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열혈 게이머들은 컴퓨터 앞으로 출근하고 침대로 퇴근한다. 자발적으로 밤샘 근무도 한다. “게임이 밥 먹여주냐?”란 말을 들을 때면 가슴이 콕콕 아프다. 열심히 게임을 해도 불어나는 건 컴퓨터 속 내 분신의 재산뿐이니까. 그런데 정말로 게임이 밥을 먹여줄 전망이다. 돈을 벌 수 있는 게임, P2E(Play to Earn) 게임이 몰려오고 있다.
이런 흐름에 가장 먼저 뛰어든 두 소년을 만났다.
지난 4월 29일 봄비를 맞으며 부산으로 향했다. 서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희형(금성고 2학년) 군과 이예준(부산중 1학년) 군은 자신을 각각 ‘희동’과 ‘럭키’라고 소개했다. 희동과 럭키는 이 형제가 ‘더 샌드박스’ 안팎에서 사용하는 예명이다. 더 샌드박스는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한 P2E(Play to Earn) 게임이다. P2E는 게임을 하며 돈을 버는 개념이다. P2E 게임의 플레이어들은 게임 속에서 얻은 게임머니나 아이템 등을 현금화할 수 있다.
더 샌드박스 속에서 형제는 학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크리에이터’와 ‘게임메이커’란 직함으로 활약하고 있다. 더 샌드박스는 플레이어들이 직접 게임을 만들고, 디자인한 뒤 자신이 만든 작품을 거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기존 게임과 다르다. 더 샌드박스는 이런 식으로 플레이어들이 게임 속 세상에서 거래하며 번 돈을 현금으로 전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든다.
게임 속에서 번 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을 수 있다
게임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P2E 게임이 잇달아 출시되고 있다. 국내 게임사가 내놓은 P2E 게임으로는 지난해 8월 위메이드가 출시한 ‘미르4 글로벌’이 대표적이다. P2E가 적용된 첫 대규모 다중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MORPG) 게임으로 지난해 11월 11일 동시 접속자 130만을 돌파하는 흥행을 거뒀다. MMORPG 게임은 플레이어가 인터넷 서버에 구현된 가상 세계 속을 자유롭게 누비며 다양한 활동을 수행할 수 있는 게임이다. 메이플스토리,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야생의 땅: 듀랑고 등이 있다.
미르4 글로벌에서 번 돈으로 떡볶이를 사 먹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미르4 글로벌 속에서 퀘스트를 수행하면 보상으로 ‘흑철’을 받을 수 있다. 이 흑철을 모아 ‘드레이코’로 교환한다. 드레이코는 위메이드의 가상화폐 지갑 ‘위믹스 월렛’에서 ‘위믹스(WEMIX)’란 가상화폐로 전환된다. 이걸 위믹스를 거래하는 빗썸 등 가상화폐 거래소에서 현금화하면 현실 속에서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생긴다.
이렇게 게임 속 재화를 가상화폐 형태로 바꾸기 위해선 플레이어가 자신이 보유한 재화의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어야 한다. P2E 게임은 대체 불가 토큰(NFT·Non-Fungible Token)을 이용해 소유권을 보증한다. NFT는 디지털 자산의 소유주를 증명하는 가상의 토큰이다. 교환과 복제를 할 수 없어 디지털 보증서의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앞서 소개한 크립토키티의 고양이 캐릭터와 미르4 글로벌의 캐릭터 모두 NFT로 소유권을 인정받는다. 넷마블의 신작 슈팅 게임 ‘골든브로스’, 카카오게임즈의 골프 게임 ‘버디샷’ 등도 모두 게임 속 재화를 NFT화 한 뒤 가상화폐로 전환하는 시스템이 기본 뼈대다.
‘P2E+NFT+메타버스’의 새로운 생태계
희동과 럭키가 활약하는 더 샌드박스의 경우 한술 더 떴다. 플레이어들이 직접 게임 속 세상을 만들고, 이 과정에서 돈을 벌 수 있는 생태계를 구축한 것이다. 이승희 더 샌드박스 한국 총괄이사는 “더 샌드박스의 목표는 플레이어들이 주도해 게임 안에 하나의 생태계를 만들도록 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 샌드박스의 경제 체계는 ‘샌드’ ‘랜드’ ‘애셋’ ‘젬’ 그리고 ‘게임’의 다섯 토큰으로 구성된다. 이 토큰들은 더 샌드박스가 구현한 메타버스 속에서 서로 상호작용하며 하나의 경제 체계를 이룬다.
희동의 직업인 크리에이터를 예로 들어보자. 크리에이터는 게임 캐릭터, 아이템 등 더 샌드박스 속 세상의 보이는 요소를 구현한다. 집도, 담장을 타고 올라가는 담쟁이도, 그 앞을 걸어가는 농부 캐릭터도, 혹은 용이나 우주선까지도 크리에이터가 만든다. 이들이 만든 자산을 애셋이라고 한다.
평소에 플레이하던 게임 속 아이템들을 떠올려보자. 유리병 속에 담긴 빨간 액체는 파워를 높여주는 능력이 있다. 멋들어진 신발은 보통 이동 속도를 높여주기 마련이다. 이렇게 애셋에 능력을 부여하는 건 젬이 맡는다. 애셋을 디자인하고 젬으로 능력을 부여하는 것 모두 크리에이터 마음이다.
크리에이터는 공들여 만든 아이템이나 캐릭터, 건축물 등 애셋을 마켓 플레이스에 올려 판매할 수 있다. 마켓 플레이스에선 더 샌드박스 속 화폐인 샌드로 애셋을 사고판다. 애셋을 구매해 자신이 만든 게임에 배치할 수 있다. 희동의 동생, 럭키의 직업은 게임 메이커다. 럭키가 만든 게임 중 하나는 맵 한쪽 끝에서 용을 타고 반대편까지 날아가 트로피를 얻는 게임이다. 그는 “만드는 데 한 세 시간 걸렸나 그랬어요”라며 “재미로 만들었던 맵”이라고 소개했다.
럭키가 만든 게임은 가상 공간에서 만들고, 전시할 수도 있지만 랜드 위에 올려 다른 플레이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서비스할 수도 있다. 더 샌드박스에는 이런 랜드가 16만 6464개 있고, 현재 70% 이상 판매된 상태다. 이 총괄이사는 “랜드는 일종의 개별화된 서버”라며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만들거나 구매한 콘텐츠를 랜드 위에 올려 다른 플레이어들에게 서비스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게임 속 세상으로 출퇴근하는 세상이 오려면
희동과 럭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기자도 도전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긴다. 기자처럼 게임 속에 열린 새로운 세상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 총괄이사는 “현재 더 샌드박스에서는 전 세계 3만 명의 크리에이터들이 활동하고 있다”며 “한국의 경우 희동 님처럼 아직 학생인 크리에이터도 있고, 60대 이상의 나이 지긋한 크리에이터도 있다”고 소개했다.
동대문구 사회적경제지원센터에서는 경력 단절 여성에게 더 샌드박스 내에서 에셋을 만들 때 사용하는 복스에딧 사용법을 알려주는 수업도 개설한 적 있다. 게임 속 새로운 경제 체계는 창의력만 있다면 나이와 조건,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뛰어들 수 있는 기회의 장이 된다.
이 총괄이사는 “현재 아직 정식 서비스 단계가 아닌 알파 테스트 단계라 빠른 시일 내에 베타 테스트를 시작한 뒤 오픈하는 것이 목표”라며 “정식 서비스를 시작하면 크리에이터와 게임 메이커 외에도 ‘목 좋은’ 랜드가 어딘지 소개하는 공인중개사나 불법 콘텐츠를 찾아 신고하는 전문 헌터 등 다양한 직업군이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태어날 때부터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것이 익숙한 Z세대나, 게임 속에서 물건을 거래하는 게 익숙한 게이머들에게 메타버스 내 경제활동은 낯선 것이 아니다. 이 총괄이사는 “내 옷은 상관없지만 내 아바타의 옷은 중요한 세대가 성장하면서 디지털과 현실 사이의 가치 우선순위가 뒤바뀌고 있다”며 “메타버스는 성장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라고 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P2E 게임이 성장하기까지 해결과제가 남았다.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제32조 7항은 “누구든지 게임물의 이용을 통하여 획득한 유·무형의 결과물을 환전 또는 환전 알선하거나 재매입을 업으로 하는 행위”를 금한다. 여기에서 유·무형의 결과물이란 검수, 경품, 게임 내에서 사용되는 가상의 화폐로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게임머니 및 대통령령이 정하는 이와 유사한 것을 말한다. 이 때문에 앞서 소개한 미르4 글로벌, 골든브로스, 버디샷 모두 국내 시장이 아닌 글로벌 시장을 겨냥해 출시됐다. 규제 때문에 P2E 게임을 자국에서 서비스할 수 없는 국가는 한국, 중국 등 일부 국가로 손에 꼽는다.
한장겸 샌드박스네트워크 총괄 부사장은 지난 4월 21일 열린 ‘제3회 디움 가상자산 국회 세미나’에서 “이전 시대에 맞춰 생긴 규제 때문에 현재 국내 게임 시장은 우물 안 개구리로 남은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한편 우려도 있다. 같은 세미나에서 이철우 게임물관리위원회 법무담당관은 “바다이야기 사태처럼 게임의 결과물이 이용자의 이익과 직결되는 일은 자칫 사행성 게임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