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아티스트 고(故) 백남준 작가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TV탑을 세울 엔지니어를 찾고 있었다.
이 의뢰는 당시 작은 회사에서 TV를 수리하고 있던 이정성 엔지니어에게 가 닿았다. 그는 삼성전자의 홍보 전시용으로 500여 대의 TV로 벽을 만든 경험이 있었다. 대뜸 찾아와 TV탑을 세울 수 있냐는 백 작가의 물음에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답했다. TV 1003대를 18.5m 높이의 나선형으로 쌓은 백남준 작가의 대표작 ‘다다익선’은 이렇게 탄생했다. 30여 년이 흐른 지금, 그는 여전히 고 백남준 작가의 작품을 위해 작업실에 앉는다. 3월 5일, 단종된 브라운관 TV가 가득한 서울 중구 대림상가의 작업실에서 그를 만났다.
이정성 엔지니어는 1944년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5세 되던 해 처음 라디오를 들었다. 그는 그 날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라디오는 진공관식이라 밤새 켜 놓으면 배터리가 다 닳아버렸어요. 잠들기 전 몰래 듣다가 비싼 배터리를 다 써버렸다고 형님께 혼나기도 했죠. 그날로 라디오가 소리나는 원리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품었어요. 서울로 상경해 을지로 학원, 전파상을 거쳐 여기까지 왔네요.”
라디오가 궁금했던 학생, 세계를 누비다
1970년대 세운상가는 신기술이 모이는 곳이었다. 진공관과 트랜지스터를 결합한 하이브리드 TV, 집적회로(IC) TV 등 새로운 기술이 나올 때마다 그는 TV를 해체하고 일본 책을 들여다보며 배워나갔다. 그는 “IC TV가 처음 들어왔을 땐 IC칩 생김새를 몰라 찾느라 별 짓을 다했다”며 “약한 IC칩을 보호하기 위해 까만 철로 덮어놨는데 덕분에 꽤나 헤맸다”라고 회상했다. 신기술이 나오는 대로 습득한 덕분에 TV 장인으로서의 밑천을 두둑이 쌓을 수 있었다. 1988년 다다익선 의뢰가 그에게 간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의뢰 당시 백 선생님은 다른 질문 없이 ‘할 수 있겠냐’라고만 물어보셨어요. 나름의 조사는 하고 오셨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처음 만난 절 믿어 주신 게 대단하죠.”
그는 ‘그깟 거 하지 왜 못해’하는 엔지니어의 자부심으로 시작했지만, 현실적으로 따져보면 불가능에 가까운 제안이었다고 회상했다. 주어진 시간은 두 달이 채 안됐고 그 끝엔 생방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 치의 실수도 없이 완벽해야 했다. 전동 드릴도 없는 시절이라 드라이버로 나사를 조이다가 손이 다 헤졌다.
가장 큰 문제는 ‘분배기’였다. 하나의 영상을 여러 TV에서 재생시키기 위한 장치다. 분배기 없이 여러 TV를 연결하면 신호가 약해져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희끄무레한 화면이 나타난다.
“당시 한국엔 분배기가 없을 때라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죠. 하지만 요즘처럼 개인이 수입하는 게 쉽지 않을 때라 두 달 안에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그래서 백 선생님에게 부탁해 삼성에서 분배기 제작에 필요한 부품인 IC칩을 지원받았죠. 분배기 85개를 제가 직접 만들었답니다.”
이 작업은 20여 년간 펼쳐질 여정의 시작이었다. 미국 뉴욕, 스위스 장그트갈렌, 독일 뒤셀도르프, 벨기에 크노케, 일본 도쿄 등 전 세계를 누볐다. 짐 가방은 늘 수십 가지 장비와 부품으로 가득했다. 대부분은 한국에서 작품을 만든 뒤 현지에서 설치하는 과정을 거쳤지만, 현장에서 돌발적으로 부품이 필요할 때가 있기 때문에 늘 필요 이상으로 챙겼다. 그는 “가져간 부품이 요긴하게 쓰였을 때는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기뻤다”며 “각지고 무거운 짐들 덕에 짐가방은 늘 수명을 한참 채우지 못하고 망가졌다”라고 말했다.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소장 중인 작품 ‘시장’에서 그의 깨진 짐가방 중 하나를 볼 수 있다.
냅킨, LP판 포장지에 그린 아이디어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백남준 작가도 전자공학을 공부했다. 1961년 불현듯 전자공학에 빠져 다른 책은 모두 창고에 넣고 TV에 관한 책만 독파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백남준 작가와 대화를 할 때는 늘 긴장했다. “선생님께서 궁금한 것을 물어오면 무엇이든 엔지니어로서 최대한 대답하려고 했어요. ‘이 부품을 빼 보면 어떨까’와 같이 단박에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은 직접 해보고 가능한 빨리 답을 드렸죠. 한국에 있을 땐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전화를 하셨는데 화요일에 전화오면 금요일쯤 백 선생님의 전화가 올 것 같아 술도 안 마시고 대기했어요.”
직접 만나 대화를 시작하면 새벽까지 이야기가 끊이질 않았다. 그 자리에서 쓱쓱 작품의 설계도를 그리기도 했다. 그는 LP판 포장지, 찢어진 메모지에 그려진 작품의 설계도를 보여줬다. 설계도라기보단 낙서에 가까운 그림이었다. 그는 도형과 한자, 한글이 뒤섞여 있는 설계도를 찬찬히 풀이해줬다.
“제품명은 ‘도너츠’. 이쪽엔 30~60W(와트)가 필요하고 코일은 300번 정도 감으면 될 것 같다…. 이런 내용이 써 있어요. 암호처럼 써 있어서 아마 다른 사람은 봐도 무슨 내용인지 모를 거예요. 이렇게 백 선생님이 아이디어를 내면 실제 만들면서 맞닥뜨리는 문제는 엔지니어인 제가 해결을 했어요.”
그의 작업실에는 백남준 작가의 작품 ‘첼로’가 몇 달째 자리잡고 있다. 수리를 위해 독일에서 건너온 작품이었다. 인터뷰 며칠 전에는 대전시립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작품 ‘프랙털 거북선’을 수리하기 위해 출장을 다녀왔다고 한다. 발열이 많아 화재 위험이 있는 작품에 설치할 온도 감지기가 작업대 위에 놓여 있었다. 2006년 백남준 작가가 작고한 뒤로는 이처럼 작품을 유지, 보존하기 위해 분주히 다니고 있다.
“이정성 씨에게 다다익선에 관한 A/S 전권을 위임한다”
백남준 작가의 작품에는 브라운관 시대가 담겨 있다. 액정디스플레이(LCD)에서 발광다이오드(LED), 양자점발광다이오드(QLED)까지 디스플레이가 빠르게 변해가는 오늘날, 백남준 작가의 작품을 어떻게 보존할 것인가를 두고 논란도 있었다.
“백 선생님은 (최신 기술로 보존하는 데) 열린 마음이셨어요. 모양만 유지되면 성능을 높이는 것이 좋다고 여기셨죠. 오히려 영상과 같은 소프트웨어를 굉장히 중요시하셨어요. 그러면서 2001년 이런 메모도 남기셨어요. ‘1990년대 많이 쓴 일제 퀘이사 TV가 노후했으므로 이번(에) 그것을 개량하기를 원합니다. (중략) 알맹이만 이용하면 원래보다 훨씬 개량된다고 봅니다.’ 다다익선에 관해서는 ‘이정성 씨에게 A/S 전권을 위임한다’는 메모도 남기셨죠. 지금은 틀은 그대로 두고 편평한 LCD 모니터로 교체했지만, 기술이 더 발전해 플렉서블 화면이 상용화되면 원래 모양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해요.”
현재 이정성 엔지니어는 다다익선 보존에 자문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보존과학자들과 사흘을 숙식하며 다다익선을 보존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전수해주기도 했다.
후손을 위한 아카이빙도 놓치지 않고 있다. 백남준 작품의 구체적인 설계도와 제작 방법 등을 수록하는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여전히 백남준 작품의 시간을 살고 있는 그는 꿈에서 한 달에 한두 번씩 작품 활동 중인 백남준 작가를 만난다고 했다. 그러면서 “백 선생님의 꿈은 서울 마포 강변과 미국 뉴저지에 40인치 TV를 150대 쌓고 각각 여의도와 맨하탄에서 감상하는 ‘메가트론’ 작품을 세우는 것이었다”며 “한 해만 더 건재하셨어도 제작하셨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다”고 말했다.
새로운 기술이 세상을 압도하는 지금까지 두 사람이 함께할 수 있었다면 어떤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을지 궁금했다. “아마 레이저에 무척 빠져 있으실 거예요. 당시엔 빛도 희끄무레했고 수랭식이라 장비가 어마어마하게 크고 무거워 레이저를 쓰는 데 제약이 많았죠. LED로도 신나게 작업하셨겠네요.”
고될 법한 지난 30여 년간의 여정을 그는 감사한 시간으로 기억했다. 특히 엔지니어로서 쉽게 할 수 없는 경험을 선사한 백남준 작가에게 거듭 존경과 감사를 전했다.
“기술 인생 60년 중에 후반기 30년을 백 선생님을 위해 썼어요. 전반기 30년은 백남준을 위해 배웠다고 할 수 있죠.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 회고전에서 관장이 ‘특히 서울에서 온 이정성 씨 수고했다’고 한 말은 아직도 잊지 못해요.”
그는 “한국도 미술관이나 박물관에서 이렇게 엔지니어를 대우해 주는 문화가 생기길 바란다”며 작업대에 놓인 브라운관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