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깜짝 놀라게 만든 희대의 사건들, 미스터리에 싸인 역사적 사건들, 그 속에 있는 진실을 파헤치는 신기한TV 수프라이즈입니다. 오늘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수십만 명의 수학자가 사실 거슬러 올라가면 고작 24개의 가족으로 분류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접수했습니다. 함께 들어가 보시죠.
2016년 8월 네이처 뉴스에 수학 계보 프로젝트(MGP)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기사가 실렸다. 현대 수학자의 65% 이상이 24명의 학자에게서 파생됐다는 내용이었다. 스승-제자 사이를 부모-자식 관계라고 치면 수학자 세계는 24개 가문으로 이뤄졌다는 뜻! 수학자의 조상을 조사하다니 도대체 누가, 그리고 왜 그런 일을 한 걸까?
황당하게 들리는 전세계 수학자 조상 찾기 프로젝트를 시작한 주인공은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교 수학과 교수였던 해리 쿤스였다. 1996년 쿤스는 자기 지도 교수의 지도 교수를 알아내려다 어디에도 그런 문헌이나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쿤스는 ‘수학자 족보’를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혼자 자료를 정리하다가 이를 온라인화했다. 그러자 MGP에 관심을 갖고 지원하는 사람과 단체가 늘어났고, 지금은 미국수학회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 자신의 ‘수학적 할아버지’를 찾으려던 한 수학자의 호기심 덕에 MGP는 수학 세계를 아우르는 큰 프로젝트로 발전한 것이다.
세계 수학자, 핵심 조상은 다섯 명
수백 개 소수민족이 모여 사는 나라에도 언제나 강호는 있는 법! 24개 가문 중에서도 특히 세력을 크게 차지하는 5개 가문이 있으니, 시지스몬도 폴카스트로, 이반 돌브냐, 장 르 롱 달랑베르, 프리드리히 라이프니츠, 헨리 브레큰 가문이 되시겠다. 재미있는 건 이들이 모두 수학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56,387명으로 가장 많은 수학자 자손을 보유한 폴카스트로는 의사였다. 이처럼 MGP를 조사하면 본인이 수학자가 아님에도 훌륭한 수학자의 탄생에 영향을 준 사람, 유명한 수학자였음에도 다른 학문에 영향을 준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시대 족보 찾기도 아니고 왜 수학자의 스승-제자 계보를 정리하는 것이 중요한 걸까?
머신러닝 알고리듬으로 MGP를 분석한 플로리아나 가기울로 벨기에 나무르대학교 연구원은 수학자 계보로 수학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수학적 네트워크를 연구했다. 가기울로 연구원은 “수학자들은 다른 연구자에 비해 적은 수의 논문을 발표하는 경향이 있고, 논문 수나 인용횟수가 학문적 명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편”이라며, “대신 누구를 스승으로 두었는지, 누구와 공동연구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이혜숙 이화여자대학교 수학과 명예 교수는 “그런 측면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라면서도 생각해볼 사례로 2006년 필즈상을 받은 그리고리 페렐만을 들었다.
“페렐만이 처음 푸앵카레 추측을 증명했을 때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어요. 소위 ‘톱클래스의 수학자 그룹’에 속하지 않았으니까 덜 알려진 거지요. 하지만 결국 증명이 맞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게 됐어요. 여기서 2가지 측면을 알 수 있어요. 수학자 계보나 그룹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짜 천재는 계보에 상관없이 인정받는다는 것이죠. 또 기존의 그룹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새로운 아이디어가 발휘됐을 수도 있어요.”
이 교수의 말처럼 수학적 계보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승-제자 흐름을 찾아보는 것은 흥미로운 작업임은 틀림없다. 박사학위를 받으면 MGP에 올라갈 수 있으니 내가 좋아하는 수학자와 ‘한 가족’이 되고 싶다면 열심히 공부해보자. 의외로 그 길은 그렇게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테니….
“띵동~. 나랑 같이 수학 연구할래요?”
방랑자로 알려진 수학자이자 소문난 수학 사랑꾼 에르되시 팔! 그는 수학자들을 찾아다니며 공동연구하는 것을 누구보다 즐겼다. 그래서 무작정 수학자를 찾아가 같이 문제를 풀자고 제안하고 그 집에 눌러 앉았다가 논문을 하나 완성하면 다음 수학자를 찾아 나서곤 했다. 한 곳에 지긋이 머물지 않으니 제자를 키우기 힘들었을 것 같지만,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과 공동연구한 수학자로서 에르되시는 수많은 수학자에게 영감을 준 ‘방문 교사’ 같은 존재였다.
에르되시가 주변 사람들이 수학에 매진하도록 얼마나 들볶았는지 몇 가지 일화를 보면 알 수 있는데, 로널드 그레이엄과 판 청의 집에서 공동연구할 때 낮부터 새벽 2시까지 연구하다가 두 사람이 이제는 정말 자야 한다고 떠나자 새벽 4시 30분에 팬과 주전자를 꽝꽝 쳐대며 공부하자고 깨웠다. 등쌀에 못 이긴 둘이 다시 연구를 시작해 몇 시간만에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찾자 흥분한 에르되시는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수학자에게 전화하려 했다. 그레이엄이 “캘리포니아는 지금 새벽 5시”라고 말하자 에르되시는 이렇게 말했다. “오, 좋아. 그럼 집에 있겠군!”
에미 뇌터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여성의 고등교육이 시작된 이래 가장 뛰어난 수학자”라고 일컬었을 만큼 능력 있는 수학자였으나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 재능을 인정받고 펼칠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7년 동안 임금을 받지 못한 채 강의하던 뇌터를 알아보고 당시 수학의 성지였던 독일 괴팅겐대학교로 불러온 것은 20세기 초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손꼽히던 다비트 힐베르트였다. 당시 물리학과 관련된 연구를 하고 있던 힐베르트는 이 분야에 뛰어난 수학자가 필요했고, 뇌터를 괴팅겐대로 초청해 정식 교수로 들이려한다. 이때 엉뚱하게 철학과 교수들이 반대하고 나섰는데, 힐베르트는 “이곳은 대학이지 목욕탕이 아니다”라며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한동안 괴팅겐대는 뇌터의 초빙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힐베르트는 1919년 뇌터가 정식 교수직으로 임명되기 전까지 4년 동안 자신의 이름으로 강의할 수 있도록 도우며 든든한 조력자의 역할을 했다.
난제였던 ‘특이점 해소 정리’를 증명하고 1970년에 필즈상을 받은 히로나카 헤이스케. 그는 수학자를 꿈꾸는 많은 이를 독려하고 후학을 양성하는데 힘쓴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 히로나카를 위대한 수학자이자 훌륭한 스승으로 이끈 사람 중에 특별한 인물이 있다는데….
히로나카가 일본 교토대학교 수학과에 재학 중이던 시절, 당시 최고의 수학자였던 오스카 자리스키가 초청 교수로 일본에 방문한다. 이때 자신의 첫 번째 논문을 열성적으로 설명하는 히로나카를 좋게 본 자리스키가 히로나카를 미국 하버드대학교로 불러들이면서 히로나카의 수학 인생은 탄탄대로를 걷게 된다. 그러나 이 잘 알려진 이야기에는 숨은 공신이 있었다. 히로나카의 운명을 바꾼 그 첫 논문을 쓰게 이끌어준 비밀 스승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원에 들어간 히로나카는 한동안 전혀 논문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매년 수많은 논문이 쏟아져 나왔지만 대부분 아무 평가도 받지 못하고 쓰레기가 됐고, 걸출한 수학자들이 남긴 완성작을 읽으면 자기 이론을 만들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학자로서의 길을 고민하던 그에게 깨달음을 준 것은 지도 교수도 명성 높은 수학자도 아닌 한 소녀였다.
생각에 빠져 교내를 걷고 있던 히로나카는 멀리서 들리는 한 소녀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린다. 초등학생 정도 되는 소녀가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뛰어오고 있었다.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지 못하고 되돌아서서 다시 걷던 히로나카는 몇 걸음 걷다가 다시 발을 멈춘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고 소녀가 부르던 선생님은 바로 자신이었던 것이다.
헐레벌떡 달려온 소녀는 “이거 선생님 거죠?”라며 수첩을 내밀었고 고맙다며 수첩을 받자 소녀는 다시 어디론가 뛰어갔다. 히로나카는 이 짧은 순간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자신이 선생님이라고 불릴 만한 사람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지게 된 것이다. 책을 읽고 고급 이론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선생님’이 될 자격이 없다고 느낀 그는 아무리 형편없는 논문일지라도 자신의 것을 창조해야겠다고 결심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했다.
후에 히로나카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나를 수학자로 만들어 준 것은 바로 그 소녀’라고 말했다. 이 소녀가 없었다면 히로나카는 첫 논문을 쓰지 못했을지도 모르고 자리스키를 만났을 때 보여줄 논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