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진 속 표본은 모두 자연사박물관에서 제공함.
All specimens included in images are derived from Natural History Facilities
2011년, 뉴욕 사진전에 무명의 남성이 기묘한 작품을 들고 나타났다.
‘생명과학’이라는 큰 주제뿐, 제목은 모두 ‘무제’다. 사진 속에는 핏빛 심장, 뇌, 수술 도구 등이 17세기에 유행했던 정물화처럼 놓여있다. 역겨운 듯하면서 눈을 뗄 수 없다.
뉴욕 사진전에서 ‘생명과학’ 시리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그 후 샌디에고, 런던, 파리, 예루살렘 등 세계 곳곳의 미술관을 돌았다.
조만간 영국 왕립사진협회, 네덜란드 미술관에서도 선보일 예정이다.
이 열풍의 주인공은 이스라엘의 신경과학자 엘란 길랏 박사다. 25년 넘게 알버트아인슈타인 의대 등에서 뇌전증(간질) 등을 연구하다가 환갑을 앞둔 어느 날 사진작가에 도전했다. 그는 “평생 연구 대상으로만 다루던 시료들을 예술로 바꿔보고 싶었다”며, “작품명들이 ‘무제’인 이유는 예술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논문과 학회를 통해 언제나 자기주장을 하던 신경과학자가 입이 무거운 사진작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길랏 박사의 이야기를 e메일 인터뷰로 들어봤다.


길랏 박사는 “과학과 예술은 혁신과 자유가 핵심이라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며,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이 공통점을 잘 보여주는데, 나도 양쪽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말했다. 동료 과학자 중에서도 진지하게 예술을 즐기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한편 길랏 박사는 과학과 예술의 차이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과학은 직설적이고 편견이 없다. “검증된 실험 방법과 정확한 통계를 이용해서 모든 이를 객관적으로 설득해야 연구를 인정받는다”고 표현했다. 반면에 예술 작품은 백인백색, 아무나 마음대로 해석해도 된다. ‘생명과학’ 시리즈를 보고 역겨움, 호기심, 충격, 야릇함 등 무엇을 느끼든 그건 순전히 보는 이의 몫이다.


이런 연륜이 녹아들어 간 것일까. 사진 속에 생명을 살리는 수술 도구와 시체 해부용 부검 도구가 나란히 있다. 역설적인 구조의 의미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지만, 길랏 박사는 구체적인 작품 이름이나 설명을 주지 않는다. 보는 이가 자유롭게 상상해서 자신만의 답을 찾기 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