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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으로 살펴본 과잉기억증후군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이 한 조각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저장된다면 어떨까.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기억하는 증상인 ‘과잉기억증후군’을 소재로 한 드라마가 나왔다. 과잉기억증후군은 다양한 작품 속에 등장해온 유명세에 비해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다. 현재 전 세계에서 과잉기억증후군 진단을 받은 사람도 100명 남짓이다. 과학은 이들에게서 과잉기억증후군의 비밀을 어디까지 밝혀냈을까.

 

천재적 기억력, 뇌 구조 다를까? 


드라마 ‘그 남자의 기억법’에서 주인공 이정훈(김동욱)이 프롬프터 없이도 뉴스를 진행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과잉기억증후군(HSAM)’을 앓고 있다는 극중 설정 때문이다. 과잉기억증후군은 한 번 보거나 겪은 일을 세세하게 모두 기억하는 증상이다. 


과잉기억증후군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건 2006년이다. 제임스 맥거프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UC어바인) 신경생물학과 교수는 열한 살 이후 자신이 겪은 모든 일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AJ(이후 본명이 ‘질 프라이스’로 밝혀짐)’의 사례를 학계에 보고했다. doi: 10.1080/13554790500473680 

 


AJ는 과거 특정일에 방문한 장소와 날씨, 그날 일어난 사건, 감정까지 세밀하게 기억해냈다. 가령 1980년 8월 29일에 무엇을 했냐는 질문에 “금요일, 노동절 주말이라 친구와 쌍둥이, 가족과 함께 팜스프링스에 갔어요. 도착하기 전에 비키니 왁스를 샀고, 우리는 계속 소리를 질렀죠”라고 답했다. 그의 말은 그가 열 살부터 꾸준히 작성해 온 일기로 사실임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의 남다른 기억력은 오직 ‘자전적 기억(autobiographical memory)’에 한해서만 재능을 보였다. 즉 개인의 사적인 삶이나 일화가 포함된 경험만 정확하게 기억했다. 타인과 관련된 기억이나 암기 학습과 같은 능력은 평범했다. 학업 성적면에서도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AJ 이후 보고된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들도 같은 양상을 보였다. 맥거프 교수는 후속 연구로 AJ를 포함한 과잉기억증후군 환자 11명의 뇌를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로 스캔했다. 그 결과 자전적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인 해마곁이랑과 미상핵, 뒤쪽뇌섬엽, 마루엽속고랑 등 9개 영역의 크기와 모양이 일반인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doi: 10.1016/j.nlm.2012.05.002 


기억은 뇌의 해마와 편도체, 대뇌피질에 있는 뉴런에 구조적 변화가 일어나며 형성되는데, 특히 자전적 기억은 해마와 해마곁이랑 뉴런간의 시냅스 연결이 강화되며 형성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인아 서울대 뇌인지과학과 교수는 “과잉기억증후군 환자에게서 찾아낸 공통된 뇌 구조가 질병의 원인이라고 단정 짓긴 어렵다”며 “오히려 많은 것을 기억하며 이 부분을 계속 활용한 결과일 수도 있으며, 전 세계적으로 사례가 60여 건에 불과하기 때문에 개인차를 보정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과잉기억증후군은 강박장애? 


맥거프 교수의 연구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점은 미상핵의 차이다. 미상핵은 대뇌반구의 기저부에 있는 회백질 덩어리로, 미상핵과 전두엽 피질, 시상을 연결하는 회로가 불안정하면 강박장애 증상이 나타난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 2006년 첫 번째로 과잉기억증후군을 진단받은 AJ는 일기에, 2009년 세계에서 네 번째로 진단을 받은 환자는 청결에 강박적 사고와 행동을 보였다.


크레이그 스타크 미국 어바인 캘리포니아대(UC어바인) 행동신경생물학과 교수는 과잉기억증후군이 강박장애의 한 유형일 수 있다는 논문을 2016년 1월 국제 학술지 ‘프론티어스 인 사이콜로지’에 발표했다. doi: 10.3389/fpsyg.2015.02017


스타크 교수는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를 대상으로 기억 회상 실험을 했다. 1주일 전, 1달 전, 1년 전, 10년 전 개인적인 사건을 반복적으로 기억해내도록 하면서 기억의 정확도와 세세한 정도를 평가했다. 과잉기억증후군 환자의 1주일 전 기억은 일반인과 차이가 없었지만, 1달, 1년, 10년 전 기억력은 일반인보다 뛰어났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일반인과 달리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들은 단조롭고 일상적인 일들을 마치 특별한 일화처럼 기억했다. 스타크 교수는 자전적 기억을 강박적으로 수집한 결과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특정 영역에서 비범한 기억력을 보이는 것은 자폐증이나 지적장애를 가진 사람이 암산, 기억, 퍼즐 맞추기 등 특정 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능력을 발휘하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의 증상과도 일부 유사하다. 


이 교수는 “서번트 증후군은 과잉기억증후군과 달리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보다는 수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을 기억하고 처리하는 데 능하다”며 “전방측두엽의 뇌 손상으로 인해 발생한 경우가 보고되긴 했지만, 역시 정확한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픈 기억을 지우는 ‘능동적 망각’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는 기억을 회상할 때 기쁨과 좌절, 분노, 고통과 같은 당시의 감정도 함께 떠올린다. AJ도 맥거프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열한 살 무렵 이사로 친구와 생이별을 했던 상황과 감정이 또렷이 기억난다”고 말했다. 과잉기억증후군은 망각을 하지 못해 생기는 현상일까. 


과잉기억증후군이 망각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진 ‘능동적 망각’ 기능을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들도 갖고 있을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능동적 망각은 우리 뇌가 무섭고 고통스러운 기억을 지우는 기능이다. 2012년 로날드 데이비스 미국 스크립스연구소 연구원팀은 초파리를 이용해 능동적 망각에 도파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연구팀은 도파민 분비 뉴런의 활성도를 조절할 수 있는 유전자 변형 초파리로 실험을 진행했다. 초파리의 후각 기억에 관여하는 버섯체에는 도파민 분비 뉴런이 연결돼 있다. 


연구팀은 초파리가 특정 냄새와 전기 충격(고통)을 동시에 느끼게 한 뒤, 초파리마다 도파민 뉴런의 활성도를 달리했다. 그 결과, 도파민 뉴런이 활성화된 초파리는 냄새(고통의 기억)를 다른 초파리보다 빨리 잊었다. 반면 도파민 뉴런이 차단된 초파리는 오랫동안 냄새를 기억하고 피했다. 연구팀은 도파민 뉴런이 공포 기억을 망각하는 과정에 영향을 준다는 결론을 내렸다. doi: 10.1016/j.neuron.2012.04.007

 

비범한 기억력, 기술로 만들어낼 수 있을까

 

 

과잉기억증후군이 아님에도 일상의 다양한 정보를 오랫동안 기억하는 ‘능력자’들이 간혹 있다. 이들의 뇌는 일반인이나 과잉기억증후군 환자들과 다를까. 


엘리너 맥과이어 영국 런던대 인지신경과학과 교수는 세계기억대회(WMC)에서 우수한 성적을 보인 10명을 대상으로 기능적 자기공명영상(fMRI) 분석을 했다. 그 결과, 암기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기억을 떠올릴 때 일반인과 비교해 좌측두정엽, 양측후두엽피질, 해마뒷부분이 추가로 활성화됐다. 이곳은 공간 학습을 담당하는 뇌 영역이다. 이 교수는 “과잉기억증후군이나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의 능력을 모사하려면 세포 수준에서 차이점을 발견해야 한다”며 “앞으로 많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광유전학 기술로 기억력을 향상시키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광유전학은 빛에 민감한 광수용체 단백질로 세포의 기능을 조절하는 기술이다. 허원도 KAIST 생명과학과 교수(기초과학연구원(IBS) 인지 및 사회성연구단 초빙연구위원)팀은 쥐의 광수용체 단백질 유전자를 변형시켜 빛에 대한 민감도를 55배 증가시켰다. 그 결과 살아있는 쥐 머리에 손전등 강도의 빛(1mW/mm)을 비추는 것만으로 신경 세포 내 칼슘 신호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빛을 비추면 칼슘 농도가 증가하고 뇌의 공간 기억 능력도 향상됐다. 연구 결과는 국제학술지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1월 10일자에 실렸다. doi: 10.1038/s41467-019-14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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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박영경 기자 기자
  • 사진

    초록뱀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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