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버리고 싶은 순간이 하나쯤은 있다. 본의 아니게 내뱉은 말 로 가족과 친구에게 상처를 줬던 기억, 머릿속 을 떠나지 않는 결정적 실수와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사고들, 술에 취해 나도 모르게 옛 연인에 게 걸었던 전화까지….
그러나 막상 기억을 지울 수 있게 된다면 선뜻 그 기회를 사용할까. 드라마 ‘도깨비’에서는 저승사자가 이승의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에게 현생의 기억을 잊게 만드는 ‘망각의 차’를 내어 준다. 망각의 차 앞에서 사람들은 화려했던 삶에 대한 아쉬움, 아끼는 사람에 대한 사랑 등을 떠올리며 마시기를 주저한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악인에게는 차를 주지 않으며 이렇게 말한 다. “넌 이미 지옥에 있는 거야. 네가 한 짓을 후회하겠지만 그 고통을 영원히 기억할 거니까.” 인간은 자신의 기억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없기 때문에 삶이 때로는 천국 같고 때로는 지옥 같다. 만약 우리가 원하는 기억들만 남기고 원치 않는 기억들을 지울 수 있다면 우리의 삶 은 더욱 행복할까.
기억의 저장
시냅스의 연결성 안에 기억이 있다
저장된 기억은 우리 머릿속에 매우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다. 질병이나 노화 등으로 신경세포가 사멸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유지된다. 우리는 매 순간 다양한 자극과 정보에 노출 되고, 이들은 감각기관을 통해 받아들여져 뇌로 전달된다. 뇌로 전달된 정보들은 감각기관이나 뇌의 특정 부위에 잠시 머무르다 사라진 다. 지하철이나 버스를 타면서 처음 보게 된 사람들의 얼굴을 금방 잊어버리는 것이 대표적이다. 만약 그 사람들 중 하나가 큰소리로 전화 통화를 한다면 눈길이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일상적으로 많이 볼 수 있는 광경이므로 이 내 잊혀질텐데, 이때 잠시 저장됐다가 사라지 는 그 기억을 ‘단기기억’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사람이 마스크를 내리고 재채기를 했고 이를 주변에서 만류하는 통에 고성이 오간다면, 이제 그 사람의 얼굴은 최소 하루 이상 기억에 남을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정보는 이제 ‘장기 기억’의 영역에 들어서게 된다. 단기기억 정보 중 일부는 이렇게 얼마나 의미 있는지, 또는 얼마나 반복됐는지에 따라 장기기억으로 전환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실은 내 친구의 가족이었다면, 아마 그 특정인과 관련된 사건은 평생 기억에 남을 수 있다. 이처럼 기억 정보가 뇌 안에 ‘단단하게’ 자리 잡는 현상을 ‘강화(consolidation)’라 부른다.
내가 그 사람의 특징을 상당히 오랫동안 기억한다면, 이 정보는 머릿속에 어떤 형태로든 남아 있게 된다. 학습되는 정보들은 실체가 없지만, 특정 과정을 거쳐서 뇌 속에 각인된다. 마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귀를 통해 들어오면서 ‘뇌’라는 컴퓨터에 디지털 파일로 저장되는 것과 비슷하다. 1904년 독일의 학자인 리하르트 제몬은 기억 정보를 담고 있는 뇌 속 흔적을 ‘엔그램(engram)’이라고 정의했다. 지난 100여 년간 엔그램의 실체를 밝히기 위한 연구가 진행돼 왔지만 여전히 엔그램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많은 학자들이 노력 끝에 얻어낸 최소한의 결론은 ‘기억이란 신경세포 사이의 연결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신경세포는 시냅스라는 구조를 통해 서로 소통하는데, 시냅스의 연결 강도가 높아지면 정보가 저장된다는 것이다. 현재까지의 연구에 따르면, 기억 정보 는 시냅스 또는 신경세포들 속에 나뉘어 저장돼 있다. 이때 엔그램이 나뉘어 담겨 있는 특정 무리의 시냅스 또는 세포 사이에 최적화된 연결성이 기억 정보를 끌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필자의 연구팀은 정원석 KAIST 생명과학과 교수팀과 함께 시냅스 연결성이 정상적으로 유지돼야 기억이 형성될 수 있음을 밝혔다. 연결성의 최적화를 방해하면 기억을 저장하거나 떠올리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doi: 10.1038/s41586-020-03060-3
기억의 변형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다
저장된 음악 파일을 재생시키면 원래의 음악 그대로 흘러나온다. 저장된 기억 역시 ‘인출(retrieval)’되면서 처음 기억된 정보를 그대로 되살린다. 그러나 음악 파일과 달리 단단하던 기억 정보들은 인출시키는 순간 ‘말랑해져’ 변형이 가능해지는 특성이 있다. 이는 마치 본래 의 음악 파일을 재생시키는 동안 녹음 기능이 동시에 실행되는 것과 같다. 만일 조용한 방에서 음악이 재생된다면 원곡은 크게 변형되지 않은 상태로 남겠지만, 다른 음악이 흐르거나 잡담으로 가득한 방이라면 원래 음악은 재생하는 동안 녹음된 다른 소리가 겹쳐 원래와 달라진 음성 정보가 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수많은 정보가 수시로 입력되는 장소다. 인출되는 동안 말랑해진 기억 정보는 동시에 새로이 입력된 정보에 의해 변형될 수 있다. 기억을 떠올린 후 인출됐던 정보들은, 잡음이 섞인 음악이 다시 녹음되듯이 ‘재강화(re-consolidation)’ 과정을 통해 뇌 속 원래 자리에 다시 단단히 자리를 잡게 된다. 이 과정에서 재강화된 기억은 원래 기억 정보를 대체해 머릿속에 남게 된다. 정리하면, 기억은 강화(저장)-인출-재강화의 과정을 거치게 되고 인출과 재강화 과정에서 변형될 가능성이 생긴다.
옛 기억을 회상하려 할 때 그 기억이 오히려 왜곡되는 경우도 있다. 2001년 미국 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가 이끄는 연구팀은 유명 만화 캐릭터 벅스버니가 담긴 광고물을 가짜로 제작했다. 이 광고물은 미국 디즈니랜드에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가짜 광고물을 예전에 디즈니랜드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보여주며 디즈니랜드에 다녀왔던 경험을 회상하게 했더니, 놀랍게도 많은 실험 참가자들이 디즈니랜드에서 벅스버니를 본 기억을 떠올렸다. 심지어 일부는 자신이 디즈니랜드에서 벅스버니를 만져보기도 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기억의 왜곡도 과거 기억을 인출하는 과정에 본래의 기억과 약간의 연관성이 있는 거짓 정보가 삽입돼 재강화됨으로써, 거짓 정보가 섞인 기억이 원래 기억을 대체한 결과다.
기억의 삭제
기억은 신의 선물, 망각은 신의 축복
처음 질문으로 돌아와서, 특정한 기억을 지우고 싶다고 해보자. 기억이 취약해지는 순간을 노리면 나쁜 기억을 삭제할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인출된 기억의 재강화를 저해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연관된 부정적 기억을 줄인 사례가 있다. 정신과 치료제의 일종인 프로프라놀롤은 노르에피네프린 수용체를 억제해 혈압을 조절하는 데 쓰이는데, 기억 재강화 작용을 저해하는 데에도 쓰일 수 있다. 알랭 브루넷 캐나다 맥길대 교수팀이 2018년 미국정신의학협회지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PTSD 환자들이 안 좋은 기억을 떠올리기 직전에 프로프라놀롤을 투여했더니 증상이 완화됐다. doi: 10.1176/appi.ajp.2017.17050481 물론 프로프라놀롤에 의한 효과가 일시적이거나 제한적이라는 보고도 잇따르고 있으므로 심도 있는 검증이 더 필요하다.
원래의 기억에 심한 변형을 가하는 방법으로 기억을 제거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어렸을 때 빨간 목줄을 매고 있는 큰 개가 무섭게 짖어 공포에 떨었던 경험이 있다면 빨간 목줄과 개만 보아도 공포심이 들 것이다. 하지만 빨간 목줄을 볼 때마다 땅바닥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줍게 된다던가 경품에 당첨된다면, 빨간 목줄과 연관돼 있던 개에 대한 공포기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 경우 나쁜 기억을 삭제하기 위해 이들을 떠올리는 고통을 수반해야 할 수 있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보완한 최신 연구결과가 있다. 2016년 미국·영국·일본 공동 연구팀은 공포 기억과 관련된 뇌의 활성이 나타나는 순간 긍정적인 보상을 연결시키는 ‘디코디드 뉴로피드백(decoded neurofeedback)’을 소개했다. doi: 10.1038/s41562-016-0006 공포 기억에 해당하는 뇌활성을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및 인공지능(AI) 기반의 분석기술을 활용해 실시간으로 분석하고 감지해, 기억정보를 떠올리지 않아도 뇌활성 패턴 분석만으로 부정적 기억 정보를 미리 읽을 수 있는 방법이다. 부정적 기억 정보가 감지될 때 긍정적인 정보를 반복적으로 주입하면 피험자는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도 고통과 스트레스를 느끼지 않고 공포기억을 감소시킬 수 있었다.
기억의 재창조
가짜 기억도 만들 수 있을까?
앞서 보여준 사례들은 참된 정보에 거짓 정보를 주입해 원래 기억을 거짓 기억으로 대체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럼 영화 ‘공각기동대’에서처럼 개인의 경험과 전혀 상관없는 기억을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것도 가능할까 궁금해진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가능성으로 보여주는 실험동물 대상 연구결과가 있다. 2013년 도네가와 스스무 미국 메사추세츠공대(MIT) 교수팀은 특정 기억 정보를 담고 있는 신경세포의 무리, 즉 엔그램 세포들을 인위적인 조건에서 활성화시키면 가짜 기억이 생겨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연구팀은 생쥐에게 전기충격과 상관없는 공간을 기억하게 한 뒤, 전혀 다른 공간에서 전기충격을 줘 공포 기억을 만들었다. 그 후 전기충격을 주고 동시에 전기충격과 상관없는 공간 기억 정보를 담은 세포들을 광유전학적으로 활성화시켰더니, 생쥐들은 전기충격과 상관없는 공간에서 오히려 공포 기억을 떠올렸다. doi:10.1126/science.1239073
비유하자면 어떤 방에 들어갔더니 무서운 지네 떼가 있었고, 곧바로 옆방으로 갔더니 편안함을 느끼게 하는 벽지가 발라져 있다고 하자. 그런데 무서운 지네 떼를 만난 기억이 편안한 벽지의 방 기억과 합쳐지도록 광유전학적 활성 조작기술을 사용한다면, 이제는 편안한 벽지의 방을 지네 떼가 나오던 곳으로 기억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기억을 구성하는 정보들의 연합관계를 인위적으로 조작하면 망각뿐만 아니라 새로운 기억을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연구결과였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억 편집 기술은 기억이 취약해지는 순간을 얼마나 잘 포착하고 얼마나 효율적으로 이를 변형시킬 수 있는가에 따라 향후 활용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기억 편집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다른 깊은 고민을 낳을 것이 분명하다. 1990년대 초반 미국에서 정신치료나 상담을 받은 일부의 사람들이 최면과 암시 등을 통해 실제 존재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 폭행, 성적 학대 등의 기억을 갖게 된 ‘거짓 기억 증후군’이라는 사건이 있었다. 이 가짜 기억에 근거해 소송 사건이 벌어지게 됐는데, 일부 소송에서는 학대의 증거를 찾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한참 뒤에 무죄로 밝혀진 경우도 있다. 의도치 않게 거짓 기억을 갖게 된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허구인지 몰라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기억하는 것이 곧 사는 것이다’라는 격언처럼 기억은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요소이며 좋고 나쁜 모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해석하고 미래를 계획하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기억의 편집은 인생의 편집일 수도 있다.
또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임을 감안한다면, 누군가의 기억을 편집한다는 것은 내 주변 사람의 기억도 편집하는 효과를 낳게 돼 그들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집단의 기억, 즉 역사도 마찬가지다. 개인과 집단의 원치 않는 기억을 손쉽게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삭제한다면 반성은 없어지고 화합은 무너져서 또 다른 고통의 기억을 남길지도 모른다. 가치와 무관하게 무엇을 기억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능력이자 선물이라면, 가끔 감당할 수 없는 기억을 덮어둘 수 있는 망각은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정말 필요할 때만 사용 가능한 축복이자 ‘치트키’다. 치트키를 무분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된다면 오히려 그 게임의 재미와 의미가 사라진다. 기억과 망각 역시 그
와 비슷할 것이다.
※필자소개.
박형주. 한국뇌연구원 신경혈관단위체 연구그룹에서 근무 중이며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뇌인지과학전공 겸임교수다. 현재 생쥐 모델을 활용해 학습과 기억을 조절하는 세포간 상호작용의 분자 기전을 연구하고 있으며, 뇌 속 기억 형성 및 변화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결과를 일반인들에게 소개하는 저술 작업도 같이하고 있다. phj.mnb@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