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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11월 3일 오전 8시(현지 시간) 멕시코 서부 작은 도시 마사틀란의 한 요트 정박장. 구름 한 점 없는 코발트색 하늘이 수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쏟아지는 멕시코의 가을 햇살을 손으로 가리며 권영인 박사(자원탐사전문가)가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앞으로 두 시간 뒤면 출항합니다. 4~5주간은 연락이 전혀 안 될 겁니다. 그래도 걱정 마세요. 이번 항해는 순조로울 것 같으니.”

전화 너머로 긴장과 기대가 섞여 있는 특유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할 연인을 안심시키듯 그는 밝은 목소리로 한참을 떠들었다. 항해를 함께 떠날 지준명 선장도 옆에서 “바람도 좋고, 파도도 맘에 든다”며 목소리를 보탰다.

탐사 시작 390일 만에 장보고 주니어 호 출항 이날은 장보고 주니어 호가 태평양을 횡단하기 위해 닻을 올리는 첫날. 권 박사와 지 선장은 어느 때보다 홀가분해 보였다. 공교롭게 이날은 권 박사가 진화론 창시자 찰스 다윈의 흔적을 따라 미국 동부 메릴랜드 주 아나폴리스 항을 출발한 지 꼭 390일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출항에 앞서 장보고 주니어 호 곳곳을 세심하게 살폈다. 길이 11m에 배수량이 12.7t인 장보고 주니어 호는, 선체 2개를 이은 쌍둥이 선박인 장보고 호와는 달리 선체 1개짜리 모노헐(monohull) 요트다. 장보고 호가 수심이 얕은 연안에 적합하다면 모노헐은 높은 파도를 가르며 나아가는 큰 바다 항해에 더 적합하다. 배 구입은 8월 초에 끝났다.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의 후원을 받아 구입한 배 이름은 장보고 호를 잇는다는 뜻에서 ‘장보고 주니어’로 지었다. 빵으로 간단히 아침 끼니를 때운 권 박사는 배 구석구석을 조심스럽게 살피기 시작했다. 올해 2월 장보고 호가 난파한 뒤로 배의 안전에 대한 걱정은 항상 그를 따라다녔다.

장보고 주니어 호 주요 제원
모델 유니온 폴라리스 36 커터
길이 약 11m
3.5m
배수량 12.7t
평균운항속도 5노트(시속 9.2km)
최고속도 6노트(시속 11.1km)
엔진 디젤엔진
적재량 물 420L, 연료 420L, 짐 152L
주요 장비 위성항법장치(GPS), 레이더, 자동항법장치, 수심계, 풍향계, VHF무전기 등
연구 장비 메탄 측정장치, 이산화탄소 측정기, 수질 측정시스템 등
승선인원 3명

지 선장은 항로를 표시하는 계기판과 통신장치를 점검했다. 10월 초 탐사대에 합류한 권상수 씨도 배 곳곳에 어지러이 널려 있던 밧줄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배를 조종하는 데 사용하는 밧줄만 수백m에 이른다. 자칫 항해 중 엉켜 버린다면 배는 물론 세 사람의 안전까지 위협할 수 있다.



오전 9시 세 사람은 얼마 전 타계한 장보고 주니어 호의 전 선주를 추모하는 묵념을 올렸다. 그리고 마침내 오전 10시. 선박 운영을 맡은 지 선장으로부터 출항 사인이 났다. 한동안 육상탐사로 전환됐던 ‘다윈을 따라서’ 탐사가 재개되는 순간이었다. 권 박사의 마음엔 벅찬 감동이 물밀듯 밀려왔다.

권 박사는 출항 전 “두 아이에게 자랑스럽도록 항해를 꼭 성공시키겠다”고 말했다. 지 선장 역시 올해 9월 인터뷰에서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과 함께하지 못해 미안하지만 권 박사의 탐사가 꼭 성공하도록 돕겠다”고 굳은 의지를 다졌다.

권 박사는 올해 초 항해 도중 장보고 호 선체에 구멍이 뚫리는 사고를 당한 뒤 탐사방식을 육로 탐사로 바꿨다. 4개월 가까이 좁은 선실에서 생활하면서 몸과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하지만 지친 마음이 어렵게 시작한 탐사에 꼭 마침표를 찍고 싶다는 의지까지 꺾지는 못했다.



권 박사는 계획했던 대로 다윈의 흔적을 따라 차를 타고, 때론 걸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칠레를 계속 탐사했고 틈틈이 ‘과학동아’에 그 소식을 전했다. 탐사를 실패했느니,
당초 성공하지도 못할 일을 호언장담하다 그렇게 됐다느니 말들도 많았다. 점차 관심 밖으로 멀어지는 듯했지만 결코 의연함을 잃지 않았다.

남미 대륙의 끝 티에라 델 푸에고섬

을 거쳐 태평양이 맞닿은 칠레에 도착한 5월. 그는 또 한 번 ‘모험심’을 발휘하기로 했다. 다시 해양 탐사에 도전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천우신조일까. 때마침 태평양 횡단 경험이 있는 지 선장이 e메일을 통해 권 박사의 탐험에 함께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시기도 이 즈음이었다. 지 선장은 2007년 미국 서부를 떠나 하와이, 일본 오키나와, 제주도를 잇는 8개월간의 항해를 성공리에 마친 베테랑급 항해술을 보유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의미가 있는 탐사를 홀로 하고 있는 권 박사의 소식을 접하고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 싶었어요. 탐험 과정을 보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발견했어요. 장거리 항해인데도 항해 전문가가 없다는 것 자체가 어려움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했어요.”

그 뒤로 권 박사와 지 선장 사이에 몇 차례 전화 통화와 e메일이 오갔고 결국 ‘재도전’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지선장의 합류로 잠시 표류하던 탐사는 다시 활력을 찾았다.

지 선장과 함께 태평양 항해 경험이 있는 베테랑 선원 권상수 씨도 참여 의사를 밝혀 왔다. 권 씨 역시 모시던 노부모를 뒤로하고 탐험에 참여하겠다고 밝힐 정도로 이번 항
해에 거는 기대가 크다.

무풍지대 뚫고 갈라파고스로

장보고 주니어 호는 첫 중간 기착지로 ‘갈라파고스 제도’를 택했다. 170년 전 청년 시절의 찰스 다윈이 진화론의 영감을 얻은 곳이기도 하다. 이번에는 항해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만큼 권 박사는 그동안 접었던 연구를 재개할 계획이다. 장보고 호를 버린 뒤 잠시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메탄 측정 장치와 이산화탄소 측정기, 바닷물 수온과 염도를 수집할 수질 측정시스템을 배에 다시 실었다.

장보고 주니어 호의 이번 탐험 역시 쉽지 않은 여정이 될 것으로 보인다. 배를 타고 갈라파고스 제도까지 가는 데만 족히 4, 5주가 넘게 걸릴 예정이다. 바람이 거꾸로 부는 역풍 지역과 아예 바람이 불지 않는 지역도 뚫고 가야 한다.

특히 장보고 주니어 호의 첫 항로인 미국 서부 해안적도 인근에는 바람이 아주 약하게 부는 ‘적도무풍대’라는 난코스가 놓여 있다. 오래전부터 돛단배를 타는 선원들은 적도무풍대를 두려워했다. 바람이 없어 배가 자주 멈추기 때문이다. 돛의 힘으로 항해하는 장보고 주니어 호 역시 예외일 순 없다. 허리케인이 발생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출항 전날 마사틀란 인근의 바닷물 수온은 28℃를 가리켰다. 허리케인이 발생하지 않는 수온인 26℃보다 높은 온도다.

하지만 장보고 주니어 호는 만에 하나 날씨가 급격히 나빠지거나 배가 고장이 나도 스스로 역경을 헤쳐야만 한다. 외부와 통신수단은 고작 반경 20km 주변을 지나는 선박과 교신할 수 있는 VHF무전기가 전부다. 그럼에도 항해를 성공으로 이끌겠다는 세 사람의 의지는 어느 때보다 높다.

해양 강국 네덜란드와 영국은 최근 대규모 항해팀을 구성해 탐사를 추진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슈타드 암스테르담’이라는 대형 범선을 이용해 내년 5월까지 다윈이 타고 항해한 비글호 항로를 따라 탐험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올해 9월에 네덜란드를 출항한 이 선박은 11월 초아르헨티나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졌다. 100명이 넘는 선원과 과학자가 타고 있는 이 선박은 첨단 위성항법장치와 통신 시설을 갖추고 있어 규모 면에서는 훨씬 크다. 텔레비전 방송팀까지 따라 붙었다. 하지만 장보고 주니어 호의 해양 탐사는 진화론 창시자인 다윈 탄생 200주년을 맞아 진행된 해양 탐사 가운데 가장 먼저 시작됐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권 박사는 출발 전 이뤄진 마지막 통화에서 “항해가 순조로울 경우 이르면 내년 3월에 전남 여수로 돌아올 계획”이라고 밝혔다. 새롭게 시작된 장보고 주니어 호의 흥미진
진한 모험은 과학동아와 어린이과학동아, 인터넷과학신문 더사이언스(www.thescience.co.kr)에 계속 소개될 예정이다.


 
멕시코에서 온 편지

안녕하세요.‘다윈을 따라서’의 권영인입니다. 내일은 이곳 시간으로 11월 3일. 탐사를 시작한 지 꼭 390일째 되는 날이자 목적지 갈라파고스를 향해 출항하는 날입니다. 예상되던 허리케인이 소멸해 예정일인 7일보다 조금 일찍 출항합니다.

우리 세 사람은 내일 아침 9시 간단한 출항식을 갖고 10시 마사틀란항을 떠나 태평양을 횡단하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일단 출항을 하게 되면 잠시 연락이 끊어질 것 같습니다. 중간 기착지인 갈라파고스 섬과 하와이에서 연락드리겠습니다.

탐사장비로 가져온 메탄 측정장치와 이산화탄소측정기, 수질 측정시스템은 현재 정상 작동하고 있습니다. 마사틀란 항구 안에서 실험을 해본 결과 이곳 바닷물에는 유기물이 풍부해 많은 양의 메탄이 물에 녹아 있었습니다. 갈라파고스 제도까지는 약 1개월이 걸릴 것으로 보입니다. 거리는 멀지 않지만 바람 사정이 좋지 않다 보니 예상 외로 시간이 오래 걸릴 것같습니다.

수 개월간의 힘든 준비 과정과 어려움도 여러분의 격려로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거친 파도와 힘겨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여수에 도착하는 그 날까지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멕시코 서해안 마사틀란에서 권영인 드림

 

2009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박근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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