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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푸를 다 썼다. 플라스틱 폐기물이 썩지 않고 500년을 간다는 이야기는 이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머리카락만 깨끗한 사람이 될 순 없다. 지구도 같이 깨끗했으면 좋겠다. 최선을 다해 분리배출 하고자 마음먹었다. 우선 플라스틱, 유리, 금속 등으로 구성된 복합소재 펌프는 재활용할 수 없다. 일반쓰레기통에 넣는다. 파란색 페트(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용기는 플라스틱 분리배출 표시가 돼 있다. 잘 씻어 플라스틱으로 분리배출했다.


소비자의 몫이 끝났다고 안심할 때가 아니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된다. 재활용품 선별시설 관계자들은 단독주택에서 수거된 재활용품 중 통상 반입량의 30~40%가 선별되지 않고 버려진다고 말한다. 지난해 한국소비자원에서 충청북도 소재 4개 재활용품 선별시설을 조사한 결과를 살펴보자. 재활용품 선별시설 네 곳 모두 유색 페트는 분리배출 표시가 돼 있더라도 선별하지 않았다. 유색 화장품 용기, 유색 샴푸 용기 모두 포함이다. 재활용했을 때 품질이 나쁘기 때문이다.


게다가 선별장은 바쁘다. 작업자 5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작업자 중 76%(38명)가 선별되지 않는 폐기물이 생기는 원인을 “선별인력에 비해 반입량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라고 꼽았다. 시간은 촉박하고 폐기물은 많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작업자들은 자신들이 성분을 잘 알고 있고, 대체로 깨끗해 ‘믿음직한’ 폐기물만 골라낼 수밖에 없다. 생수병은 믿음직하다. 화장품 용기는 믿음직하지 않다. 고로 우리가 버린 샴푸통은, 토너통은, 로션단지는 아마 다시 태어나지 못할 거다.'


화장품을 다 썼다. 용기는 비었는데 마음엔 뭔가 찝찝한 게 남았다. 죄책감 없는 아름다움을 위해 소비자가, 기업이 고민해야 할 차례다.

 

플라스틱 폐기물을 분리배출할 때 우리는 보통 선별장까지를 상상한다. 하지만 분리배출된 폐기물이 왜 모두 재활용되지 않는지 알려면 그 이후 단계를 살펴야 한다. 선별장에서 플라스틱 폐기물을 선별하거나 버리는 기준은 이후 단계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플레이크 공정

 

선별장에서 선별된 페트(PET·폴리에틸렌 테레프탈레이트) 폐기물은 직육면체 모양으로 압축해 플레이크 공장으로 보낸다. 이렇게 압축한 상태를 ‘베일’이라고 부른다. 베일에는 투명한 페트 외에도 유색 페트나 폴리프로필렌(PP), 고밀도 폴리에틸렌(HDPE) 등 소재로 만든 병뚜껑, PP로 만든 라벨 등이 포함돼있다.


베일을 풀어헤치면 컨베이어벨트 양옆에 늘어선 작업자들이 유색 페트나 오염물질 등을 손으로 일일이 골라낸다. 인력은 곧 인건비다. 업체 입장에선 애초에 선별장에서 오염물질 없이 투명 페트만 잘 선별된 베일을 구매하려 할 수밖에 없다. 폐기물의 순도가 낮아 플레이크 공장에서 선별장 측에 항의하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이 때문에 선별장에서는 문제 발생 소지를 줄이려고 깨끗하고 믿음직한 생수병 위주로 선별하는 것이다.

 
그다음 병뚜껑이나 라벨을 분리하지 않은 상태 그대로 분쇄 과정을 거친다. 새끼손톱만 한 조각으로 분쇄된 플라스틱 폐기물은 이후 큰 수조에 담근다. 비중 분리과정이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혼합물의 분리과정을 떠올리면 쉽다. 쌀과 쭉정이가 섞인 혼합물을 분리하기 위해선 일일이 골라내기보다 물에 담그는 게 편하다. 쌀은 가라앉고 쭉정이는 떠오른다. 마찬가지다. 페트는 물보다 밀도가 높고, PP는 물보다 밀도가 낮다. 이 혼합물을 물에 담그면 페트는 가라앉고 PP로 만든 라벨이나 병뚜껑 등은 물 위에 뜬다. 가라앉아 있는 페트만 잘 골라내면 된다. 업체에 따라선 큰 선풍기를 틀어 상대적으로 가벼운 라벨을 날리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이후 세척과정을 거친 뒤 재질 선별기나 광학 선별기를 통해 페트 외 재질을 다시 한번 제거한다. 그러면 비로소 투명 페트 플레이크가 다음 공정으로 넘어갈 준비를 마친다. 재질 선별기나 광학 선별기를 갖추지 못하면 사람 손을 또다시 거쳐야 한다. 인건비가 더 드는 한편 투명 페트 플레이크의 순도도 나빠진다.


2020년 12월부터 공동주택에서 투명플라스틱 분리배출이 의무화됐다. 올해 들어선 생수 제조업체들이 라벨을 없애거나 쉽게 뗄 수 있는 용기를 속속 내놓고 있다. 정책의 변화, 기업의 변화는 현장에서 체감된다. 플레이크 공장 관계자는 “과거에 비해서 선별하기도 훨씬 수월해졌고, 플라스틱 폐기물의 품질도 많이 좋아졌다”고 했다. 이어 “하지만 여전히 재활용이 어려운 유색 플라스틱이 전체의 10% 정도를 차지한다”며 “유색 플라스틱 폐기물의 비율이 줄수록 투명 페트 플레이크의 품질도 개선되고, 공정 비용도 줄어들 것”이라고 짚었다.


펠릿 공정

 

투명 페트 플레이크는 이제 펠릿 공장으로 향한다. 여기서 잘게 썬 플레이크를 녹인 뒤 다시 굳혀 균일한 품질의 ‘펠릿’으로 재탄생시킨다. 우선 플레이크를 녹인 다음 선별장에서 미처 제거하지 못한 모래나 나무조각 등 오염물질을 거른다. 그다음 동글동글한 쌀알 모양의 펠릿으로 다시 굳힌다. 마치 쌀가루를 잘 반죽해 가래떡을 뽑은 다음 이걸 잘라 떡국 떡을 만드는 과정처럼.


선별장부터 플레이크 공정, 펠릿 공정까지 걸러내는 오염물질의 크기가 점차 작아졌다. 마지막은 눈에 보이지 않는 화학적 오염물질이다. 플라스틱은 분자량이 매우 높은 고분자물질이다. 분자량이 작은 단위분자인 단량체가 그물 모양으로 길게 연결된 형태다. 이 사이사이에 물이나 오염물질이 끼어 있으면 플라스틱의 품질이 나빠진다. 고상중합단계에서는 산소가 차단된 환경에서 펠릿에 질소를 공급한다. 그러면 질소가 펠릿을 통과하면서 펠릿 속에 끼어있는 수분과 화학적 오염물질을 제거한다.


결국, 플라스틱 재활용을 위한 모든 공정이 오염물질을 없애는 작업인 셈이다. 펠릿 공장 관계자는 “플레이크를 구매할 때도 순도는 중요한 요소”라며 “순도와 수분율, 플레이크 크기의 균일성 등이 어떻게 관리되는지 면밀히 따져 거래처를 선택한다”고 했다. 그러나 플레이크 공장에서도 품질관리가 쉬운 일은 아니다. 관계자는 이어 “대부분 영세업체다 보니 비싼 설비와 많은 인원을 투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 차원에서 분리배출된 폐기물을 회수하고 선별한 뒤 플레이크를 만드는 과정을 별도의 가이드라인으로 관리하지 않아 업체에 따라 품질이 크게 다르다”고 했다.


화학적 오염물질까지 제거하면 비로소 재생원료 페트 펠릿이 된다. 이제 다시 제조업체에 납품돼 용기로 재탄생한다. 펠릿 공장 관계자는 “현재는 주로 일부 대기업에서 해외 시장을 겨냥해 친환경 제품을 만들고자 재생원료 페트 펠릿을 많이 찾는 상황”이라고 했다. 이어 “태생이 플라스틱 폐기물인지라 재생원료 페트의 품질이 일반 페트에 비해 안좋을 수밖에 없다”며 “이런 이유로 아직 국내에선 수요가 많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귀찮음을 감수할 소비자의 ‘용기’

 

기업은 소비자를 따라간다. 소비자가 요즘 ‘힙’하다고 여기는 코드는 ‘친환경’이다. 잘 썩어 사라지는 나무 소재의 칫솔을 쓰고, 카페에서 커피를 살 때도 일회용 컵 대신 텀블러를 내민다. 생활 속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최소한으로 줄여 환경에 부담을 주지 않는 삶의 방식을 ‘제로 웨이스트’라고 부른다. 그 중심에는 용기를 가져가면 내용물을 채워주는 ‘리필 스테이션’이 있다.


7월 1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위치한 아로마티카의 ‘제로 스테이션’을 찾았다.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하고 있다는 아로마티카 환경팀의 주희정, 채예인 씨와 기획팀 박수민 씨가 이날 기자와 동행했다. 출입구에 적힌 ‘잔재 쓰레기 제로를 꿈꾸는 기지입니다’란 문구가 눈길을 끈다. 기지라는 말이 딱 알맞은 공간이다. 제로 스테이션은 아로마티카의 철학을 홍보함과 동시에 플라스틱이 쓰레기가 되지 않고 무한하게 순환하는 세상을 위한 기업과 소비자의 고민이 꽉꽉 눌러담겨있는 곳이었다.


우선 건물 밖의 분리배출함이 눈에 띈다. 이곳에서 아로마티카 제품 공병이나 빈 생수병 등 플라스틱 폐기물을 모은다. 옆에는 이렇게 모은 플라스틱 폐기물을 플레이크 공장에 가져다줄 전기 트럭이 든든하게 서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카페와 아로마티카의 제품을 파는 판매대가 반긴다. 친환경 공법으로 만든 아로마 오일의 향기가 마음을 편하게 한다. 소비자들은 이곳에서 직접 발효한 콤부차를 마시며 쉬어갈 수 있다. 제로 스테이션의 문턱을 낮추는 역할이다. 환경교육을 맡고 있는 채 씨는 “같은 만 원을 쓰더라도 제품을 만드는 브랜드의 이야기를 듣고 구매하려는 게 요즘 가치소비 트렌드”라며 “지속가능한 뷰티에 대한 기업의 책임감을 보여줘 자연스럽게 가치소비를 하려는 고객이 늘어나도록 유도하려 한다”고 했다.


가장 깊숙이에는 소비자가 빈 용기를 가져오면 아로마티카의 제품을 채워 판매하는 리필 스테이션이 자리 잡고 있다. 샴푸, 로션, 클렌징오일, 토너 등 종류도 다양하다. 빈 용기는 반찬통, 꿀단지 등 어느 것이든 상관없다. 실질적인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주도하는 공간이다. 


제로 스테이션의 관리를 담당하는 주 씨는 “인근 직장인들은 소용량으로 자주 사가며 다양한 제품을 사용해보기도 하고, 두세 달에 한 번씩 주기적으로 찾는 고객도 많다”며 “리필 스테이션이 있다는 걸 알고 경기도나 충남, 부산 등에서 일부러 시간 내 찾아오는 경우도 봤다”고 했다. 이어 “아로마티카 제품에 대한 신뢰가 있으면서 가치소비를 통한 만족감을 얻으려는 최근 소비자들의 경향이 드러난 사례”라고 했다.


오프라인 샵이 두 곳뿐인 아로마티카의 상황을 타개함과 동시에 제로 웨이스트 운동을 촉진하고자 전국 90여 곳의 리필 스테이션과 연대도 하고 있다. 리필 스테이션 전용으로 제작한 대용량 제품을 납품해 어디서든 아로마티카의 제품을 구매하면서 제로 웨이스트를 실천할 수 있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환경교육 또한 이 곳에서 이루어진다. 교사의 인솔로 학생들이 단체로 찾아오는 일도 잦다. 하지만 여기서 멈춰서는 안된다는 생각이다. 채 씨는 “업계 관계자들도 많이 방문한다”며 “아로마티카의 노력을 벤치마킹하러 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어 “폐기물 문제 해결을 위해 화장품 업계가 어떤 책임감을 가져야 할지 이야기하는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했다.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목소리는 퍼지고 있다. 제로 스테이션의 오픈단계부터 기획에 참여했던 박 씨는 “프랑스에서 살았던 적이 있는데, 당시 유럽은 식품, 생필품 등 다양한 물품을 따로 준비해 간 용기에 포장해올 수 있는 문화가 자리잡았다”며 “한국에 왔을 당시엔 그런 문화가 마련돼있지 않아서 김밥 집에서 락앤락을 내밀었더니 의아해하는 눈길을 받은 적도 부지기수였다”고 했다. 이어 “요즘 들어선 제로 웨이스트 운동에 동참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판매자들도 더 익숙해하는 추세”라고 했다.


채 씨는 “쉐어하우스에서 친구들과 함께 살고 있는데, 이제는 모두 아로마티카 제품을 리필해가며 사용한다”며 “사용 주기가 비슷하니까, 제품을 다 쓸 때가 되면 동시에 용기를 세척해 주방에 건조해두다가 직원인 나에게 리필셔틀을 맡기곤 한다”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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