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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원짜리 물건을 사려는데 동전이 400원밖에 없다. 어쩔 수 없이 1000원을 깼다. 거스름돈 400원까지 받고나니 주머니가 무거워졌다. 이처럼 동전은 불편하다. 사람들은 동전을 꺼린다. 웬만큼 모아선 살 만한 물건도 없고, 값어치에 비해 동전이 들고 다니기 무거운 탓이다. 그렇다고 동전을 없앨 수는 없다. 같은 액수를 주고받는 데 더 적은 개수의 동전을 쓸 순 없을까?

동전이 너무 많아!


지금도 동전은 번거로운 일이지만 과거에는 이보다도 더 불편했다. 거래를 할 때 주고받는 동전의 개수가 평균적으로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화폐 개혁 이전에는 화폐의 액면 체계★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지금보다 더 비효율적이었다.

현재 영국의 동전은 1페니와 2, 5, 10, 20, 50펜스, 그리고 1, 2파운드로 액면가 앞에 숫자 1, 2, 5가 반복되는 [1, 2, 5] 체계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1971년에 동전 체계를 개혁하기 전까지는 0.5, 1, 3, 6, 12, 24, 30페니 등 액면가가 특이한 동전이 많았다. 게다가 지금의 100펜스에 해당하는 1파운드가 당시엔 240페니였다. 거스름돈을 챙기는 게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0.5파운드짜리 물건을 사면서 1파운드를 지불한다고 하면, 지금은 거스름돈으로 50펜스 1개를 받지만, 과거엔 30페니 4개를 받은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액면 체계 자체가 없어 엄청나게 많은 동전을 그대로 써야 했던 때가 있었다. 영화나 TV에서 엽전 수십 개를 주렁주렁 줄에 엮어 쓰는 장면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 생각하면, 높은 단위의 동전이 따로 없어 500원을 1원짜리 500개로 내는 꼴이다.

조선시대에 널리 쓰인 ‘상평통보(常平通寶)’는 주전소, 전가, 서체, 부호, 천자문순, 숫자순, 오행순 등으로 그 종류만 무려 4000여 종에 달했다. 엽전 한 닢이 1문이었는데, 무게 단위인 ‘돈’과 ‘냥’이 화폐 단위에 쓰이면서 1관=10냥=100전=1000문이 성립됐다. 엽전 1문의 무게가 4.5g에서 9.4g 정도였으니, 평균 7g이라고 하면 5냥(약 5만 원)은 500문으로 대략 3.5kg이나 된다. 상평통보는 1678년 숙종 때 발행돼 조선 말기에 현대식 화폐가 나오기 전까지 200여 년 동안 쓰였다.

1894년 이후 엽전과 신화폐가 혼용되면서는 동전의 종류와 개수가 더 많아졌다. 그리고 그만큼 단위도 복잡해졌다. 황동 한 푼이 엽전 1문과 같았는데, 여기에 백동화 2전 5푼과 한 량 은화, 닷 량 은화까지 더해졌기 때문이다. 닷 량 은화는 엽전 500문과 같았다.

액면 체계★ ‘액면’은 화폐에 표기되는 숫자로, 액면가를 의미한다. 화폐를 구성하는 액면가의 종류와 크기를 액면 체계라고 한다. 액면가가 같아도 실제 화폐의 가치는 화폐의 종류와 국가간 환율 등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배쳇 문제로 만든 [1, 5] 체계와 [1, 2, 5] 체계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기본수 체계인 [1, 5] 체계와 [1, 2, 5] 체계가 화폐의 액면 체계로 쓰이고 있다. [1, 5] 체계는 1, 5, 10, 50, 100, 500 등 액면가의 앞자리 수로 1과 5가 번갈아 나온다. 마찬가지로 [1, 2, 5] 체계는 1, 2, 5, 10, 20, 50, 100, 200, 500처럼 앞자리 수로 1, 2, 5가 쓰인다.

화폐 경제학에서 사용자의 편의를 위한 ‘최적의 액면 체계’를 찾는 것은 중세부터 시작돼 2000년대까지도 활발히 논의했던 연구 분야다. 여기서는 일정한 거래 금액을 만드는 데 필요한 액면 단위와 화폐의 평균 개수가 적을수록 편리한 것으로 본다. 이런 관점에서 경제학자들은 효율성이 높은 액면 체계를 찾기 위해 정수론과 ‘최소 노력 원칙’ 같은 수학적 원리를 활용했다. 최소 노력 원칙은 소비자가 가능한 최소의 노력으로 손쉽게 물건을 사려고 한다는 이론이다.

미국의 저명한 경제학자인 레스터 텔서는 최적의 화폐 액면 체계를 설명하기 위해 정수론의 ‘배쳇 문제’를 활용했다. 배쳇 문제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 가장 적은 개수로 임의의 총합을 만들 수 있는 체계를 찾는 문제다. 텔서는 이 문제를 화폐에 적용했다. 예를 들어 10원부터 1000원 사이의 어떤 금액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동전의 개수가 최소가 되는 수 체계를 찾는 것이다. 이때 범위 내 금액은 거래 횟수가 똑같다고 가정했다. 20원짜리 물건의 거래나 700원짜리 물건의 거래나 똑같은 횟수로 일어난다고 본 것이다.

동전을 어떻게 조합해야 할까?

배쳇 문제에 따르면 1, 2, 4, 8로 이어지는 2의 제곱수 체계와 1, 3, 9로 이어지는 3의 제곱수 체계가 효율적이다. 3의 제곱수 1, 3, 9를 십진법 덧셈에 편리하게끔 바꾼 게 1, 5, 10이다. 마찬가지로 2의 제곱수 1, 2, 4, 8을 십진법 덧셈이 쉽도록 바꾼 게 1, 2, 5, 10이다. 즉, [1, 5] 체계는 3의 제곱수에서, [1, 2, 5] 체계는 2의 제곱수에서 유래했다. 미국과 영국 같은 대부분의 국가가 [1, 2, 5] 체계를 쓰고 있고,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부 아시아 국가가 [1, 5] 체계를 쓰고 있다.

‘탐욕 알고리즘’은 최적화 문제의 해를 구하는 데 쓰는 근사법으로, 최소 노력 원리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다. 이 알고리즘을 거스름돈의 동전 개수 최소화 문제에 적용하면, 어떤 금액을 만드는 동전의 최소 개수를 알 수 있다. 이 알고리즘은 우선 가장 액면가가 큰 동전을 최대한 많이 선택하고, 이어서 두 번째로 큰 동전을 최대한 많이 선택하는 식으로 점점 더 작은 액면가의 동전으로 옮겨가면서 총액을 맞춘다.
 

지불할 수 있는 동전의 개수가 제한돼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전을 무제한으로 써도 아무런 법적인 문제가 없다. 예를 들어, 5만 원을 100원짜리 동전 500개로 내도 된다. 아무리 동전의 개수가 많아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나라와 미국을 제외한 많은 나라에서 동전은 무제한으로 쓸 수 없도록 돼 있다. 일정한 개수나 금액을 넘어서는 동전은 법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 ‘동전의 법화성 제한’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유럽연합(EU)의 국가에서는 한 번 거래할 때 낼 수 있는 동전을 최대 50개까지만 허용하고 있다. 거래를 목적으로 상대방에게 일정 한도 이상의 동전을 받도록 강제할 수 없는 것이다. 단, 상대방이 한도를 넘는 동전을 기꺼이 받는 경우에는 정상적으로 거래할 수 있다.

가장 효율적인 액면 체계는?

화폐의 액면 체계를 제대로 평가하려면 화폐의 실질적인 가치와 해당 국가의 물가, 환율, 거래 금액의 크기와 거래 빈도수, 사용자 수요와 만족도 등을 전부 고려해야 한다. 하지만 화폐 액면 체계의 효율성은 거래에 필요한 동전의 평균 개수와 화폐의 종류 수를 기준으로 분석해 볼 수 있다. 수학적으로 가장 효율적인 액면 체계는 무엇일까?

탐욕 알고리즘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10원부터 990원까지의 범위 안에서 각각의 금액을 만드는 데 필요한 동전의 최소 개수를 아래 그래프로 나타냈다. 사실상 거의 쓰지 않는 1원과 5원짜리 동전은 생략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1, 5] 체계는 평균적으로 5개가 필요하다. [1, 2, 5] 체계와 [1, 3] 체계는 각각 평균 3.4개와 4.2개가 필요하다. [1, 2, 5] 체계가 가장 효율적인 것이다.
 

아래 표는 더욱 정교한 수학 모델을 통해 분석한 결과로, 각각의 액면 체계에 따라 화폐를 종류별로 평균 몇 개씩 가지고 다녀야 하는지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서는 지폐도 포함했다. 평균 보유 개수가 적을수록 효율성이 높은데, 이에 따라 [1, 5] 체계보다 [1, 2, 5] 체계가 효율이 높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1, 5] 체계에서 [1, 2, 5] 체계로 바꾼다면, 동전의 종류가 기존 4종(10, 50, 100, 500원)에서 6종(10, 20, 50, 100, 200, 500원)으로 늘어난다. 필요한 동전의 평균 개수는 줄어들지만 동전의 종류 수가 늘어나, 그만큼 사회적 비용 부담도 높아지는 것이다. 반면 [1, 3] 체계에서는 50원이 30원으로, 500원이 300원으로 바뀌는 것만으로 필요한 동전의 평균 개수가 줄어든다. 한편 [1, 5] 체계는 효율성도 가장 낮고 사회적 비용도 가장 높다.

200원짜리 동전을 안 만드는 이유

우리나라는 OECD 회원국 중 유일하게 2단위 액면의 은행권을 쓰지 않는다. 일본을 통해 화폐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1, 5] 체계는 일본의 것을 그대로 본 따 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본은 최근 2000엔을 도입했지만,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고 별로 쓰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로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과거 우리나라에도 2만 원권 도입을 둘러싼 논의가 있었지만, 별로 쓰이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 때문에 없던 일이 됐다. 한국은행 발권정책팀 조재현 과장은 “수학적으로 좀 더 효율적인 액면 체계가 있다고 해도,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으면 채택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효율성이 더 높아도 기존 체계에 대한 익숙함 때문에 새로운 체계가 외면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수학적으로는 효율적인 액면 체계를 만들 수 있지만, 결국 액면 체계는 효율성보다 그 나라의 경제적 여건과 사회·문화적 관습에 따라 정해진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익숙함 때문에 효율성을 저버릴 수는 없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있다면 슬슬 마음을 열어보는 게 어떨까? 그러면 매년 수백 억을 들여 동전을 새로 만들어 내지 않아도 될 것이다.

지폐냐, 동전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동전이 무거우면 지폐만 만들면 되지 않을까? 하지만 동전은 싼 물건을 사고팔 때 많이 쓰인다. 또한 동전의 수명은 반영구적이어서 지폐보다 유지 비용이 훨씬 저렴하다. 따라서 지폐만을 사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실제로 미국 정부는 1달러 지폐를 동전으로 바꾸려고 했었다. 그러나 이때 발행된 1달러 동전은 너무 크고 무겁다는(지름 38.1mm, 무게 22.7g) 이유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아 결국 제대로 쓰이지 못했다.

2014년 12월 수학동아 정보

  • 송경은 기자
  • 도움

    이만종 교수
  • 도움

    조재현
  • 사진

    포토파크닷컴
  •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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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진

    한국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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