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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생명과학계에 ‘작은 RNA’ 바람이 거세다.
고작 20개 안팎에 불과한 염기서열이 암세포를 저격하고, 해로운 농약 없이도 해충으로부터 농작물을
보호할 수 있단다. 염기서열 20개가 무슨 일을 하기에 이처럼 놀라운 위력을 발휘하는 걸까.
1993년. 당시 하버드대 소속(현재는 매사추세츠 의대) 빅터 암브로스 박사는 학술지 ‘셀’에 논문 한 편을 낸다(DOI:10.1016/0092-8674(93)90529-Y). 예쁜꼬마선충(C. elegans)의 성장 속도를 조절하는 유전자를 연구해 보니, 사실은 그 유전자가 복제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RNA가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암브로스 박사팀은 22개의 염기서열로 이뤄진 RNA가 예쁜꼬마선충의 성장을 억제하는 단백질을 못 만들게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마이크로RNA(miRNA)의 정체가 세상에 드러난 순간이다.
그로부터 5년 뒤, 카네기연구소의 앤드루 파이어 박사(현재 스탠퍼드대 의대 교수)와 매사추세츠대 의대 크레이그 멜로 교수팀은 예쁜꼬마선충에 인위적으로 작은 RNA 조각을 주입해서 특정 유전자 발현을 억제했다는 실험 결과를 ‘네이처’에 발표했다(doi:10.1038/35888). 두 사람은 이 현상에 RNA 간섭(RNA interference·RNAi)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너무나 획기적인 연구 성과였기에, 발표한 지 8년만인 2006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차차 연구가 진행되면서, 이 두 사례는 작은 RNA가 유전자 발현을 억제하는 두 가지 방식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전자가 miRNA에 의한 RNA 간섭이라면, 후자는 ‘작은간섭RNA(siRNA)’가 일으키는 RNA 간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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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발현 ‘지휘자’ 작은 RNA
작은 RNA는 길이가 수 나노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작다. 하지만 생명체 안에서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먼저 RNA가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생명체의 DNA는 RNA가 있어야만 단백질을 만들어 생명활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 있다. DNA 이중나선에서 유전 정보를 복사한 전령RNA(mRNA)가 세포핵 밖으로 나와 리보솜이라는 세포 내 소기관에서 단백질을 합성한다. 단백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인 아미노산은 운반RNA(tRNA)가 가지고 온다.
RNA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mRNA처럼 가지고 있는 정보를 이용해 단백질을 만드는 번역(coding) RNA와 tRNA처럼 단백질을 만들지 않는 비번역(noncoding) RNA다. miRNA와 siRNA도 직접 단백질을 만들지는 않기 때문에 비번역 RNA다.
비번역 RNA에 비해 번역 RNA가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번역 RNA는 전체 RNA에서 극히 일부(약 1%)에 지나지 않는다. 나머지 대다수는 miRNA와 siRNA를 포함한 작은 RNA들이다. 지금까지 발견된 miRNA만 해도 5000개가 넘고, 사람에게도 1000개 이상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예쁜꼬마선충의 성장 속도를 조절하는 것처럼 다양한 유전자 발현을 조율하면서 생명 현상을 지휘하는 것으로 속속 밝혀지고 있다.
일당백 vs. 원샷 원킬
두 작은 RNA는 DNA의 유전정보가 단백질로 발현되는 것을 방해한다는 측면에서 기능이 같다. 하지만 이들의 출처나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방법은 서로 다르다.
miRNA의 출처는 아직 다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DNA의 인트론 부위에 있는 염기서열과, mRNA에서 단백질 합성과 관련 없는 염기서열에서 유래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인트론은 DNA에서 단백질 생성에 필요한 재료인 아미노산을 지정하는 정보가 아닌 것들을 말한다. DNA는 mRNA로 전사될 때 인트론 부분을 빼고 나머지 부위(엑손)만을 추려 보내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mRNA에도 단백질 합성과 관련 없는 부분이 있다. 비해석부위(Untranslated Region·UTR)라고 부르는데, 이 짧은 염기서열도 miRNA의 주요 출처다.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세포 안에서 miRNA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주도적으로 밝힌 과학자다. 김 교수팀은 2003년 드로샤(Drosha)라는 효소가 miRNA의 전사체(pri-miRNA)를 인식해 염기 60여 개 길이의 조각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밝혔다. 2004년에는 대다수의 유전자 전사를 담당하는 RNA중합효소Ⅱ가 miRNA 유전자의 전사도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전까지 과학자들은 tRNA의 유전자를 전사하는 RNA중합효소Ⅲ가 miRNA의 전사도 담당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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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만들어진 miRNA는 두 가닥이 달라붙은 구조를 이뤄 세포핵 밖으로 나온다. 그런 뒤 다이서(Dicer)라는 가수분해효소에 의해 두 개로 잘린다. 둘 중 가이드RNA라 불리는 조각은 리스크(RNA Induced Silencing Complex·RISC)라는 효소 복합체와 결합해 세포질을 떠다니는데, 상보적인 염기서열을 가지고 있는 mRNA를 만나면 RISC의 도움을 받아 달라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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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NA는 miRNA의 일부가 효소에 의해 변형된 것과 몸 밖에서 제작한 뒤 주입해 주는것 두 가지가 있다. 특히 mRNA를 인식하고 결합하는 상보적인 염기서열이 miRNA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기 때문에 단 하나의 mRNA에만 달라붙는다. miRNA가 ‘일당백’이라면 siRNA는 ‘원샷 원킬’인 셈이다(식물의 miRNA 중에는 siRNA처럼 하나의 mRNA에만 달라붙는 것도 있다).
단백질 생산을 막는 방법도 조금 다르다. miRNA는 리보솜에서 단백질을 만들고 있는 mRNA에 달라붙어 단백질 생산을 방해하는 반면, siRNA는 아직 리보솜과 결합하지 않은 mRNA에 달라붙어 mRNA를 분해한다.
차세대 항암 치료제로 주목받는 siRNA
최근 신약개발 분야에서 siRNA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는 바로 siRNA가 가진 ‘표적 특이성’ 때문이다. 현재까지 수많은 화학 치료제가 개발됐지만, 개발 효율이 점차 떨어지는 추세다. 특히 항암제의 경우 치료제에 내성을 가진 암세포가 많아지고 있지만 새로운 치료제를 개발하는 속도는 더디다.
siRNA가 발견된 이후 과학자들은 암세포에서 단백질을 생산하는 mRNA를 표적으로 달라붙는 siRNA를 인위적으로 합성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있다. siRNA를 이용하는 이유는 ‘원샷 원킬’ 특성 때문이다. miRNA를 활용하면 암세포에서 다양한 단백질을 동시에 차단할 수 있지만 자칫 다른 세포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위험요소가 있다. 현재의 항암제도 암세포 단백질의 특정 부위에 결합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데, 이 역시 정상 세포의 단백질에 달라붙어 부작용을 일으킨다.
약을 목적지로 전달하는 전달체를 매번 새로 개발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중요한 장점이다. 현재는 약마다 다른 전달체를 개발해서 써야 해 신약 개발비가 더 많이 든다. 하지만 siRNA 치료제의 경우 염기서열만 바꿔주면 되기 때문에 전달체를 바꿀 필요가 없다. 이런 이유로 현재 전세계에서 40건 이상의 siRNA 표적치료제가 임상시험 중이다.
넘어야 할 산도 있다. 아직까지 siRNA를 효과적으로 목적지까지 보내주는 이상적인 전달체가 나오지 않았다. siRNA는 혈액을 타고 흐르면서 혈액 속 효소에 의해 분해되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호하면서 목적지까지 운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하지만 현재까지 개발된 고분자, 리포좀(지질로 이뤄진 구형 캡슐), 바이러스 전달체들은 전달 효율이 떨어지거나 독성을 띠 는 등의 문제가 있다. 짐 싣는 트럭에 비유 하자면, 트럭이 무겁거나 위험해 정작 짐은 제대로 실을 수 없는 셈이다. 바이러스의 경우 효율은 좋은 편이지만 돌연변이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 게다가 약을 표적 세포로 보내주는 능력도 떨어진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체를 만든 연구도 있다. 안형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의공학연구소 책임연구원팀은 효율과 독성 면에서 기존보다 뛰어난 전달체를 개발하고 ‘네이처 커뮤니케이션스’ 2015년 8월 6일자에 발표했다(doi:10.1038/ncomms8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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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세포에 들어가면 전달체가 자연스럽게 풀어지면서 siRNA들이 떨어져 나가 mRNA를 분해하기 시작한다. 한 번에 많은 siRNA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고, 고분자물질을 쓰지 않아서 인체에 무해하다. 안 연구원은 “서로 다른 항암 효과를 주는 두 종류 이상의 siRNA를 함께 전달할 수 있고, 기존 항암 화학치료제에 대한 거부반응(항암 내성)을 완화시켜 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연구팀이 항암 내성을 일으키는 단백질을 억제하는 siRNA와 항암제를 함께 투약해 실험한 결과 항암제만 먹을 때보다 약효가 7배 높아졌다. 이 연구 결과는 올해 8월 26일 ‘사이언티픽 리포트’에 게재됐다(doi:10.1038/srep32363).
일각에서는 siRNA를 이용해 농작물을 해충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계획도 진행하고 있다. 미국의 종자회사인 몬산토는 유전자변형농산물(GMO)의 유해성 논란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충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단백질 생성을 방해하는 siRNA를 주입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꿀벌의 개체수 감소에 영향을 미치는 진드기 방제나, 유독성 살충제(DDT) 사용으로 논란을 빚은 콜로라도감자잎벌레 퇴치에도 siRNA 적용을 시도하고 있다.
miRNA와 siRNA는 작은 RNA의 전부가 아니다. 새로운 작은 RNA가 계속해서 발견되고 있다. 생명과학계의 또 다른 화두인 ‘유전자 가위’ 기술에도 작은유도RNA(sgRNA)라는 RNA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밖에도 snRNA와 snoRNA 등 다양한 작은 RNA들이 생명과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miRNA와 siRNA의 역할은 ‘작은 RNA 월드’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지금 우리 몸속에서 어떻게 상호작용하고 있을까. 앞으로 인간의 미래를 어떻게 바꿀까. 우리는 아직 작은 RNA를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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