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2월, 서울 마포구 아현동에서 20대 여성이 성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범인은 한 주택에 침입해 자택에 머물고 있던 20대 여성 A 씨를 흉기로 위협하고 성폭행했다. 죄질이 흉악한 특수강도 및 강간 사건이었다. 엄정한 법의 심판이 필요했다.
다행히 수사팀은 범인으로 추정되는 용의자를 어렵지 않게 잡았다. 그리고 그가 진범이 맞는지 확인해야 했다. 수사팀은 피해자의 체내에 남아있던 정액에서 미리 범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를 확보해뒀다. 이제 이를 용의자의 DNA와 대조해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일만 남았다.
2002. 02. 22 DNA 불일치로 사건 미궁에 빠져
사건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잠시 DNA 감식 과정을 살펴보자. 수사기관에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범죄현장이나 피해자의 신체에서 채취한 증거물 분석을 의뢰하면 일반적으로 DNA 감식을 진행한다. 이번 사건처럼 성범죄의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범인의 정액을 찾고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때 가장 어려운 경우는 정액의 흔적이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미세하게 남아 있는 경우다. 이때는 형광을 이용한다. 정액은 플라빈(flavin) 성분이 있어 파장이 450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인 푸른빛에서 형광을 띤다.
이후 이 증거가 정액인지 확실히 하기 위해 2가지 검사를 거친다. 먼저 예비 검사로 산성 인산화 효소 검사를 한다. 그다음으로 전립선 특이 항원(PSA)이 있는지 재검사해 최종적으로 정액임을 확인한다.
이밖에 혈흔과 침도 매우 중요한 DNA 감식 대상이다. 이들도 정액과 마찬가지로 탐색, 예비 검사, 확증 검사의 과정을 거쳐 존재 여부를 확인한다. 이렇게 확보된 시료들은 정제 및 정량, 증폭, 모세관 전기영동, 결과 분석의 과정을 거치고 최종적으로 수사에 활용할 수 있는 DNA 프로필이 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증폭 과정이다. 전기영동을 통해 결과를 확인할 수 있을 만큼 DNA를 증폭해야 범인을 식별할 수 있다. 증폭에는 중합효소연쇄반응(PCR)이 사용된다. 생물학 연구에서 널리 사용되는 이 기법은 열에 강한 고온세균의 DNA 중합효소인 ‘Taq’를 이용해 DNA를 복제하는 기술이다. PCR이 발명되면서 적은 양의 DNA도 분석할 수 있게 됐다.
PCR을 이용해 증폭하는 DNA는 일반적으로 짧은직렬반복(STR · Short Tandem Repeat) 부분이다. STR은 2~7개의 염기가 한 단위를 이루며 연속적으로 반복해 만들어진 염기서열인데, STR의 반복횟수는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여러 개의 STR을 증폭해 DNA 수사에서 지문처럼 활용한다.
이렇게 범죄현장에서 확보된 범인의 DNA 프로필은 용의자의 DNA 프로필과 비교해 일치 혹은 불일치 판정을 내린다. DNA 데이터베이스에서 일치하는 DNA가 있는지 검색하는 것이다.
DNA 수사의 가장 큰 강점은 DNA 자체의 높은 안정성에 있다. 가령 수만 년 전 네안데르탈인의 뼈에서 DNA를 찾아내 분석할 수 있고, 얼음 속 매머드의 DNA를 이용해 복제를 시도할 수 있다. 특히 STR 분석은 미생물이나 화염, 화학물질 등에 의해 완전히 분해되거나 파괴되지만 않았다면, 변질되거나 파괴된 증거물에서도 정확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
다시 수사로 돌아가 보자. 당시 용의자와 DNA를 대조한 결과가 나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결과는 불일치였다.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었다. 사건은 미궁으로 빠졌다.
2012. 03. 05 부분 프로필 확보, 데이터베이스에는 없어
미제사건의 경우 오랜 시간 사건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사건 발생 당시 분석 기술의 한계다. DNA 검사가 매우 강력한 증거라는 점은 명백한 사실이다. 만약 일치하는 프로필을 찾기만 한다면 틀릴 확률이 0%에 가까운, 거의 완벽한 증거다.
하지만 DNA 프로필을 항상 완벽하게 확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증거물이 오래돼 부패했거나 수집된 증거가 부족한 경우, STR 마커를 일부만 분석하기도 한다, 이를 ‘부분 프로필(partial profile)’이라고 부른다. 과거 DNA 감식기술은 현재보다 분석할 수 있는 STR 마커의 수가 적었고, 민감도도 크게 떨어졌다. 2002년 당시 DNA 감식기술로는 부분 프로필 확보가 최선이었다.
만약 감식에 성공했더라도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증거와 대조할 수 있는 다른 DNA 정보가 없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해당 사건에 관련된 용의자의 정보만 확인할 수 있었다. 기껏 DNA 증거를 확보해도 진범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하면, 범인을 특정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문제는 일명 ‘DNA법’으로 불리는 ‘디엔에이 신원확인정보의 이용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면서 해결됐다. DNA법이란 성범죄, 살인, 조직폭력, 마약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DNA를 확보해, 과거 미제사건을 해결하고 유사 사건시 신속히 대응해 추가 피해를 막겠다는 취지로 2010년 7월부터 시행된 법이다.
▲ PDF에서 고화질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실 DNA법 제정 당시 해외에서는 이미 DNA를 적극적으로 수사에 활용하고 있었다.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를 최초로 만든 국가는 1995년 영국이었다. 1998년 미국을 거쳐 현재는 전 세계 70개 이상의 국가가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활용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2010년 7월 26일에서야 관련 법이 시행된 우리나라는 출발이 꽤 늦은 셈이다. 현재 우리나라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에는 지난 10년 동안 발생한 23만여 명의 범죄자(정확히는 구속피의자와 수형인)의 DNA가 등록돼 있다.
그래도 이 법이 제정된 이후 많은 미제사건이 해결됐다. 올해 9월 드디어 범인의 실체가 드러난 화성 연쇄살인 사건 역시 3, 4, 5, 7, 9차 사건의 증거물에서 찾아낸 DNA를 분석한 결과 1994년 처제를 성폭행한 뒤 살해해 복역 중이던 이춘재의 DNA 프로필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비로소 긴 미제의 터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다시 원래 이야기하던 사건으로 돌아가자. 수사팀은 2012년 DNA법 시행 이후 구축된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와 사건의 증거물에서 발견된 DNA 프로필을 비교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하지만 DNA 프로필을 이용해 범죄자를 식별하려면 최소 9개 이상의 STR이 필요한데, 2002년 당시에 얻었던 프로필은 개수가 적어 일치하는 범죄자를 특정할 수 없었다.
2015. 03. 20 공소시효 2년 남기고 범인 찾아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2014년부터 DNA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된 미제사건 DNA 자료 중 STR의 개수가 9개 미만인 부분 프로필에 대한 재분석을 자체적으로 진행했다. 그동안 DNA 기술은 발전에 발전을 거듭했다. DNA 감식에 사용할 수 있는 STR 마커의 수도 크게 늘었고, 민감도 또한 2배 이상 높아졌다.
현재는 기술이 더욱 발전해 세포 15개 정도만 있어도 충분히 DNA를 감식할 수 있다. 무게로 따지면 0.1ng(나노그램·1ng은 10억분의 1g) 수준이다. 볼펜으로 점 하나 찍은 크기의 핏방울이 현장에 남았다고 가정하면, 그 속에는 160개 정도의 백혈구가 존재하고, 그 안에는 약 1ng의 DNA가 들어있다. 다시 말해 이를 10배 희석해도 지금 기술로는 DNA 감식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렇게 DNA 감식기술이 발달하면서, 최근에는 상피세포가 새로운 증거물로 주목받고 있다. 모자, 양말, 의류 등 피부와 접촉한 모든 곳에서 피부세포를 채취할 수 있으며, 이 중 DNA 프로필을 얻을 수 있는 성공률 또한 30% 이상으로 높은 편이다. 보통 기사에서 땀이라고 표현하는 증거물은 실제로는 피부에서 떨어져 나온 피부세포를 의미한다.
최신 감식기술을 통해 사건을 재검사한 결과 2015년 3월 20일 드디어 13개의 STR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에서 이와 일치하는 DNA를 찾아냈다. 사건 공소시효를 겨우 2년 앞둔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이 DNA의 주인이자 사건의 진범인 B 씨는 2005년 특수강간 2건을 저지르고 체포돼 13년 6개월의 중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출소까지는 겨우 2년 남짓 남아있던 상황이었다. 만약 출소했더라면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 수도 있는 상습 강간범이었다. 하지만 미제였던 이 사건에 대한 형량이 추가되면서, 그는 교도소에 계속 남게 됐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는 DNA, 특히 범죄자 DNA 데이터베이스의 공이 혁혁했다. 하지만 현재 DNA 데이터베이스는 위기를 맞고 있다. DNA법이 지난해 8월 헌법재판소로부터 일부 헌법 불합치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재 법안대로라면 DNA 채취는 대상자가 동의하면 그대로 진행하며, 동의하지 않을 때는 법원으로부터 영장을 발부받아 진행한다. 하지만 영장 발부 과정에서 실질심사나 발부 이후 불복 등 구제 절차가 없다는 점이 문제가 됐다.
DNA법이 헌법 불합치 판정을 받으면서 올해를 넘기고도 대체 법안이 마련되지 않으면, 채취를 거부하는 용의자나 수형인의 DNA를 강제로 확보할 수 없게 된다. 현재 DNA법 개정안은 국회에 상정됐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된 상태다. 하루라도 빨리 통과돼 이로 인한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앞으로 다가올 DNA 수사 시대는
생명공학 기술과 컴퓨터 기술이 발달하면서 DNA 감식 분야도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조금씩 현장에 적용되기 시작한 첨단 DNA 감식기술을 정리했다.
1 DNA 몽타주 기술
DNA의 유전정보를 이용해 범인의 외향적인 특성(머리카락 색, 피부색, 주근깨, 대머리, 키 등)에 대한 정보를 추정하는 기술이다. 미국은 이미 여러 미제사건에 이 기술을 적용해 범인을 검거하는 성과를 올리고 있다.
2 DNA 메틸화 분석
사람마다 DNA의 특정 부위가 메틸화되는데, 생활습관 등에 따라 메틸화의 위치나 정도가 달라진다. 이를 활용해 범인의 나이나 생활습관, 그리고 DNA가 어느 조직으로부터 유래했는지 등을 확인할 수 있다.
3 빠른 DNA 감식
구강 상피세포로부터 STR 분석 결과를 90분 만에 얻을 수 있는 장비가 개발돼 현장에서 사용되고 있다. 미국은 이렇게 분석된 DNA 정보도 데이터베이스에 수록할 수 있도록
법 개정을 완료했다.
임시근
고려대에서 미생물학을 전공했으며,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유전자과에서 22년간 근무했다. 현재 성균관대 과학수사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법과학, 법유전학 및 DNA 감식과 관련된 교육과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급 국제학술지에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15건의 국내 및 국제 특허를 출원·등록했다. sikeun.lim@skku.ed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