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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Part2] 검출기 업그레이드 준비하는 CERN의 한국 과학자들

    문세영

    프랑스 프레베생에 위치한 CERN 904동에서 다국적 학생들이 CMS 검출기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앞으로 진행될 CMS 검출기의 업그레이드 작업에는 한국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한낮 기온이 섭씨 30℃를 웃도는 6월, 스위스 제네바의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 건물은 에어컨 보급률이 낮은 유럽답게 무더운 열기를 한껏 머금고 있었다. 이런 열기 속에서 6월 24~26일에는 ‘ALICE3 days’라는 행사가, 24~28일에는 ‘CMS week’ 행사가 열렸다. 각각 앨리스(ALICE텮 Large Ion Collider Experiment) 검출기와 압축뮤온솔레노이드(CMS텰ompact Muon Solenoid) 검출기 업그레이드를 논의하는 자리였다.

     

    CERN은 현재 가동 중인 거대강입자충돌기(LHC)를 2029년까지 ‘고광도-LHC(HL-LHC)’로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강력한 초전도 자석 등을 도입해 LHC가 가속하는 양성자빔을 더욱 정밀하게 제어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그러면 양성자빔의 충돌 빈도가 높아져 이전보다 훨씬 많은 충돌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현재보다 연구 데이터가 10배 이상 늘어나 새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높다. 늘어난 데이터를 수집하려면 검출기 업그레이드가 필수다.

     

    두 회의에는 권민정 인하대 물리학과 교수를 비롯한 한국 연구자들도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ALICE와 CMS 검출기는 LHC의 네 검출기 중에서도 한국인들이 활발히 연구에 참여하는 장치다.

     

    원래 비공개로 진행되는 회의였지만, CERN 측은 특별히 기자를 위해 회의 분위기를 스케치하고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시간을 줬다. “한국 기자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 불편한 분들은 나가셔도 된다”는 공지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뜨는 사람은 없었다. 검출기 업그레이드에 대한 CERN 연구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여도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한국 정부는 2006년 한국 물리학자들이 ALICE 검출기와 CMS 검출기 제작 및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CERN과 ‘한-CERN 협력협정’을 체결했다. 이에 따라 2007년부터 한국 ALICE팀인 ‘KoALICE’와 한국 CMS팀인 ‘KCMS’가 만들어져 각각의 검출기 연구에 참여 중이다. “한국은 그동안 ALICE와 CMS 검출기 제작 및 연구에 크게 기여해왔고, 앞으로의 업그레이드 과정에서도 큰 공헌이 기대됩니다.” 두 행사에 참여한 해외 연구자들은 입을 모아 말했다.

     

    “우리는 우주 태초의 상태를 재현합니다”

    ALICE

     

    이다솔

     

    스위스에서 국경을 넘어 프랑스로 넘어오면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ALICE’s Wonderland)’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앨리스(ALICE텮 Large Ion Collider Experiment) 검출기동이 보인다. 건물 외벽엔 거대한 실물 크기 검출기 그림이 그려져 있어 찾기가 어렵지 않다. 검출기동 1층 ALICE 검출기 제어실에서 마르코 판 레이우엔 ALICE 대변인(사진)을 만났다.

     

    Q. ALICE의 목표는 무엇인가?

     
    우주 태초의 상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빅뱅 직후, 약 10-12초에서 10-6초 사이의 우주는 엄청난 고온 고압 상태로, 쿼크와 글루온이 서로 녹아내려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를 만들었다. 이후 우주가 팽창하며 쿼크 입자들의 평균 에너지가 낮아졌고, 얌전해진 쿼크들이 서로 뭉쳐 오늘날 우리가 아는 양성자와 중성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ALICE는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를 만들어 관측한다.

     

    Q.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는 어떻게 만드는가? 빅뱅이라도 만드는가?

     
    양성자와 중성자가 수십 개씩 들어있는 납 이온을 충돌시켜 밀도를 높이는 게 필수다. 빅뱅(Big Bang)보다는 리틀뱅(Little Bang)을 만드는 것에 가깝다(웃음). ALICE에서 만든 쿼크-글루온 플라스마가 매우 짧은 순간만 유지되고, 물질의 양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기 때문이다.

     

    Q. 지금까지 ALICE는 어떤 내용을 관측했나?

     
    실험적으로 쿼크-글루온 플라스마의 상태를 검증했다. 점도를 측정해 이 플라스마가 점성이 거의 없는 초유체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냈다. 지금도 온도를 측정해 우주 초기 온도를 예측하는 등 다양한 실험을 진행 중이다.

     

    Q. 앞으로 ALICE의 목표는?

     
    우주가 진화하는 단계별 상태에 맞는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를 재현해 우주의 진화를 단계별로 검증할 예정이다. 우주가 팽창하면서 쿼크-글루온 플라스마는 양성자 같은 강입자로 ‘상전이’를 겪었다. 그런데 정확히 어떤 과정으로 이러한 강입자가 만들어졌는지, 그 과정에서 쿼크와 글루온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했는지는 아직 모른다. 현재 우주를 이루는 물질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진행해야 하는 연구다.

     

    CERN

    ALICE 검출기의 구조와 규모를 보여주는 일러스트.

     

    웨이퍼 말아 ALICE 검출기 혁신에 도전

     

    ALICE 검출기는 138억 년 전 빅뱅 직후를 재현해 관측한다. 다른 검출기와는 달리 ALICE의 핵물리학자들은 납 이온과 같은 중이온 충돌을 관측해 우주가 어떻게 진화했는지 살핀다. ALICE 연구에 40개국 2000명 이상의 물리학자와 공학자가 참여 중이다.

     

    한국 연구자들은 현재 ALICE의 핵심 구성 요소인 궤적검출기 ‘내부추적시스템(ITS·Inner Tracking System)’ 업그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다. ITS는 ALICE 검출기의 가장 중심부에 설치되는 실리콘 부품으로 전하를 가진 입자를 측정한다. 하전 입자가 실리콘 층을 통과하면서 유리된 전자를 감지하는 식이다.

     

    이전까지의 ITS는 실리콘 칩을 일렬로 길쭉하게 꽂아서 설치했다. 그러나 업그레이드된 HL-LHC에는 매우 얇은 실리콘 웨이퍼를 종이처럼 원통 형태로 말아 ITS를 만들 예정이다. ALICE 업그레이드 총괄 관리자인 안드레아 다이네즈는 ITS 원통형 웨이퍼를 “매우 도전적이면서도 선구적인 기술”이라고 평가했다. 

     

    전임 KoALICE 팀장이었던 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는 “입자 운동을 방해할 불필요한 부품이 빠져 검출기의 정확도가 획기적으로 높아질 것”이라 설명했다. “반도체 검출기만큼 위치 분해능이 좋은 검출기는 없어요. 업그레이드되면 아직 측정된 적이 없는 ‘오메가 CCC’처럼 새 입자를 발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현 KoALICE 팀장인 권 교수의 설명이다.

     

    ITS 업그레이드에서 한국에 걸린 기대가 큰 이유는 한국이 반도체 강국이기 때문이라는 점도 있다. KoALICE 팀은 국내 기업과 생산 자동화가 가능한 기계도 개발 중이다. 이를 통해 ITS 제작 노하우를 새로 얻게 될 것이다.

     

    나아가 2030년 경 진행될 1억 스위스프랑(약 1538억원) 이상의 비용이 들어가는 업그레이드 작업, ‘ALICE3’에서는 ITS에서 업그레이드된 부품인 ‘외부궤적검출기(OT텽uter Tracker)’도 만들어 설치할 예정이다.

     

    문세영

    6월 24~28일 CERN 대강당에서 CMS 검출기 업그레이드를 논의하는 ‘CMS week’ 회의가 열렸다. 

     

    CMS에서도 한국이 차세대 검출기 선도

     

    “제가 만든 저항판 검출기(RPC·Resistive Plate Chamber)입니다. 이걸로 힉스를 발견했죠.”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의 말처럼 LHC의 또 다른 주요 검출기인 CMS 실험에서도 한국 연구자들의 역할은 컸다. CMS 검출기기의 핵심 부품인 RPC는 2004년부터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RPC는 뮤온 입자를 검출한다. 2020년 8월 힉스 입자가 직접 뮤온 두 개로 붕괴하는 현상을 최초로 관측하며 표준모형을 검증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CMS팀 역시 LHC 업그레이드를 준비하며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CMS 차기 대변인인 고티에 하멜 드 몬슈노는 “2029년에 가동을 시작할 HL-LHC를 준비하기 위해 검출기의 다양한 부분을 교체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58개국 250개 기관이 참여하는 이 프로젝트에는 3억 스위스프랑(약 4609억 원)의 비용이 소요될 것으로 추산된다. 이 과정에서 KCMS 팀은 RPC를 넘어, CMS에 장착할 차세대 부품인 기체 전자 증폭기(GEM·Gas Electron Multiplier)와 초고속 타이밍 검출기(MTD·MIP Timing Detector) 제작에도 참여하게 된다.

     

    GEM은 보다 정밀하게 뮤온 궤적을 추적할 수 있는 부품이다. 다공성 구조를 가진 얇은 금속 포일을 통해 증폭된 전자 신호를 판독한다. CMS 업그레이드 총괄 관리자인 프랭크 하르트만은 “GEM은 높은 정밀도를 갖고 있으며 메가헤르츠 수준의 높은 속도로 충돌을 감지하고 처리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편 MTD는 업그레이드된 CMS에 새로 설치되는 부품이다. 하르트만은 “MTD는 시간 분해능을 크게 향상시킨다. 나노초 단위가 아닌 피코초 단위로 입자 이동 시간을 식별할 수 있어 지금까지의 검출기로 보지 못했던 것들을 감지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CERN

    ALICE 검출기 내부에서 납 이온이 충돌했을 때 만들어지는 다양한 입자들을 그려낸 일러스트.
    엄청나게 많은 입자가 나오기 때문에, 연구를 위해서는 정밀도가 높은 검출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이다솔

    KCMS 팀장을 맡고 있는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가 CMS 검출기의 핵심 부품인 RPC(저항판 검출기) 옆에 서 있다. 한국 과학자들이 만든 RPC는 2020년, CMS 검출기가 힉스 입자의 뮤온 붕괴 사건을 최초로 관측하는 데 기여했다.

     

    한국, 준회원국 되어 과학경제 두 토끼 잡을까 

     

    최근 한국과 CERN의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한국이 CERN의 ‘준회원국’으로 가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현재 CERN에서 활동하는 국가의 지위는 유럽의 참가국인 ‘회원국’, 비유럽 참가국인 ‘준회원국’, 대등한 위치에서 협력하는 ‘참관국’으로 나뉜다. 그동안 한국은 셋에 속하지 않는 비회원국 자격을 유지해왔다. 높은 연구 기여도에 어울리지 않는 지위다. 

     

    “한국은 이미 준회원국인 인도나 브라질보다 더 많은 연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ALICE, CMS, 이론물리학, 그리드 컴퓨팅 등 검출기 개발과 분석 분야에 기여도가 높죠.” CERN에서 국제 이해 관계를 담당하는 이매뉴얼 체스멜리스 영국 옥스퍼드대 물리학과 교수는 한국이 동아시아 최초로 CERN 준회원국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말했다. 

     

    준회원국이 되면 먼저 달라지는 것은 의사 결정에 관한 의견과, 연구의 기회다. 김 교수는 “비회원국 자격으로 CERN의 데이터를 이용하면 내부에서 어떤 의사결정이 이뤄지고 있는지 확인하고 의견을 낼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준회원국이 되면 연구 방향을 결정하는 회의에서 의견을 낼 수 있고,  연구 방향도 공유받는다. 체스멜리스 교수는 “한국 국적자가 연구직은 물론이고, CERN의 행정직으로 지원해 일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한-CERN 협정에 따라 한정된 수의 연구자만 참여하던 제한이 사라져 많은 연구자를 좋은 조건에서 교육할 수 있다. 

     

    준회원국이 가지는 또 하나의 이점은 경제적 혜택이다. 체스멜리스 교수는 “준회원국이 되면 한국 기업들이 가속기 건설에 참여하는 계약을 입찰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업그레이드 과정에서 사업을 수주해 정상급 연구소에 납품하는 실력을 연마할 수 있고, 다음 사업의 기회도 얻게 되죠. 한국이 잘하는 실리콘 반도체는 CERN의 핵심 기술로 많이 쓰인다는 점에서, 새 기회가 열릴 겁니다.” 김 교수의 말이다.

     

    이런 기대 덕분일까. 한국 정부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4월 3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CERN 준회원국 가입 타당성 조사에 관한 과제를 공모한다고 밝혔다. CERN에 준회원국으로 가입하게 되면 국내총생산(GDP) 비율로 분담금을 내게 되는데, 준회원국이 됐을 때의 장단점을 고려해 가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10년 전만 해도 준회원국 가입에 대해 국내 물리학자들조차도 ‘국내 물리학계 연구비보다 많은 예산을 분담금으로 내는 것이 온당한가’ 고민했습니다. 10년이 지났고 한국 물리학계는 성장했습니다. 이제는 물리학 연구를 선도하기 위해 준회원국 가입을 진지하게 고려할 때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유 교수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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