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카드의 1백배에 이르는 기억용량과 연산능력을 자랑하는IC 카드는 유니카드 시대를 앞당길 것으로 기대되지만, 양산에 앞서 해결해야 할 과제도 적지 않다.
은행구좌를 갖고 있거나 백화점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두개쯤은 갖고 있게 마련인 플라스틱 카드. 은행 백화점이 효율적인 고객관리를 위해 상용화하기 시작한 플라스틱 카드는 오늘날 막대한 정보력을 가진 컴퓨터통신망의 말단을 담당하며 사회 각 분야의 정보를 이어주는 필요불가결한 존재로 자리잡고 있다.
사용영역의 확대는 필연적으로 카드기술의 발전을 요구해, 그간 플라스틱 카드는 요철로 숫자나 문자를 기입한 단순한 엠보싱(embossing) 형에서 자성체(磁性體)를 응용한 자기(磁氣, magnetic)카드로 발전해왔다. 현재 신용카드나 은행현금지급용으로 쓰이는 카드는 대개 엠보싱을 한 위에 자기띠를 두른 형태.
그러나 자기카드는 값싸고 만들기 쉽다는 장점에도 불구하고 기억 용량이 극히 한정돼 있으며 더 강한 자기(磁氣)의 영향을 받으면 카드의 기록이 쉽게 지워지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제조공정이 간단한 만큼 안에 담긴 정보가 읽히기도 쉬워 카드사용이 보편화된 선진국에서는 오래전부터 카드도용 등의 안전성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 바로 IC(Integrated Circuit, 집적회로) 카드. 최근 국내에서도 생산되기 시작한 이 카드는 74년 프랑스의 롤랑 모레노가 처음 제작한 것은 플라스틱판에 자기띠 대신 IC 칩(chip)을 심어, 기존의 자기카드보다 최고 1백배에 이르는 기억용량과 연산능력을 확보했다.
8천자까지 기억기능
2001년 11월 1일 오전 8시. 컴퓨터회사의 프로그래머인 홍길동씨는 서둘러 집근처 지하철 역으로 향하고 있다. 역에 도착한 홍씨가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동전이 아닌 명함크기의 플라스틱 카드. 이 카드를 밀어넣어 개찰구를 통과한 홍씨는, 지하철을 기다리는 동안 음료수 자동판매기에 같은 카드를 넣어 커피를 한 잔 꺼내마셨다.
다른 컴퓨터회사로의 정보유출을 막기 위해 물샐틈없는 경비체제를 갖춘 그의 회사에서는 그러나 경비실이 사라진 지 오래다. 육중한 철문과 사무실의 자동유리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는 복잡한 절차없이 카드를 밀어넣기만 하면 된다. 갑작스런 두드러기 증세를 진찰하기 위해 들른 병원에서도 그는 같은 카드로 진료에 도움을 얻었다. 의사는 진찰 전에 홍길동씨의 카드를 단말기에 입력, 그의 건강기록을 보고 체질상 어떤 약물을 처방해서는 안되는지 확인하는 것이다. 백화점이나 은행에서도 그는 이 한 장의 카드로 모든 대금 결제를 마친다. 1주일에 한번씩 그의 개인용 컴퓨터 화면에 은행, 백화점 등의 청구내용을 출력한 뒤 홍씨는 자신의 단말기에 카드를 넣고 청구한 내용이 틀리지 않았는지 대조해보기만하면 된다.
미래사회의 홍길동씨가 쓰는 카드처럼 한 장의 플라스틱 카드가 다양한 기능을 가지려면 우선 카드의 기억용량이 커야한다. 또한 기억된 많은 정보 중 언제 무엇을 내보낼 것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능력도 카드에 갖춰져 있어야 한다.
IC카드는 이런 요구를 수용하는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먼저 기억용량을 보면 IC카드는 8K바이트(byte), 즉 8천자까지 담아낼 수 있어 현재 72자 정도를 기억할 수 있는 자기카드에 비해 월등한 저장용량을 가진다. 또 칩의 기억소자로는 EP ROM(Erasable &Programmable ROM)을 주로 사용해 필요에 따라 기억을 바꿔 입력할 수도 있으므로 재사용이 가능하다.
그러나 IC 카드가 기존의 카드와 기능면에서 확연히 구별되는 점은 바로 판단능력에 있다. 현재 ISO(국제표준화기구)에서 표준화한 IC카드는 내부에 메모리칩 뿐 아니라 마이크로프로세서를 갖춘 것이다. 마이크프로세서는 컴퓨터의 CPU(중앙처리장치 )기능만을 집적회로에 갖추도록 한 것. 따라서 IC카드는 정보의 자체검색과 운용능력을 갖는다.
현재의 온라인 시스템에 이상이 생겼을 때를 예로 CPU를 내장한 IC카드의 기능을 살펴보자. 메모리 기능만을 가진 카드의 소지자가 교통사고를 당했다면 그는 중앙컴퓨터의 정보에 연결되지 않는 이상 카드내의 건강기록을 이용할 수 없다. 그러나 IC카드는 단말기만 있으면 자체 내 CPU에서 카드내의 정보를 내보내주기 때문에 온라인에 이상이 있다해도 꼭 필요한 자료는 꺼내 쓸 수 있다.
결국 현재의 자기카드가 중앙컴퓨터라는 정보창고에 접근할 수 있는 열쇠에 불과하다면 IC 카드는 자체내에도 일정량의 정보창고(메모리공간)를 가지며, 이것을 꺼낼 수 있는 판단능력(마이크로프로세서)도 갖춘 셈이다. 또한 IC카드는 그 구조의 복잡성으로 인해 정보도용이 자기카드에 비해 훨씬 어렵다는 장점도 갖고 있다.
정전기에 약하고 비싸
그러나 IC 카드가 이런 기능을 가졌다고 해서 미래사회의 유일무이한 신용수단이 되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문제가 되는 것은 경제성과 내구성.
IC 카드에 사용되는 칩이나 이 칩을 플라스틱판에 심는 데는 많은 비용이 든다. 일본의 예를 보면 72바이트의 자기카드가 약 6백원선인데 비해 8K 바이트의 IC카드는 6천원으로 10배정도 차이가 난다. 정보량의 차이가 많다해도 용량만큼 철저히 이용되지 않는 한 실용화하려면 가격을 좀 더 낮추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편 경제성으로 볼 때는 자기카드를 더 개발해 정보저장용량을 확대하는 것도 고려할 수 있다.
내구성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전기다. IC 카드가 작동하려면 일정한 전압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IC카드 판독기(R/W)가 담당한다. 이 때 카드를 판독기에 넣고 빼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방전(放電, spark)은 카드의 칩을 망가뜨려 쓸모없게 만든다. 또 옷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정전기도 순간적으로 수만볼트(V)에 이른다는 점을 감안하면 전기에 약한 칩을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는 IC 카드제작에서 필연적으로 제기되는 문제다. 이미 IC 카드실용화 단계에 돌입한 프랑스등에서는 정전기를 막기 위해 카드에 특수도료를 입히거나 판독기에 무접점으로 연결되는 IC 카드를 만들고 있다.
한편 IC 카드의 수백배에 이르는 기억용량을 가진 광카드(optical card)의 출현도 무시할 수 없는 일이다. 광카드의 기억용량은 40만자에서 2백만자이며 경제성도 IC 카드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을 지우고 다시 쓰는 등의 재사용이 불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따라서 앞으로의 플라스틱 카드시장은 카드의 기능에 따라 분할되리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즉 굳이 많은 정보수용량이 필요하지 않은 분야는 현행의 자기카드가, 전자출판같이 재사용보다는 많은 정보수용능력이 필요한 분야는 광카드가 담당할 수 있는 것이다.
대기업, 시스템 사업에 관심
IC카드를 운용하기 위해서는 현재 시스템이 개편돼야 할 뿐 아니라 새로 개발돼야 한다. 현재의 자기카드용 시스템으로는 전기를 이용하는 IC 카드를 전혀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 금성 등 국내 전기 전자부문의 대기업들이 IC카드사업에 눈독을 들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름밝히기를 꺼리는 한 기업체의 연구원은 "대기업의 IC카드개발을 두고 영세한 플라스틱카드시장을 잠식한다는 비난이 있지만, 사실 기업으로선 카드판매 수익보다는 시스템 교체에서 벌어들일 이익이 더 중요합니다. 따라서 여러가지 응용시스템을 개발해 IC 카드의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 초미의 과제라 할 수 있지요"라고 말한다. 시스템 교체의 규모는 금융유통분야에만 한정해 보아도 막대하다. 각 은행에 설치된 현금자동지급기, 백화점의 자기카드 판독기(R/W) 등을 모두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IC 카드의 정보저장용량을 이용해 병원이나 기업, 행정망 등의 전산화가 가속될 것이며 이밖에도 아이디어만 있다면 새로이 창출될 수요는 무궁무진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IC카드가 곧 발매된다해도 IC 카드문화가 정착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또 많은 이들은 IC카드의 편리성 못지않게 나타날 문제점도 우려하고 있다.
IC카드 양산에 앞서 표준화가 시급하다는 것은 관계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하는 문제다. "현행의 은행현금자동지급카드를 보면 간혹 앞뒤로 자기띠가 있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JIS(일본공업규격)용이고, 다른 하나는 ISO용이죠. CD지급기를 처음 도입할 때 거의 일본에서 수입해와 JIS규격에 맞추었는데 수입편중 비난여론이 높자 ISO로 바꾼 결과 불필요하게 두개의 띠를 갖게 된 것입니다. IC 카드는 도입부터 이런 문제를 막아야지요." 직접 IC 카드개발에 참여하고 있는 삼성전자 김진규대리의 말이다.
또 하나의 과제는 유통질서를 세우는 것이다. 자기카드가 공중전화나 지하철 이용에 쓰이는 것처럼 IC카드도 선불(先拂, pre-paid) 카드로 현금대신 쓰일 수 있다. 경제분야에서 카드 사용이 빈번해 질수록 재화의 흐름이 공개화돼 지하경제를 막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는 반면 특별한 규범없이 카드가 현금대신 쓰일 경우 유통에 미치는 영향은 결코 적지 않다. 따라서 관련 법규의 제정이 시급히 추진돼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크게 우려되는 문제는 개인의 사생활침해라는 점이다. 하나의 카드로 모든 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면 생활의 편리성은 증가하겠지만 역으로 그만큼 일률적인 통제가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주민등록증을 카드로 전산화하자는 주장도 있어 정보악용을 막는 제도가 확립되지 않는다면 IC 카드가 첨단의 통제기구가 돼 국민을 위협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