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6일 오후 2시, 그늘에 있어도 땀이 줄줄 흘러내리는 34℃의 더위에 이창욱 기자가 인사동 발굴조사현장을 찾아갔어요. 잦은 비로 굳게 닫혔던 발굴조사현장에서 드디어 다시 작업이 시작된 거예요. 현장에 들어서자 대로의 자동차 소음 대신 굴착기의 굉음과 조사원들이 곡괭이로 땅을 내리치는 소리가 들려왔죠...
엄청난 더위에도 발굴조사현장은 분주했어요. 한쪽에서는 조사원들이 유물에 번호를 매기고 있었고, 굴착기가 유물을 옮기고 있었어요. 그늘에서는 유물 포장 작업이 한창이었죠. 이 지역은 조선 시대 시장에서 일하던 상인들이 살던 집과 창고가 있던 곳입니다. 이번 유물도 창고로 추측되는 터에서 발견되었지요.
“바로 이곳이 이번 유물이 발견된 장소입니다.”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원장이 발굴조사현장의 가장 구석에 파인 조그만 구덩이를 가리키면서 말했어요. 구덩이 옆으로는 조선 시대에 썼던 배수로 유적과 함께 두꺼운 지층이 드러나 있었죠.
“땅을 얼마나 깊이 파신 거죠?”
“약 3m 파고 들어왔습니다.”
오경택 원장은 땅속 깊이에 따라 다른 시대의 유물이 묻혀있다며, 이런 지층을 ‘문화층’이라고 부른다고 설명했어요. 이번에 유물이 발견된 문화층은 ‘조선 시대 VI 문화층(16세기)’으로, 최근 층, 20세기, 19세기, 18세기, 17세기의 5개 문화층을 걷어낸 후에야 모습을 드러냈죠. 조선 15세기 층인 7층(VII)까지 발굴하면 조사가 마무리될 예정입니다.
●인터뷰
오경택(수도문물연구원 원장)
“이번 유물은 제 일생에 다시 없을 발견입니다!”
Q유물을 발견할 당시의 상황을 들려주셔요!
6월 1일, 발굴장소에서 총통과 깨진 동종이 나왔어요. 총통은 다른 발굴 현장에서도 여러 번 발견된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다음날 같은 자리에서 일성정시의와 물시계 부품, 부서진 항아리가 나왔어요. 항아리에서 나온 조약돌 같은 덩어리들을 알코올로 씻으니 금속활자가 드러났지요!
Q귀중한 유물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기분은?
유물의 종류를 확인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을 불렀습니다. 오시는 분마다 “국보급 유물이 발견되었다”라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분은 1971년 발견된 ‘백제 무령왕릉’ 이후 최대의 고고학 발견이라고도 하셨고요. 제 일생에 다신 없을 발견인 것 같습니다.
Q도시 한복판에서 유물이 발견되다니 신기해요!
서울은 오래전부터 사람이 살았고, 특히 조선 왕조 600년간 수도였던 유서 깊은 도시예요. 그러니 언제나 사람이 북적였던 사대문● 안에는 수많은 유적과 유물이 잠들어 있죠.
게다가 서울은 원래 습지대에 사람들이 땅을 다져서 집을 지은 도시예요. 새로운 집을 지을 때면 기존의 집터 위에다 새로 집을 지었죠. 우리 발밑에 유물들이 여러 층 묻혀있는 거예요.
Q이번에 발견된 유물은 어떻게 잘 보존될 수 있었나요?
저희가 발굴한 여러 문화층 중에서 이번에 발굴한 ‘조선 시대 VI 문화층(16세기)’이 보존상태가 제일 좋아요. 18~19세기 문화층의 경우 현대 건물을 지으면서 파헤쳐 파괴된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16세기에는 임진왜란, 병자호란이라는 전쟁 속에서 건물들이 한꺼번에 무너져 묻혔기에 오히려 잘 보존된 것 같습니다.
Q앞으로도 이런 유물이 더 나올 수 있을까요?
‘세운 4구역’이라 불리는 광장시장 맞은편에서도 곧 발굴 조사가 시작됩니다. 이번 발굴지역의 넓이가 약 1만㎡였는데 세운 4구역은 발굴 범위만 3만 3000㎡로 방대한 편이라 많이 기대하고 있어요!
Q앞으로의 유물 연구 계획은요?
유물들은 앞으로 정밀한 보존 처리에 들어갑니다. 그러면 금속활자에 묻은 먹을 추출해서 연대분석을 하거나, 금속활자의 성분을 분석하는 등 더 정밀한 조사를 할 수 있지요. 이후에야 전문가들이 유물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연구를 할 수 있을 거예요. 여기에 최소 10년 이상이 걸릴 거예요. 이번 발견으로 우리나라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의 연구 거리가 풍성하게 생겨난 셈이죠.
●사대문 : 조선 시대, 서울에 있던 네 개 대문. 흥인지문(동대문), 돈의문(서대문), 숭례문(남대문), 숙정문(북대문)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