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십 년전 미국에서 트라이던트라는 잠수함이 침몰한 적이 있었다. 해군을 비롯한 전문가들이 나섰지만 원인은 끝내 수수께끼로 남았다. 지금 과학자들은 당시의 침몰 원인을 ‘파도’라고 추측하고 있다. 파도라고 하면 보통 해안가에서 보이는 수면 위의 파도가 떠오른다. 그런데 사실 깊은 바다 속에서도 파도가 치고 있다.
바닷물은 깊을수록 밀도가 커진다. 밀도가 큰 아래쪽 물이 올라오거나 밀도가 작은 위쪽 물이 내려가면 원래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이 생기는데, 이것이 바다 내부에 파도를 만든다. 이를 ‘내부파’(internal wave)라고 부른다. 배가 수면을 흔들어 그 움직임이 아래로 전달되거나, 잔잔히 흐르던 물이 해령 같은 해저지형을 만나 부딪쳐 흔들리면 내부파가 생긴다. 내부파가 지나가다가 큰 규모의 해류를 만나면 부서지기도 한다. 마치 파도가 해변에 도달한 다음 부서지는 것처럼 말이다.
침몰한 잠수함은 잠수할 수 있는 한계 깊이 근처까지 내려갔다고 한다. 그때 갑자기 아래쪽으로 움직이고 있던 내부파를 만났다면 그 힘에 이끌려 더 내려가 순식간에 한계 압력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래서 침몰했을 수 있다는 게 과학자들의 설명이다.
한계 깊이까지 내려가지 않은 잠수함도 내부파를 경계해야 하기는 마찬가지다. 잠수함은 음파를 쏜 다음 부딪혀 돌아오는 지점을 감지해 적군이나 장애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낸다. 이때 음파가 가다가 내부파에 휩쓸려 구부러지면 정확한 지점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이다.
내부파는 해안가의 파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서서히 움직인다. 깊은 바다 속에서 물의 밀도 차이는 공기와 수면의 밀도 차이에 비해 아주 작기 때문이다. 내부파의 높이는 보통 수~수십m. 지금까지 알려진 내부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은 남중국해에서 중국 쪽으로 진행하는 내부파로, 높이만 해도 100m가 넘는다.
5년 전 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김구 교수팀은 동해에서 내부파를 처음 발견했다. 연구팀은 동해안에서 10~13km 떨어진 바다에 최고 130m 깊이까지 수온, 압력, 염분, 해류 등을 측정하는 센서가 달린 장비를 여러 개 띄웠다. 여기서 얻은 데이터가 시간에 따라 변하는 양상을 추적하면 내부파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온이 내려갔다 올라갔다면 그 지점에서 바닷물이 올라왔다 내려갔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변화가 다음 지점에서도 같은 양상으로 나타나면 위아래로 움직이는 내부파가 이동했다는 증거가 된다.
바다 속에서 물이 출렁이면 그 영향이 수면에도 나타난다. 내부파의 움직임에 따라 수면에 여러 겹의 띠가 생긴다. 주름처럼 말이다. 따라서 인공위성에서 수면의 거칠기를 정밀하게 측정한 데이터를 분석해도 내부파를 찾아낼 수 있다.
이같은 방법으로 연구팀은 동해에 높이가 15m에 달하는 내부파가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6층짜리 아파트만한 높이다. 김 교수는 “동해 내부파는 한반도 쪽으로 들어온다. 이 흐름이 어디서 어떻게 처음 만들어졌는지 알아내는 게 다음 목표”라고 말한다.
남해나 서해의 경우 큰 섬 주변에 내부파가 생기기도 한다. 섬이 바닷물을 흔들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배나 잠수함이 항해할 때 영향을 주기 때문에 내부파에 대한 정보는 국방에 필수입니다. 규모가 큰 내부파가 해안에 와 부딪치면 산업시설이 파괴될 우려도 있어요. 내부파가 플랑크톤 같은 해양생물을 여기저기 옮겨놓으면 먹이가 고루 분포돼 생태계에 도움이 됩니다. 내부파 덕에 물고기가 한곳에 모이면 그 자체가 바로 좋은 어장이죠.”
김 교수가 깊은 바닷물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다. 상대를 속속들이 알면 제대로 대처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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