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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요기사] 플라세보가 백신 효과도 늘린다? 플라세보의 과학

    ▲Shutterstock

     

    플라세보(Placebo)는 라틴어로 ‘내가 기쁨을 줄 것이다(I Shall Please)’라는 뜻이다. 지금은 약효가 없는 가짜 약을 진짜 약으로 믿고 복용했을 때 환자의 병세가 호전되는 현상, 즉 긍정적 믿음이 실제 치료로 이어지는 현상을 의미한다. 플라세보는 진짜일까, 착각일까. 최근 의학 연구들은 플라세보를 우연이 아닌 새 치료법으로 주목하고 있다.

     

    ▲National Museum of the Royal New Zealand Navy
    제2차 세계대전 중 미군에게 지급된 모르핀 주사기. 모르핀은 엔도르핀 수용기에 작용해 통각의 처리를 정지시켜 강력한 진통 효과를 일으킨다.

     

    1940년대, 제2차 세계대전이 치열해지면서 진통제가 부족해지자 군의관들은 부상병에게 식염수 등을 대신 투여했다. 진통 효과는 없지만 심리적 안정을 주려는 목적이었는데, 병사들은 실제로 통증이 나아졌다고 느꼈다. 플라세보 효과의 대표적 예시다.


    플라세보 효과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3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유럽에서는 독일 출신의 의사 프란츠 안톤 메스머가 제시한 새로운 치료법이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사람 몸에 흐르는 유체를 자기력으로 조절하면 병이 낫는다는 치료법을 제시했다. 메스머의 치료법은 인기를 끌었지만 오스트리아 빈, 프랑스 파리 등 메스머가 활동했던 지역의 의학계는 그의 이론을 비판했고, 1784년에는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의 벤저민 프랭클린, 앙투안 라부아지에 등이 맹검법(블라인드 테스트)으로 조사에 나섰다. 


    그들은 환자에게 안대를 씌우고 자성이 있는 물이라며 거짓으로 말하고 마시게 한 뒤 자기력으로 유체를 조절하는 척했다. 환자들은 치료 효과가 있다고 보고했다. 이를 통해 메스머의 자성 치료법은 환자의 자기 암시를 유도한 데 불과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메스머는 몰락했지만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보고서에서 “메스머의 치료법이 환자들의 기분을 좋게 한다”고 짚었다.


    플라세보 효과가 본격적인 연구 주제가 된 것은 그로부터 약 170년이 지나서였다. 1955년, 헨리 비처 미국 하버드의대 마취과 교수는 15편의 임상 논문을 분석해 다양한 질병에서, 환자들이 가짜 약을 복용하고도 증상이 호전되는 반응을 보였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doi: 10.1001/jama.1955.02960340022006 가짜 약이 효과를 내는 심리적 요인에 주목한 비처의 연구에 이어 21세기 과학은 플라세보 효과가 어떻게 동작하는지, 뇌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플라세보 상태의 뇌
    플라세보 효과에는 뇌의 특정 영역들이 관여한다. ‘이 약이 효과가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보상 회로를 활성화하고 통증 억제 시스템을 작동하기 때문이다.
    ▲Shutterstock
     
    측좌핵  포상과 기대를 처리하는 측좌핵이 활성화되며 신경전달물질 도파민 분비가 증가한다.
    대상피질, 섬엽, 시상  내인성 오피오이드 시스템도 활성화돼 척수로 내려가는 하행성 통증 억제 경로가 활성화된다. 그 결과 통증을 지각하는 영역인 대상피질, 섬엽, 시상의 활동이 전반적으로 감소한다.
    편도체  공포, 불안 등 통증을 느낄 때 활성화되는 편도체는 플라세보 효과로 불안이 줄어들고 통증 또한 실제로 억제되며 활동이 감소한다.

     

    플라세보가 줄이는 고통, 엔도르핀 분비로 검증


    2005년에는 플라세보 효과가 뇌에서 일어나는 생화학 반응이라는 사실이 처음 입증됐다. 존 카 주비에타 미국 미시간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이끈 연구팀이 플라세보 효과가 내인성 오피오이드 시스템의 작동을 유발한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내인성 오피오이드 시스템이란 뇌가 스스로 만들어 쓰는 진통 시스템을 뜻한다. 엔도르핀, 엔케팔린 같은 ‘천연 진통제’ 물질이 뇌 속 μ-오피오이드 수용체에 붙어 통증 신호를 약화시키고, 통증의 불쾌감을 감소시킨다. 연구팀은 건강한 청년 14명의 턱에 식염수를 주사해 일부러 통증을 유발한 뒤, 가짜 약과 진짜 약을 주고 양전자방출 단층 촬영(PET) 기법으로 뇌를 살폈다. PET 영상 기법은 특정 신경전달물질이 수용체에 실제로 결합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데 활용된다. 그 결과, 연구팀은 플라세보 효과가 엔도르핀을 실제로 분비시킨다는 것을 확인했다. doi: 10.1523/JNEUROSCI.3458-05.2005


    플라세보 효과가 통증을 악화시키는 요인은 줄이고, 완화를 돕는 요인은 키우는 방향으로 작동한다는 점도 확인됐다. 이 연구에 참여한 토르 웨거 당시 미국 콜롬비아대 정신의학과 교수가 2년 뒤인 2007년, 플라세보는 통증이 있기 전과 통증이 가해지는 순간 오피오이드 시스템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조절한다는 사실을 추가로 입증했기 때문이다. doi: 10.1073pnas.0702413104 플라세보는 통증을 예상할 때는 진통 시스템의 준비 반응을 줄이고, 통증이 있을 때는 오피오이드 시스템을 활성화했다. 이는 플라세보 효과가 통증이 있을 때 진통 시스템을 동작하게 할뿐만 아니라 통증이 오기 전에도 뇌의 긴장을 줄여 통증에 대비했단 뜻이다.

     

    플라세보 효과,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몸이 아프면 플라세보 효과의 도움이라도 받으면서 얼른 낫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떻게 하면 될까. 2015년, 토르 웨거 당시 미국 콜로라도대 정신의학 및 뇌과학과 교수팀은 임상 환경의 여러 외부적 맥락과 내부적 맥락 정보가 결합해, 플라세보 효과를 일으킨다고 설명했다.
    ▲자료: nature reviews neuroscience

     

    플라세보 효과가 더 많은 백신 항체를 만든다


    그렇다면 플라세보 효과를 우연에 기대지 않고 전략적으로 쓸 수는 없을까. 2026년 1월, 이스라엘 텔아비브대, 미국 예일대, 영국 프린스턴대 등이 참여한 국제 공동연구팀이 힌트가 될 만한 연구를 발표했다. 플라세보 효과와 연관된 뇌 부위인 중변연계를 의도적으로 활성화함으로써 백신 면역 반응을 증가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doi: 10.1038/s41591-025-04140-5


    중변연계는 우리가 보상을 받거나 보상을 받을 거라 기대 할 때 활성화되는 회로다. 기대와 믿음을 기반으로 한 플라세보 효과와도 연관된다. 연구팀은 피실험자들이 자기공명영상(MRI) 기기 안에서 자기 뇌의 복측피개부(VTA) 활성도를 실시간으로 보면서 여행을 갔던 기억, 무언가를 성취했던 경험, 즐거운 미래를 상상하게 했다. VTA 활성을 증가시키려는 의도였다. VTA는 중변연계의 출발점으로, 도파민 신호를 보내 동기와 행동을 조절하는 부위다. 이후 피실험자들에게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하고 2주, 4주 뒤 항체 수치를 측정했다. 그 결과 VTA를 지속적으로 그리고 잘 활성화한 사람일수록 백신 항체가 더 많이 늘어났다. 즉 의식적으로 생성된 긍정적인 기대가 백신 반응을 강화한 것이다.


    1월 29일 한국뇌연구원에서 함께 논문을 살펴본 정민영 뇌발달영상연구원 선임연구원은 “동물 실험에서 VTA를 활성화하면 면역 체계가 높아진다는 선행 연구가 있었다”며 “사람을 대상으로 면역 체계의 인과 관계를 직관적으로 보여준 연구”라고 설명했다.

     

    ▲Wellcome Collection(W)
    18세기 독일의 의사 프란츠 안톤 메스머가 환자에게 철분 등을 먹이고 자성을 활용해 환자를 치료하고 있다. 그의 치료법은 암시에 의한 심리 요인이라며 부정당했지만 오늘날 플라세보 효과는 과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플라세보를 더 느끼는 사람, 제약회사가 탐낼까?


    생각만으로 고통은 줄이고, 약의 효과를 높일 수 있는 플라세보 효과가 달갑지 않은 분야도 있다. 환자를 치료하고 신약을 개발하는 의학 및 제약업계다. 이들에게 플라세보 효과는 처리해야 하는 잡음이자 숙제로 여겨졌다. 새로 개발한 약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 아닌지를 살필 때, 플라세보 효과가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2016년 미국 노스웨스턴대 파인버그의대 연구팀은 국제학술지 ‘플로스 바이올로지’에 플라세보가 더 효과적인 사람과 덜 효과적인 사람 간 뇌의 차이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doi: 10.1371/journal.pbio.1002570 플라세보 효과가 큰 사람일수록 우측 중전두회(r-MFG)와 전체 뇌 사이의 연결성이 높다는 것이다.


    연구팀은 뇌가 휴지기일 때의 기능적 연결성을 살폈다. 휴지기란 눈을 감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을 때의 상태다. 즉 외부 입력이 최소화된 상태에서 우측 중전두회가 뇌의 다른 부위와 얼마나 연결돼 있는지를 살핀 것이다. 이때 플라세보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측 중전두회의 연결 활성화 정도가 더 크게 나타났다. 우측 중전두회의 활성 정도를 토대로 플라세보 효과에 민감한 사람과 민감하지 않은 사람을 예측할 때의 정확도는 95%에 달했다. 정 연구원은 “중전두회는 시각적 주의력에 관여하는 영역”이라며 “주의 전환 능력이 높은 사람이 플라세보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이라 설명했다.


    우측 중전두회의 휴지기 연결성이 높은 사람은 제약회사가 탐낼 가능성이 있을까? 정 연구원이 웃으며 말했다. “보통은 신약을 개발할 때 그 약의 효과가 크면 약값도 높게 책정됩니다. 만약 약을 먹었을 때 남들보다 극적인 효과가 나는 시험 참가자를 모집할 수 있다면, 약의 효과가 더 좋게 나타날 수 있겠죠.” 하지만 현재 신약 임상시험은, 플라세보 효과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이중 맹검법(더블 블라인드 테스트·의료진과 환자 모두 위약 여부를 모르는 방식)이 도입돼 있다. 플라세보에 더 민감한 사람이 임상시험에 참여해 위약을 먹고 더 좋은 효과를 보고한다면 이런 절차도 말짱 도루묵이 된다. 


    “한편 최근에는 플라세보를 새로운 치료법으로 주목하고 있습니다.” 정 연구원이 말했다. 현대 의학은 플라세보를 얼마나 잘 아는지를 넘어 어떻게 잘 활용할 수 있을지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플라세보가 더 정교한 치료의 도구가 될지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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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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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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