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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Part3] 힉스 너머를 찾아서 물리학의 미래, FCC

▲Shutterstock
스위스 메헝의 CERN 입구 가까이 설치된 캐나다 조각가 게일 헤르믹의 작품. 피타고라스 정리 이전부터 표준모형까지, 4000년 동안의 과학 지식을 담고 있다. 표준모형 다음으로 나올 미래의 물리학 지식은 무엇일까.

 

유럽핵입자물리연구소(CERN)는 앞으로 다가올 70년을 어떻게 준비하고 있을까. 답은 차세대 가속기다. 미래원형가속기(FCC텳uture Circular Collider)는 둘레만 91km로, 2040년경까지 가동될 거대강입자충돌기(LHC)의 3배 규모다. 과연 FCC는 표준모형을 넘어 물리학의 미래를 구원할 수 있을까. 인류는 원형 궤도의 끝에서 무엇을 보게 될까.

 

6월 11일 오전 10시 반, CERN의 4동. 이론물리학자가 모여 있어 ‘이론동’이라고 불리는 이곳 복도를 걷다 보면, 열린 문틈 너머로 찻잔을 쥔 채 토론하는 이론물리학자들이 보인다. 신기하다. 책이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나 보던 클리셰적 물리학자들이 이 건물에 가득하다!

 

쟌 프란체스코 쥬디체 CERN 이론물리부서장의 연구실도 기자의 기대에 들어맞는 곳이었다. 크지 않은 연구실 한편의 검은 칠판에는 수식이 빼곡했다. 어지러운 책상 뒤로 아름다운 거품상자 궤적의 포스터가 걸렸다. 그를 만나러 온 이유는 CERN에서 LHC 다음으로 추진하는 미래 입자가속기에 관해 묻기 위해서였다. 쥬디체 부서장은 1993년부터 지금까지 31년 동안 CERN의 이론물리학부에 몸담았다. “제 직업군에서는 천국이나 다름없는 곳이죠.” 이론물리학자로서 그의 주 관심사는 입자충돌기다. 그는 미국의 초전도 초충돌기(SSC), CERN의 LHC 건설에 참여했다. 그리고 지금, 그가 연구하는 대상은 힉스 너머 물리학의 미래를 그릴 미래 가속기 ‘FCC’다.

 

더 크고, 더 거대하고, 더 세진 FCC

 

 

“FCC는 미래원형가속기(Future Circular Collider)의 약자입니다. LHC 이후 물리학 연구를 위해 계획됐죠. 규모는 LHC의 3배, 최대 출력은 LHC의 7배에 달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실험실’ LHC의 뒤를 잇는 FCC는 그 둘레가 약 91km로, 서울시를 거의 둘러쌀 수 있는 규모다. 이렇게 원형 궤도를 키우면 입자를 더 강하게 가속시킬 수 있다. 현재 LHC에서 만들 수 있는 최대 충돌 에너지는 13.6테라전자볼트(TeV)다. FCC에서는 이 한계가 100TeV까지 올라간다. 최대 출력이 LHC의 7배라고 하는 이유다. 출력이 커진 만큼 훨씬 무거운 입자를 만들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전보다 훨씬 더 미세한 공간을 높은 해상도로 관찰하는 것도 가능하다. 한국에서도 한양대를 포함한 9개 기관에서 FCC 연구개발에 협력하기로 했다.

 

쥬디체 부서장은 FCC 계획이 두 단계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우선 2040년대 중반, 상대적으로 가벼운 전자와 양전자를 충돌시키는 ‘FCC-ee’가 먼저 가동을 시작한다. “FCC-ee의 목적은 ‘정밀 측정 기계(Precision Machine)’입니다. 이미 발견된 입자들의 질량이나 상호작용 정도 등을 더 정밀하게 측정하겠다는 거죠. 이를 통해 힉스 입자의 특성도 더 자세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이후 15년을 더 들여 FCC-ee를 더 무거운 중입자(하드론)를 가속할 수 있는 ‘FCC-hh’로 업그레이드한다. 입자가속기의 출력이 100TeV까지 올라가는 것도 이때다. “FCC-hh는 ‘발견 기계(Discovery Machine)’로써 새로운 입자를 찾는 일을 할 수 있죠. 어떤 입자가 발견될지 전혀 모릅니다.” 미지의 입자물리학 대륙이 열리는 셈이다.

 

물론 이렇게 거대한 가속기가 한 번에 설치될 수는 없다. CERN은 FCC-ee를 짓는 데까지만 150억 스위스프랑에 달하는 예산이 투입될 것이라 계산했다. 약 23조 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많은 예산을 모으려면 CERN 회원국 간의 치열한 협의가 필요하다. 나아가 가속기 궤도를 둘러싸는 초전도 자석 기술을 업그레이드 하는 등, 수많은 기술적 난관도 돌파해야 한다.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는 계획이다. 그런데도 FCC를 건설하려는 이유는, CERN의 물리학자들이 FCC에 힉스와 표준모형을 넘어선 ‘물리학의 미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CERN
CERN이 공개한 미래원형가속기(FCC)의 완공 후 일러스트. 입자가 달릴 원형 경로는 약 91km로, 서울시를 거의 둘러쌀 수 있는 규모다.

 

완벽한 표준모형의 ‘틈’을 찾아

 

 

20세기 후반, 입자물리학의 전성시대에서 우주의 근본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이론이 나왔다. 이론들의 전쟁터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생존자가 바로 ‘표준모형(Standard Model)’이다. 표준모형은 우주가 17개의 근본 입자로 이뤄졌으며, 중력을 제외한 전자기력, 강력, 약력으로 우주의 모든 물질과 상호작용을 설명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만들어졌던 입자가속기는 번번이 표준모형의 예측을 성공적으로 증명했다. 그런데 다음번 입자가속기인 FCC에게 원하는 바는 다르다. 표준모형이 맞지 않는 ‘틈’을 찾으려 하는 것이다. “아직도 표준모형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쥬디체 부서장의 말이다.

 

어떤 현상이 있을까. 서울대 이론물리연구소 소장인 김형도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몇 가지 예시를 들었다. “표준모형이 설명하지 못하는 현상 중 하나는 ‘중성미자의 질량’입니다. 중성미자는 기본 입자 중 하나로 약력과 중력에만 반응하는데, 표준모형에 따르면 중성미자의 질량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1998년, 중성미자가 매우 작은 질량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가 발견됐다. 표준모형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결과였다. 

 

또 다른 문제는 우주의 ‘물질-반물질 비대칭’이다. 반물질은 일반 입자와 성질이 정반대인 반입자로 이뤄진 물질이다. 양전하를 가지고 있는 양전자가 예시다. 물질과 반물질은 만나면 큰 에너지를 방출하고 소멸한다. 즉 만약 우주가 만들어질 당시 물질과 반물질이 같은 양으로 만들어졌다면, 현재 남아있는 물질은 없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물질로 만들어진 우주에 살고 있죠. 반물질은 다 어디 갔을까요? 물질과 반물질의 비대칭을 표준모형 내에서 설명하려는 시도는 지금까지 모두 실패했어요.”

 

이외에도 수많은 문제가 산적해 있다. 물리학자들이 보기에 힉스 입자의 질량은 예상보다 너무 가볍다. 기본 입자로 불리는 입자들의 질량이 왜 세 단계로 나뉘어있는지도 모른다. 우주 전체의 96%를 차지한다고 알려진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표준모형을 넘어선 더 포괄적인 이론이 필요한 이유다.

 

쥬디체는 “FCC에서 검증할 수 있는 표준모형 바깥의 이론이 많다”고 말했다. ‘초대칭이론’ 등에서 예견하는 새로운 입자들, 여분차원 등의 개념이 그것이다. 물리학자들은 FCC가 표준모형을 넘어선 이론의 증거를 발견하길 원하고 있다.

 

▲CERN
프랑스와 스위스에 설치될 미래원형가속기(FCC텳uture Circular Collider)의 규모. 이미 가동 중인 거대강입자충돌기(LHC텹arge Hadron Collider) 둘레의 3배에 달한다. 지도 왼쪽 위 레만 호수를 건너 알프스산맥 자락까지 닿는 거대한 크기로 건설될 예정이다.
▲Shutterstock
초대칭이론(Super Symmetry)은 모든 표준모형 입자들이 스핀의 값이 1/2만큼 다른 짝 입자가 있다고 가정하는 이론이다. 표준모형의 문제점을 잘 해결하는 이론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미래원형가속기(FCC)는 초대칭이론의 증거를 찾아낼 실험 장치로 평가받는다. 입자와 초대칭 입자를 일러스트로 표현했다.

 

“물리학계가 겪어보지 못한 새로운 사이클”

 

 

FCC라는 거대 계획에 우려의 목소리를 내는 물리학자들도 있다. 여기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지금까지 표준모형이 너무 잘 맞아왔기 때문입니다.” 김태정 한양대 물리학과 교수가 설명했다. 6월 13일 정오가 갓 지난 화창한 오후, CERN 레스토랑 1에서 맞은편에 앉은 김형도 교수도 맞장구쳤다. “초대칭이론을 포함해 지난 30년 동안 표준모형을 넘어서려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 실험적으로 검증된 이론이 나타나지 않았기도 하고요.” 

 

여기서 고민이 발생한다. FCC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배경이 미약한 상태에서 이 거대한 기계를 쉽사리 만들 수 있겠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LHC의 주목적 중 하나는 힉스 입자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LHC에서 힉스 입자가 발견된다면 노벨상감이고, 힉스 입자가 발견되지 않아도 노벨상감이었어요. 표준모형이 틀렸다는 결정적인 증거니까요.” 김형도 교수의 말처럼 어떻게 보면 LHC는 연구 성과가 ‘보장되는’ 실험 장치였고, 그래서 유럽의 납세자들과 정치가들로 하여금 예산을 투자하도록 설득하기 쉬웠다. 하지만 FCC는 사정이 다르다. 무엇이 발견될지 명확지 않다. 만에 하나,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으면 어떡하나? 

 

두 번째 걱정은 새 입자가속기가 만들어지기 위한 시간이 갈수록 길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CERN에서 처음 만든 입자가속기인 ‘싱크로사이클로트론(SC)은’ 둘레 15m의 아담한 크기였다. 가속기 실험으로 기존 이론을 검증했고, 이를 토대로 만들어진 새 이론을 검증하기 위해 새 가속기를 만들었다. 이 사이클이 잘 돌아가던 20세기 중반에는 새 입자가 엄청나게 발견됐다. “앞으로 새 입자를 발견하는 사람에겐 벌금을 매겨야 할 것”이라는 농담(혹은 진담)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새 입자가속기가 만들어지는 사이클은 20세기 후반으로 오면서 조금씩 길어졌다. LHC는 완공에 20년이 걸렸고, 다음인 FCC-hh는 완공까지 50년이 예상된다. 입자물리학계가 지금껏 겪어보지 않은 거대한 주기다. “이론 검증은 물론, 후속 세대를 키우기도 쉽지 않습니다. 자신의 이론이나 실험이 증명되는 데 50년을 기다려야 한다는 뜻이니까요.” 김형도 교수는 말했다. 

 

부분적으로는 세계 각지에서 여러 ‘대안 가속기’ 구상이 나오는 이유다. 지금까지 한 번도 충돌시켜 본 적 없는 입자를 충돌시키는 가속기를 FCC보다 더 작고 저렴한 규모로 만들자는 것이다. 3월 31일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의 표지를 장식한 뮤온-뮤온 충돌기가 여기에 속한다. 양성자보다 10배가량 가벼운 뮤온을 가속해 충돌시키면, 훨씬 작은 규모로 가속기를 만들 수 있다.

 

계획 추진 중인 차세대 입자가속기들
 
 
 
 

1허블 우주망원경이 촬영한 거대 은하단 아벨 1689의 암흑물질 지도. 아벨 1689 뒷편 빛이 왜곡되는 중력 렌즈 효과를 분석해 눈에 보이지 않는 암흑물질의 분포를 사진 위에 나타냈다(뿌연 흰색). 암흑물질의 정체  또한 차세대 입자가속기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2쟌 프란체스코 쥬디체 CERN 이론물리부서장이 칠판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칠판은 이론물리학자들의 사교 장소입니다. PDF 시대에 좀 구식으로 보이지만 저는 칠판에 수식을 쓰면서 아이디어를 나누는 이론물리학자들의 전통이 정말 자랑스러워요.”

 

 

입자물리학, 새로운 기회의 새벽 앞에서

 

 

“어쩌면 지금의 상황은 20세기 초 물리학과 비슷할지도 모릅니다. 물리학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기 직전일지도 몰라요.” 유인권 부산대 물리학과 교수는 말했다. 

 

약 1세기 전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당시 몇몇 저명한 물리학자들은 ‘물리학이 완성됐다’고 여겼다. 미국의 물리학자 앨버트 마이컬슨은 1894년 “물리학의 위대한 기본 원리가 대부분 확고히 확립됐고, 물리학의 미래는 소수점 여섯 번째 자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물리학자들에게 남은 일은 더욱 정확한 측정뿐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마이컬슨의 말 이후 약 10년 만에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이라는, 물리학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뒤집을 두 개념적 전환이 등장했다.

 

쥬디체 부서장의 의견도 유 교수와 비슷했다. “상대성이론은 뉴턴의 물리학이 틀렸다고 밝혀낸 게 아닙니다. 뉴턴의 고전 물리학을 더 넓은 범위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확장한 거죠. 앞으로 할 일은 표준모형을 더 넓은 방향으로 확장시키는 겁니다.” 표준모형은 현재까지 나온 이론 중 가장 낫지만, 그럼에도 전체 우주의 겨우 5% 정도만 설명한다. 여전히 더 보편적인 설명을 갈구하는 물리학자들의 손에 들린 계획서가 FCC다. 

 

물론 앞으로 언제, 어떤 새로운 이론이 표준모형을 확장할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우주와 입자를 생각하기를 그만두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본성 중 하나인 호기심은 어떻게든 인간을 우주의 시원을 파악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관심을 쏟도록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CERN의 지난 70년이 그랬다. 서로 전쟁했던 국가들이 전후 10년도 지나지 않아 뭉쳐 위대한 연구를 일궈냈다. 

 

유럽은 지금도 전쟁 중이고, 정치계는 우경화됐다. 이 모든 일에도 물리학자들은 탐구하기를 그만두지 않을 것이다. CERN에서 이론물리학계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쥬디체 부서장은 말했다. 

 

“표준모형은 어느 정도의 층위에서만 우주를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러시아 인형처럼, 쿼크 안에는 또 다른 입자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도 만족할 수 없을 겁니다. 인류는 탐험을 더 넓혀갈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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