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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공포는 바로 이 맛이야

무서워서 즐겁다

무서워서 즐겁다. 공포는 바로 이 맛이야


사람이 손가락만하게 보이는 아찔한 높이에서 줄 하나에 달랑 매달린 채 눈을 질끈 감고 뛰어내린다. 구불구불한 수백m 트랙을 단 몇 분만에 질주하는 청룡열차를 타고 또 탄다. 장난이 아니다. 진짜 무섭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마냥 즐겁다. 이런 사람들 덕에 여름마다 공포영화가 개봉되고 휴일마다 놀이공원이 북새통이다.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별 것 아닌 일에도 사시나무 떨 듯 벌벌 떤다. 당장 오늘이라도 테러를 당할 것 같아 걱정하고 발병 확률이 턱없이 낮은 질병에 걸릴까봐 노심초사한다. 이런 사람들 덕에 돈을 버는 이도 생겼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우리 주변에는 공포가 빚어낸 현상이 곳곳에 숨어있다. 공포를 즐기는 사람과 그저 무서워하는 사람은 어떻게 다를까. 공포문화의 속내를 들여다보자.

이 공포와 저 공포는 다르다

개가 영화 ‘링’을 보면서 무서워할까? 아닐 거다. 하지만 롤러코스터를 타면 개도 무섭다고 느낄지 모른다. 공포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공포는 상당히 인지적인 감정이다. 반면 놀이기구를 타면서 느끼는 공포는 생리적이다. 물론 놀이기구가 갑자기 고장 나면 어쩌나 하는 건 인지적인 공포지만.

이 두 가지 공포반응은 뇌에서 다른 경로를 거쳐 일어난다. 예를 들어 길을 가는데 발 앞에 갑자기 뱀이 기어나왔다고 상상해보자. 우리는 그게 뭔지 알아차리기도 전에 일단 놀란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눈동자가 커지며 몸이 움츠러든다. 이게 바로 편도체가 관장하는 1차 공포반응으로 생리적, 무의식적이다. 그런 다음 튀어나온 것에 대한 시각정보가 대뇌피질로 전달돼 우리는 뱀이란 사실을 인식한다. 그제서야 편도체는 뱀이 물지도 모르기 때문에 무섭다는 걸 알게 된다. 이게 2차 공포반응으로 인지적, 의식적이다. 실제로 1차와 2차 반응 간의 시간은 매우 짧다.

그런데 뱀이 장난감이었다면 어떨까. 생리적 공포반응까지만 나타나고 인지적 반응은 나타나지 않는다. 순간적으로 놀라긴 하지만 결국 ‘괜히 놀랬잖아’하고 오히려 웃음이 나오는 게 바로 이 때문이다.

“공포영화도 비슷한 예라고 봅니다. 무서운 장면에는 꼭 갑작스런 큰 소리나 자극적인 영상 변화가 따라다니죠? 관객의 1차 공포반응을 최대한 크게 하기 위한 장치에요. 공포영화를 보면 몸의 생리적 변화는 나타나지만 이미 영화란 걸 알고 있으니 의식적 공포반응은 약해지는 거죠.”

한국과학기술원(KAIST) 생명과학과 김대수 교수의 설명이다. 결국 영화제작사나 놀이공원에서는 1차 공포반응을 이용해 돈을 버는 셈이다.

‘스릴’은 1차 공포반응의 일종이다. 번지점프나 스카이다이빙을 하는 사람들은 무의식적 공포반응을 즐기는 것이다. 김 교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스릴을 추구하는 현상은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고등한 뇌 기능”이라며 “아마도 높은 차원의 보상심리가 작용하고 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보상심리가 클 때 활성화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을 분비하는 신경계가 이런 성격과 관련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영화 '스크림'의 공포캐릭터가 우수꽝스러운 표정으로 변신한 모습


그래, 바로 이 맛이야!

공포를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공포에 빠져 사는 마니아들도 있다. 공포영화만 골라 보거나 흉가체험을 하러 다니는 동호회가 있는가 하면 무서운 이미지 파일을 공유하는 인터넷 카페, 괴기스럽게 생긴 인형이나 액세서리를 파는 온라인 숍도 생겼다. 그야말로 공포에 ‘중독’된 사람들이다. 도대체 이들의 심리는 뭘까.

자동차 접촉사고가 나거나 상대방이 약속 시간을 어겨 불편을 겪었던 경험이 종종 있을 것이다. 살다보면 불안하거나 걱정되거나 스트레스 받는 일들이 많지만, 일일이 다 풀기란 쉽지 않다. 그러면 이런 기억들은 마음속에 쌓인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잔여긴장’이라고 한다. 잔여긴장을 해소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다른 더 큰 긴장을 조성하는 것. 큰 긴장을 없애버리면 잔여긴장도 함께 사라진다. 각각 원인이 다른 긴장이지만 감정은 이걸 구분할만큼 그다지 이성적이지 못하다. 공포영화를 보고 나서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이유다. 공포마니아들은 이런 기분을 자주 만끽하고 싶어하는 게 아닐까.

공포는 잔여긴장뿐 아니라 심지어 고통도 감소시킨다. 이 역시 편도체가 관장하는 무의식적 공포반응이다. 영화를 보다 공포가 최고조에 달하는 장면에서는 옆자리 친구가 꼬집어도 아픈 줄 모른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도 공포를 느낄 때 고통이 줄어들게 진화해 왔다. 원시인이 곰을 만나 걸음아 날 살려라 도망가다 가시나무에 찔렸다고 상상해보라. 아파서 머뭇거리고 있다간 곰에게 잡아먹히기 십상이다. 공포영화에서 귀신을 만난 주인공이 여기저기 베고 찔려도 아랑곳 않고 도망가기 바쁜 것도 같은 상황이다.

극도로 무서운 상황에서는 뇌에서 마약 같은 역할을 하는 신경전달물질이 나와 고통을 덜 느끼게 한다. 엔돌핀이 대표적인 예. 마라톤 선수가 막바지 코스를 달릴 때 분비되는 물질도 바로 엔돌핀이다. 그 덕에 고통스러운 한계 상황을 극복하고 완주할 수 있다. 공포마니아들은 이 같은 신경전달물질의 ‘맛’을 즐기는 것이다.

진화의 역사에서 공포를 느끼지 않는 동물은 도태됐을 게 분명하다. 그런데 왜 유독 인간은 공포를 즐기는 부류가 생겼을까. 고려대 심리학과 최준식 교수는 생물학적 관점에서 그 이유를 설명한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동물이나 인간은 아무래도 멸종한 종보다 공포를 더 많이 느낄 겁니다. 그런데 워낙 겁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끼리 모여 살다보니 상대적으로 좀 덜 조심스러운 인간이 어쩌다 이익을 얻는 경우도 있었겠죠. 그래서 공포에 대한 반응에 차이가 생기지 않았을까요?”
 

인터넷 '엽기공포샵'에서 판매하는 인형들. 이 사이트를 운영하는 이병석씨는


나 지금 떨고 있니?

사람들은 이 같은 공포반응을 문화산업, 건축, 마케팅, 정치를 비롯한 여러 분야에 활용하고 있다. 공포영화나 놀이공원이 공포반응을 이용한 문화산업의 대표적인 예.

한성대 미디어디자인컨텐츠학부 지상현 교수는 공포반응을 건축에 활용한 사례로 베란다를 꼽는다.

“사람들은 전망이 좋은 집을 고르죠? 전망이라는 건 암묵적으로 자기 영향력이 미칠 수 있는 영역을 의미해요. 전망이 있어야 자신을 해치기 전에 침입자가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기도 하구요. 전망이 없으면 불안해지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아파트에서 베란다를 없애면 마루가 넓어져 좋을지 몰라도 그다지 편안한 느낌을 주진 못하죠.”

영화 ‘올드보이’에서 대수(최민식)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를 15년 동안 가둔 우진(유지태)이 사는 아파트에도 베란다가 없다. 우진의 불안한 심경을 보여주는 좋은 장치다.

기업은 제품을 팔기 위해 공포반응을 자주 활용한다. 자동차 부품 회사는 그 부품이 잘못되면 큰 사고가 날 위험이 있으니 자사 부품을 꼭 구입해야 한다며 소비자를 설득한다. 약 광고도 마찬가지다. 관절염 치료제 광고 속 모델이 걷다가 갑자기 무릎을 움켜지고 쓰러져 고통스러워하는 걸 보고 있으면 소비자는 ‘나도 저 지경까지 되기 전에 관절염 치료제를 사둬야겠다’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정치가도 공포심리를 자극해 사람들을 ‘다스린다’. 불과 십수년 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공산당이 쳐들어오기 때문’이라면 정치가가 당장 불필요하거나 불편을 감수해야 할 정책을 시행해도 ‘용서’가 되지 않았나. 9.11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테러범들이 미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며 공항 검색대에서 직원들이 여행객들의 가방을 활짝 열어젖히는 걸 허용하고 있다.

옛날에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전쟁에 참여하는 당사자들만 공포를 느끼면 됐지만, 이제는 다르다. 세계 어느 곳에서 전쟁이 일어났고 그 상황이 얼마나 참혹한지 실시간으로 보도된다. 뉴스를 본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포에 휩싸인다. 10대 청소년 한두명이 지나가는 사람을 이유 없이 폭행한 사건이 일어난 날. ‘무서운 10대들’이란 제목의 뉴스를 듣고 사람들은 주변 청소년들이 혹시 자신을 해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을 느낀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 사회학과 배리 글래스너 교수는 자신이 쓴 ‘공포의 문화’라는 책에서 어처구니없이 과장된 걱정거리들을 조목조목 짚어내고 있다. 그 중 하나로 글래스너 교수는 미국인의 건강을 다룬 기사들에서 인용한 통계자료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1996년 한 해 동안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USA투데이’에 실린 기사를 검토한 결과 미국인 가운데 심장병 환자는 5900만명, 골다공증 300만명, 암 300만명이었다고 한다. 그 밖에 다른 증상을 겪고 있다는 사람들의 수를 종합했더니 5억4300만명이 병에 걸린 상태라는 결론이 나왔다고. 당시 미국 인구가 2억6500만명이었다니 가히 놀랄 만한 숫자다. 한 명이 2~3가지 병을 앓고 있는 셈이니, 건강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도 모르는 사이 자신이 무슨 병에 걸리지 않았나 싶어 두려워질 것 같다.

이처럼 현대인들은 갖가지 사회문화적 공포에 무방비로 노출돼 있다. 그러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이들이 진짜 공포자극이라고 학습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심해지면 병, 즉 공포증으로 나타난다는 것. 예를 들어 특히 감전사고가 많은 시기에는 감전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어날 수 있다.

공포증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아주대 심리학과 김은정 교수는 “현대에 와서 공포증 종류가 증가한 건 사실”이라며 “미디어가 발달하고 각종 불안요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아주대 심리상담센터의 경우 공포증 때문에 찾아오는 사람이 1주일에 5명꼴이라고 한다. 기존 환자까지 합치면 이곳에서만도 수십명이 공포증으로 상담받고 있다.
 

누가누가 더 튀나. 미국 뉴욕에서 할로윈 축제에 참여한 사람들이 이색 의상을 선보이고 있다. 어린이들이 도깨비나 마녀 분장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과자를 얻어가는 활로윈 축제는 공포를 소재로 한 대표적인 서양 문화다.


공포도 취사선택하라

어린아이의 경우 편도체가 공포자극을 인식하는 능력이 덜 발달돼 있다. 그래서 어른보다 겁이 없다. 아이들은 자라는 동안 부모에게서, 사회문화 속에서 어떤 게 무서운 건지 배우며 점차 극복해간다.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 겁을 내면서도 자꾸 읽어달라고 하는 것도 공포자극을 학습하고 극복하는 과정이다. 그러다 극복하지 못한 공포자극이 생기면 그게 바로 공포증으로 나타난다. 성인이 되서도 이런 과정은 계속된다.

따라서 공포자극의 학습과 극복은 인간이 사회에 적응하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나치게 과장되거나 자극적이지 않은 공포문화는 발달이나 교육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공포영화 속 주인공이 공포를 이겨내는 걸 보고 배운다는 얘기다.

주위를 둘러보라. 공포는 언제나 존재한다. 그 중에서 배우고 이겨내야 할 공포와 과장되거나 불필요한 공포를 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공포도 취사선택이 필요하다.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돌아온 귀곡산장'의 중인공 이홍렬(왼쪽)과 강성범. 공포분위기 속 코믹한 대사가 감칠맛난다. 여름이면 이처럼 공포를 소재로 한 문화산업이 성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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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임소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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