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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의 온기 되살린 빛의 사진가

대 이은 문화재 사진작가 고(故) 한석홍&한정엽

※편집자 주 : 박물관과 미술관에 박제된 문화재와 미술품에 오늘날의 생기를 불어넣은 두 장인을 만나 시대를 초월한 예술과 이를 가능케 한 기술의 관계를 성찰해봤다.

 

“고요함이 지배하는 곳, 조명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본존불과 이를 완벽하게 감싸는 돔형 천장은인간보단 신을 떠올리게 했다.”


3월 9일, 서울 은평구 한국문화재사진연구소에서 만난 한정엽 실장은 2000년, 아버지와 석굴암 내부를 촬영하던 순간을 회상하며 신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그의 아버지는 1971년부터 유물 사진을 평생 촬영한 국내 대표 문화재 사진작가인 고(故) 한석홍 작가. 한 실장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째 문화재를 기록하는 외길을 걷고 있다. 그는 “희미한 빛 속에서도 느껴지는 불상의 기운과 하늘을 완벽히 가린 돔 천장은 인간의 세계 너머에 온 듯했다”며 “그 완벽함에 처음에는 사진 찍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라고 회상했다.

 

한석홍 작가의 유족은 한 작가가 1981, 1986, 2000년 세 차례에 걸쳐 촬영한 석굴암의 모습을 담은 필름과 사진 1172점을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월 홈페이지에 한 작가가 촬영한 석굴암의 모습을 누구나 볼 수 있게 공개했다. 석굴암은 현재 보존을 위해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는 유리칸막이 안에 있어 관람객은 오직 유리창 너머에서만 본존불을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작가의 사진 덕분에 유리에 갇히기 전 석굴암의 모습을 담은 가장 섬세한 사진을 이제는 누구나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유리칸막이 너머 본존불을 만나다


이번 기증으로 세상에 나온 석굴암 사진은 여러 언론사에서 보도되며 화제를 모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따르면 홈페이지에 사진이 공개된 2월 17일부터 3월 5일까지 약 2만 회 다운로드됐다. 한 실장은 “왕실 문화와 불교 문화를 대표하는 작품을 국립고궁박물관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각각 기증했는데, 사람들이 석굴암에 유달리 큰 관심을 보였다”라며 “석굴암이 한국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다”라고 말했다. 그는 “석굴암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보수 공사 등 숱한 역경을 겪은 존재”라며 “사람들이 이런 석굴암을 그동안 교과서 속 지식으로만 알았지 제대로 보고 느낀 적이 없어 더 큰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한 작가가 남긴 사진은 석굴암에 대한 그간의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충분했다. 은은한 불빛에 담긴 석굴암은 화강암의 결마다 신비스러움을 숨기고 있는 듯하다. 석굴암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다본, 돔형 천장을 이루는 천개석(덮개돌)과 본존불이 함께 담긴 사진은 특히 예술성이 돋보인다. 이 사진에는 신을 연상시키는 완전성을 표현한 석불의 왼편과 세 조각으로 갈라진 천개석의 불완전함이 함께 담겨 있다. 최봉림 한국사진문화연구소장은 이번 기증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와 함께 발간한 책 ‘석굴암, 그 사진’에서 이 사진에 대해 “한석홍의 아주 선명하고 디테일이 잘 드러난 자료사진이 그 어떤 예술사진보다도 더 삶의 실체를 불현듯 일깨우고야 만다”고 평했다.

 

 

석굴암과의 세 번의 인연 


한석홍 작가는 1971년부터 박물관 유물 촬영을 도맡아 온 실내 유물 촬영 분야의 대가다. 건축물 분야의 고(故) 김대벽 작가, 야외 불상 분야의 안장헌 작가와 함께 문화재 분야의 대표적 사진작가로 꼽힌다. 특히 고려청자의 ‘비색’을 잡아내는 데 능했던 작가로 명성이 높다. 매끈한 고려청자는 빛의 양이 조금만 달라져도 색이 달라진다. 청자의 양감도 놓쳐선 안된다. 박물관의 간이 스튜디오에 빛이 적절히 반사되는 트레이싱 종이로 사방을 막고 빛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그의 예민한 눈은 푸른색과 녹색 그 사이 어디쯤에 있는 비색을 그대로 렌즈에 담아냈다.


한 시대를 대표하는 실내 유물 사진작가인 그는 석굴암을 세 번에 걸쳐 촬영한 석굴암 사진의 대가이기도 했다. 그가 처음 석굴암과 인연을 맺은 것은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81년 일본에서 출간된 ‘세계의 미술-한국, 동남아시아 편’의 석굴암 사진을 맡으며 처음 석굴암 촬영에 발을 디뎠다. 이후 강우방 전 국립경주박물관장의 부탁으로 1986년, 2000년 두 차례 더 기회를 얻었다. 특히 마지막 촬영작품은 한 작가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한 실장은 “이전 두 차례 촬영은 시간과 인력, 장비가 부족해 아쉬움이 컸다”며 “마지막 촬영 때에는 저를 포함한 직원들과 함께 밤부터 새벽까지 연달아 3차례에 걸쳐 촬영하는 등 모든 힘을 쏟았다”라고 말했다. 


석굴암의 재료인 화강암은 대리석처럼 매끄럽지 못하고 울퉁불퉁하다. 빛의 양과 방향에 따라 불상의 형상이 달리 보인다. 빛이 날카롭게 닿지 않으면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한 작가는 빛이 닿아야 하는 곳을 철저히 계산했다. 문화재를 최대한 실제와 같이 담기 위해 순간적으로 반짝 터지는 스트로브 라이트(섬광등) 대신 지속광을 사용했다. 늘 가지고 다니던 입사식 노출계로 조명 위치에 따라 석굴암에 닿는 광량을 확인했다. 조명 설치가 끝나면 20kg이 넘는 필름 카메라를 세운 뒤 사다리로 올라가 원하는 구도로 카메라를 향하고 셔터를 눌러 조리개를 열었다. 째깍, 째깍 시계의 소리가 지배하는 수초의 시간이 흘러야 조리개를 닫을 수 있었다. 


석굴암같이 큰 공간을 담아야 하는 사진은 전체에 초점이 맞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조리개를 최대한 작게 조여서 초점거리를 늘려야 한다. 대신 노출 시간을 길게 해 카메라에 들어오는 빛의 양을 최대한 늘린다. 이런 장노출 촬영에서는 조리개를 열었다 닫는 수 초 동안 카메라를 움직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작업에 참여한 모든 직원들이 숨죽이는 시간이다.


“아버지는 정통파 사진작가라 사진은 정직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죠. 수평과 수직을 맞추고, 카메라를 정교히 움직여 문화재를 섬세하게 담는 것에 능하셨어요. 수십 년의 훈련으로 장노출 촬영에서도 절대 흔들리지 않는 분이셨죠.”

 

 

문화재 사진 촬영은 그 시대를 추적하는 과정


한석홍 작가는 생전 오직 필름카메라만을 사용했다. 디지털 카메라는 격자무늬로 나뉜 픽셀(화소)이 사진의 기본 단위다. 픽셀 수가 많을수록 더 선명하고 정교해진다. 필름에서는 빛에 반응하는 은염 입자의 크기가 이에 해당한다. 한 실장은 “아버지는 문화재를 섬세하게 담기 위해 은염 입자가 가장 미세한 감도(ISO) 50 저감도 필름을 사용하셨다”며 “그 정교함을 잃을까봐 디지털 카메라가 나온 뒤에도 필름카메라 작가로 남아달라고 부탁드렸다”고 말했다.


이렇게 촬영한 필름은 소중하게 보관됐다. 기록의 소중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한 작가는 집요할 정도로 필름을 소중히 여겼다. 그는 40여 년 간 촬영한 필름을 비닐에 한 장씩 포장해 문화재 이름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필름 보존을 위해 한국문화재사진연구소 건물 설계에도 직접 참여했다. 한 실장은 “연구소를 보수하면서 필름을 보관하던 지하실 일부가 무너졌는데, 아버지께서는 필름이 훼손됐을까 아이처럼 엉엉 우셨다”고 전했다. 지난해 왕실 문화를 촬영한 한 작가의 사진을 기증받은 국립고궁박물관 이정민 학예연구사도 “기증받은 492점 중 6점만 변색이 있었을 뿐 나머지는 보존 상태가 굉장히 좋아 놀랐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업을 잇고 있는 한 실장 역시 기록과 보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사진학과 함께 문화재보존학을 전공한 것도 그 때문이다. 아버지의 작업을 보며 사진 이전에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필수라는 생각을 했다. 한 실장은 “문화재 사진 작가는 문화재에 남은 흔적, 모양, 제작 방식 등을 살펴보고 문화재를 사진에 어떻게 담을지 결정한다”고 말했다.


그는 경기도 연천군 전곡리에서 발견된 구석기 유물인 주먹도끼를 찍은 경험을 들려줬다. “도끼의 날 방향이 제각각이라 빛을 집중적으로 받는 곳이 있을 수밖에 없었어요. 학자와 충분히 상의하고 도면을 들여다봤죠. 사진에 담긴 관점이 곧 후손이 이 유물을 바라보는 관점이라는 생각을 하면 늘 공부할 수밖에 없어요.”

 

 

사진 기증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한국에 남겨진 유물 대부분은 박물관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 큐레이터에게 선택돼 전시되지 않으면 일반인들은 이 유물을 볼 기회가 전혀 없다. 한 실장이 아버지의 사진을 기증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다. 


“문화재가 문화재 연구자에게만 기억되는 것이 안타까웠어요. 사진은 문화재에 남겨진 선조들의 지혜를 후손에게 전달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해요. 문화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 외국사람에게도 순수하게 다가갈 수 있죠.”


그는 기증작품 가운데 일부를 과학동아 독자를 위해 따로 큐레이션해 줬다. 사인참사검, 일월반도도, 천상열차분야지도 등 과학과 관련된 문화재들이었다. 특히 사인참사검에는 칼 뒷면에 북두칠성과 28수 천문도가 담겨 있다. 국립고궁박물관 홈페이지 왕실 문화 아카이브에서 해당 문화재를 볼 수 있다. 한 실장은 “문화재에는 정말 다양한 흥밋거리가 있는데 더 많은 후손들이 문화재 속에서 자신의 관심사를 만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 실장이 기증을 하게 된 또다른 이유는 필름이 빛과 온도, 습도에 민감하다는 사실이다. 가능한 최적의 조건으로 연구소를 세웠지만, 보존 전문가의 보살핌을 따라갈 순 없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 기증된 흑백필름은 온도 13~17℃ 습도 35~45%에서, 컬러필름은 온도 영하 2~2℃ 습도 25~35% 조건에서 보존돼 있다.


한 실장은 “앞으로 아버지가 남기신 또 다른 수천 장의 필름을 잘 정리해 기증하고 후손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것이 생의 과업”이라고 말했다. 한 작가의 작업이 후손에게 가 닿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한 작가가 석굴암 사진을 세 번 찍었듯, 문화재 촬영은 계속해서 새롭게 이뤄져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그는 “사진은 문화재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쉽고 흔한 방법”이라며 “문화재 사진작가를 양성하고 지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번 기증을 통해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문화재 사진작가팀’이 생기길 꿈꿔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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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박영경 기자 기자
  • 디자인

    이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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