에 D-아미노산을 끌어들인 이유는 외부에서 오는 이런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펩티드결합
한 아미노산의 아미노기(-NH2)와 다른 아미노산의 카르복시기(-COOH) 사이에 물분자(H2O)가 빠져나면서 생기는 결합(-NHCO-)이다.



미생물뿐 아니라 동물에서도 D-아미노산이 발견됐다. 1950년에 밀크위드 벅(milkweed bug)이라는 긴노린재과 곤충의 혈액에 D-알라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뒤 포유류에서도 D-아스파트산과 D-세린이 발견됐으나 아직 그 기능이 완벽히 규명되지는 않은 상태다. 이 분야의 연구가 미흡하기는 하나 현재까지 밝혀진 D-아미노산의 생명체 내 기능은 다음과 같다.

먼저 D-아미노산은 박테리아의 세포벽에 있는 펩티도글리칸의 성분이다. 펩티도글리칸의 주요 성분 중 D-알라닌과 D-글루탐산(또는 D-글루타민)이 있는데, 이들은 라세마제(racemase)라는 효소가 L-아미노산을 변형시켜 만들어낸 분자다.

D-아미노산은 미생물이 생산하는 항생제의 주성분으로도 쓰인다. 1928년 영국의 미생물학자 알렉산더 플레밍이 푸른곰팡이(Penicillium )에서 페니실린을 발견한 이래 임상에서 쓰이는 천연 항생제의 상당수가 아미노산을 기초로 한 펩티드계 분자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펩티드계 항생물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 가운데 D-아미노산이 포함된 경우가 많다. 실제로 페니실린 구조에도 아미노산 D-발린에서 비롯한 부분이 포함돼 있다.



페니실린은 구조가 D-아미노산과 비슷하기 때문에 미생물이 D-아미노산으로 세포벽의 펩티도글리칸을 만드는 과정에서 촉매로 작용하는 효소에 달라붙어 그 작용을 방해한다. 효소가 페니실린을 D-아미노산으로 착각한 결과 미생물은 세포벽이 부실해져 죽는다. 페니실린이 항생제로 작용하는 이유다. 결국 L-아미노산의 펩티드 결합을 끊는 효소를 피하기 위해 미생물이 진화시킨 D-아미노산 세포벽 전략에 대한 대응책이 페니실린이다. 생명체의 진화는 물고 물리는 치열한 전략게임인 셈이다.

 


신호 전달하거나 환경 변화에 적응시키거나

D-아미노산은 화학적 신호를 전달하는 물질로 쓰이기도 한다. D-세린은 포유류의 뇌에서 신경 전달물질로 작용하며, 인간의 요로에 감염하는 대장균의 독성 인자의 발현을 조절한다. D-아스파트산은 신경 내분비 세포의 호르몬 분비를 조절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D-아미노산은 믹소 박테리아(Myxococcus xanthus )의 포자 형성을 유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예가 밝혀지면서 생명체들이 생체에 다량으로 존재하는 L-아미노산으로부터 D-아미노산을 만들어 화학적 신호로 이용하는 진화 과정을 발전시켰음을 짐작할 수 있다.







최근 D-아미노산의 새로운 면모가 속속 드러나고 있다. 지금까지는 D-알라닌과 D-글루탐산(또는 D-글루타민)만이 박테리아 세포벽인 펩티도글리칸의 구성 성분이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필자가 박사후 과정일 때 참여한, 미국 하버드 의대 연구진이 ‘사이언스’ 9월 18일자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콜레라를 일으키는 병원균인 비브리오 콜레리(Vibrio cholerae )는 D-메티오닌과 D-류신도 다량으로 만든다.

D-메티오닌과 D-류신은 비브리오 박테리아의 개체 수가 많아져 숫자가 더 이상 늘지 않는 정체기에 이르면 농도가 높아진다. 분석 결과 세포벽이 정체기의 환경 조건에 맞게 적응하도록 변화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D-메티오닌과 D-류신의 작용 메커니즘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이 두 D-아미노산이 정체기에서 펩티도글리칸의 합성을 억제하는 신호물질로 작용한다. 실제로 D-아미노산을 만드는 효소가 망가진 박테리아는 정체기에 들어서도 펩티도글리칸을 계속 만들기 때문에 세포벽이 지나치게 두꺼워진다.




또 D-메티오닌은 펩티도글리칸의 구성 성분 중 본래 D-알라닌이 놓일 위치에 대신 들어가 펩티도글리칸의 강도와 구조를 변화시키기도 한다. 비브리오뿐 아니라 여러 종류의 박테리아에서도 D-알라닌과 D-글루탐산 외에 다른 D-아미노산이 다량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앞으로 세포벽 합성 조절 외에 D-아미노산의 새로운 역할이 규명될 전망이다.

이러한 최근 연구 결과를 보면 D-아미노산 역시 생명 현상에서 중요한 생체물질로 작용하고 있음이 점점 확실해지고 있다. D-아미노산에 대한 새로운 연구가 거듭될수록 기존에 잘 알려진 L-아미노산의 세상 외에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그 반대의 거울상 세상이 드러날 것이다. D-아미노산은 소설 ‘거울 나라의 앨리스’처럼 예상치 못했던 흥미진진한 생명현상을 보여주는 열쇠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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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오동찬 서울대 제약학과 교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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