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연구기관이 밀집한 대전 대덕연구단지에서 차로 30분을 달리자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신동지구가 나왔다. 흙바람이 날리는 허허벌판 한 가운데에서 공사가 한창이었다. 3년 뒤 이곳에는 단군 이래 최대 규모의 연구시설로 불리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라온(RAON)’이 들어선다.
5월 11일 라온 구축 현장을 찾았다. 가속관이 지나갈 가속터널 벽면의 시멘트를 굳히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기초과학국책 사업인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가 2011년 출범하면서, 그해 12월 한국형 중이온가속기 건설도 시작됐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난 올해, 라온은 본격적인 구축에 들어갔다. 2021년 라온이 완공되면 한국은 세계 최고 성능의 희귀 동위원소과학시설 보유국이 된다.
축구장 130개 크기, 국내 최대 규모 단일 연구시설
“아까 서있던 지점에서 중이온이 발생되고, 이쯤 오면 에너지가 37배가량 커집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빅뱅 3분 후 우주가 탄생하던 순간의 비밀이 밝혀지겠죠.”
정순찬 기초과학연구원(IBS)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장(위 사진)과 함께 라온의 가속장치(SCL)가 놓일 터널을 걸었다. 터널 길이는 총 95.5m. 설명을 들으며 걸었더니 80초 쯤 걸렸다. 하지만 향후 라온에서 생성될 이온은 이 거리를 15만 분의 1초 만에 날아가게 된다. 눈을 깜빡이기도 전인 찰나의 순간이다.
가속기는 입자를 빠른 속도로 가속시키는 장치다. 원자 속 중성자를 제외한 모든 입자가 가속기의 ‘재료’가 된다. 양성자를 가속하면 양성자가속기, 전자를 가속하면 전자가속기가 된다. 이중 중이온가속기는 말 그대로 중(重)이온, 즉 무거운 이온을 가속시킨다. 중이온가속기는 헬륨(He) 보다 무거운 원자를 이온으로 만든 뒤 가속시켜 자연에 존재하지 않는 희귀동위원소를 얻는다.
라온은 중이온을 가속하는 직선 형태의 선형가속기 중 세계 최대 규모로 건설된다. 부지의 면적은 95만2066m2로 축구장 130개의 면적과 같다. 이 공간에 지하 2층, 지상 3층 규모로 라온의 연구시설이 들어선다. 정 단장은 “가속기의 규모가 클수록 높은 에너지의 입자를 얻기에 유리하다”며 “라온 구축 현장을 방문한 해외 연구자들도 생각보다 큰 규모에 놀라움을 표했다”고 말했다.
이곳에는 원소를 이온화시키는 ‘이온 발생장치’, 낮은 에너지의 이온빔을 높은 에너지를 갖도록 가속시키는 ‘가속장치’, 가속된 이온빔을 표적에 충돌시켜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하는 ‘희귀동위원소 생성장치’, 생성된 희귀동위원소를 추출해 다양한 연구를 수행하는 ‘실험장치’ 등 연구시설이 구축된다.
이중 가속장치는 콘크리트 터널에 둘러싸인 형태로 지하 13m 깊이에 묻힌다. 폭과 높이가 각각 7m인 터널 벽의 두께는 3m가 넘는다. 운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을 차폐하기 위해서다. 2012년 ‘신의 입자’로 불리는 힉스를 발견한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거대강입자가속기(LHC)는 같은 이유로 지하 175m에 묻혀 있다.
중이온의 에너지가 높아지는 구역일수록 벽은 두꺼워진다. 때문에 선형가속기 구간의 터널 벽면의 최대 두께는 4.7m다. 조장형 시설건설사업부장은 “가속터널은 지진 등 갑작스러운 자연재해에 대비해 최대지반가속도 0.3g, 그 외 실험시설은 0.2g의 지진(진도 6.58)에 버틸 수 있는 내진설계를 갖췄다”며 “부지 주변을 조사한 결과 활동성 단층은 발견되지 않았고, 홍수 가능성도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고 설명했다.
원자핵 들여다보는 초거대 현미경
질소, 산소, 이산화탄소 등 기체는 상온에서 초속 460m로 움직인다. 이때 기체 분자의 운동에너지는 25meV(밀리전자볼트·1meV는 1000분의 1eV) 정도다. 온도를 높이면 입자의 운동 에너지를 높일 수 있다. 가령, 온도를 1만 도까지 높였을 때 입자의 운동에너지는 1eV(전자볼트)다. 하지만 이보다 더 높은 에너지를 갖는 입자를 얻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바로 전기를 이용하는 것이다. 가속기도 이 원리를 활용한다.
가속기의 원리 자체는 간단하다. 양(+)극이나 음(-)극 중 한 가지 성질만 가진 구슬이 원통 안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원통은 전기를 연결하면 한쪽은 양극, 다른 쪽은 음극을 띠게 만들어졌다. 이 원통에 전압을 가하면 구슬은 원통 속에서 한 쪽 방향으로만 굴러간다. 한쪽 끝은 같은 극의 구슬을 밀어내고, 다른 한쪽 끝은 구슬을 잡아당기기 때문이다.
원통의 길이를 늘이고, 전압을 높이고, 더 작은 구슬을 사용하면 구슬의 속도는 더 빨라진다. 즉, 라온에서 원통은 가속관이고, 구슬은 전자를 잃고 양극이 된(이온화된) 무거운 원자다.
라온은 중이온이라는 구슬을 통해 펨토미터(fm·1fm는 1000조 분의 1m) 수준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나노과학이 분자를 관찰했다면, 펨토과학은 원자의 중심부에 있는 원자핵과 원자핵을 구성하는 양성자, 중성자의 세계를 탐구한다.
원자핵을 보기 위해서는 최소 100만eV(1MeV·메가전자볼트)의 운동에너지가 필요하다. 원통에 1V의 전압을 가한 상태에서 전자가 한쪽 끝에 도달할 때의 운동에너지가 1eV다. 100만eV를 구현하기 위해 1V의 건전지 100만 개를 직렬로 연결해도 된다. 하지만 건전지 1개의 길이가 1cm, 가격이 1000원 이라고 가정해도 10억 원 어치의 건전지를 10km 길이로 연결해야 가능한 이야기다. 이보다 쉽게 높은 전압을 얻기 위해 과학자들이 개발한 장치가 가속기다.
라온이 ‘구슬’로 사용하는 원자핵은 양성자와 중성자로 이뤄지며, 그 조합에 따라 각기 다른 동위원소(핵종)가 된다. 양성자 수는 원자번호를 의미하는 동시에 원소의 화학적 성질을 결정하고, 양성자와 중성자 수의 합은 질량을 결정한다. 동위원소는 양성자의 수가 같지만(원자번호가 같지만) 중성자의 수가 달라 질량이 다른 ‘쌍둥이 원소’를 뜻한다.
가령, 양성자가 1개(원자번호 1번)인 수소는 중성자가 0개다. 중성자가 1개면 중수소, 2개면 삼중수소로 불리며, 이들이 수소의 동위원소다. 중수소나 삼중수소는 자연 상태에서 발견되기 때문에 ‘안정동위원소’로 불린다.
양성자와 중성자의 조합에 따라 1만 개 이상의 동위원소가 나타날 수 있지만, 현재까지 과학계에서 발견된 것은 118개의 원소와 3000여 개의 동위원소뿐이다. 동위원소의 대부분이 자연에 존재하지 않고, 인공적으로 만들어도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매우 희귀하고 수명이 짧다는 의미에서 이들은 ‘희귀동위원소’라 부른다.
미지의 70% 원소 탐색
중이온가속기는 희귀동위원소를 만들고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속기를 이용한 희귀동위원소 생성법은 두 가지다. ‘대전류 저에너지 희귀동위원소 빔 생성(ISOL·I sotope Separation On-Line)’ 방식과 ‘소전류 고 에너지 희귀동위원소 빔 생성(IF·In-flight fragmentation)’ 방식이다.
두 방식은 각각의 장단점이 있다. ISOL은 가벼운 원소의 이온을 가속해 두꺼운 표적에 충돌시킨다. 이때 표적과의 핵반응으로 희귀동위원소가 생성된다. 표적이 두꺼운 만큼 여러 번의 핵반응이 일어나기 때문에, 한 번의 충돌로 대량의 휘귀 동위원소가 생성된다. 그리고 이를 4만V(볼트)의 전기장을 걸어 이온화시켜 추출한다. 이온화는 원소에서 전자를 하나 떼거나 더한다는 의미다.
강병휘 RI실험장치팀장은 “ISOL로 생성하는 희귀동위원소는 그 종류가 제한적이라는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충분한 고온·저압의 상태가 유지돼야 표적에서 희귀동위원소가 빠져나올 수 있다. 하지만 ISOL 시스템이 버틸 수 있는 최대 온도는 2000도로, 이보다 높은 온도에서는 장치가 타버린다. 니오븀(Nb), 텅스텐(W) 등 녹는점이 2000도가 넘는 전이금속은 전통적인 ISOL 방식으로 희귀동위원소 빔을 생성하기 어렵다는 의미다.
반면 IF는 무거운 원소의 이온을 가속해 탄소(C) 등 가벼운 원소로 된 표적에 충돌시키고, 이 과정에서 쪼개진 무거운 원소의 파편 중 희귀동위원소를 추출하는 방식이다. ISOL과 달리 이온빔의 에너지가 높아 거의 모든 희귀동위원소를 추출할 수 있다. 생성된 동위원소는 자석으로 빠르게 분리해내기 때문에 수명이 짧은 동위원소의 획득에도 유리하다. 하지만 이때 분리하고자 하는 동위원소가 아닌 다른 동위원소가 함께 추출될 수 있어 ISOL로 만들어진 동위원소에 비해 품질이 떨어진다.
강 팀장은 “ISOL 동위원소 빔의 품질(순도)이 IF에 비해 100배 이상 우수하다”며 “결국 다량의 고품질 희귀동위원소를 얻기 위해서는 ISOL이, 수명은 짧지만 다양한 종류의 동위원소를 얻기 위해서는 IF가 유리하다”고 말했다.
전 세계의 가속기들은 연구 목적에 따라 ISOL과 IF 중 한 가지 생성방식을 사용한다. 현재 운영 중인 4기의 중이온가속기 중 캐나다 국립입자핵물리연구소(TRIUMF)의 ‘아이작(ISAC)’과 유럽입자물리연구소(CERN)의 중이온가속기(HIE-ISOLDE)는 ISOL 방식을, 일본 이화학연구소(RIKEN)의 중이온가속기(RIBF)와 중국 현대물리학연구소(IMP)의 중이온가속기(HIRFL)는 IF 방식을 선택했다.
이와 달리 라온은 ISOL과 IF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하는 동시에 결합 방식까지 적용했다. 이런 형태의 중이온가속기는 세계 최초다. 미국 미시간주립대(MSU)가 2022년 가동 예정인 IF 방식의 중이온가속기(FRIB)에 추가로 ISOL 방식까지 결합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완성까지는 10년 이상 걸릴 전망이다. 그때까지 라온은 ‘세계 유일의 ISOL과 IF 결합 중이온가속기’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게 된다.
강 팀장은 “ISOL로 희귀동위원소를 생성한 뒤 이를 IF로 다시 가속하는 결합 방식을 사용하면 한 가지 방법만 사용하는 기존 방식보다 더 새롭고 희귀한 동위원소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세상을 놀라게 할 ㄱ, ㄴ, ㄷ
라온에서 생성될 동위원소는 세 가지 길, 즉 세 종류의 가속장치를 통과할 예정이다. 이들 가속장치는 각각 ‘ㄱ’ ‘ㄴ’ ‘ㄷ’ 모양으로 놓인다. 각 가속장치는 연구목적에 따라 다양한 실험시설로 동위원소를 보낸다. 현재 건설이 확정된 것은 ㄱ 모양의 ‘SCL3’과 ㄷ 모양의 ‘SCL2’다
SCL3에서는 희귀동위원소와 안정동위원소를 이용한 실험이 모두 가능하다. 원통형 소형 가속기인 사이클로트론과 ISOL로 생성한 희귀동위원소를 가속시키거나, ECR 이온원에서 안정동위원소를 얻어 가속시키면 된다.
총 길이 95.5m인 SCL3은 가속관 125개를 이은 것이다. 가속관을 따라 운동을 시작한 입자는 초기 운동에너지가 핵자당 500keV(킬로전자볼트·1keV는 1000eV)였다가 종료점에서는 18.5MeV으로 37배가량 커진다.
이들 가속관은 초전도상태에서 동작하기 위해 2~4개씩 짝을 이뤄 54개의 저온유지용기(모듈) 안에 담긴다. 전단부에 위치한 22개의 모듈은 영하 269도(4K·절대온도 4도), 후단부에 위치한 32개의 모듈은 영하 271도(2K)로 유지된다.
장현만 장치기반기술팀장은 “모듈은 가속관을 초전도 상태로 보관하는 일종의 냉장고”라며 “영하 270도 정도의 온도에서는 대부분의 기체들이 얼어 가속관 내부 기압이 대기압의 1조 분의 1 수준인 초고진공 상태가 된다”고 말했다. 이 덕에 가속 과정에서 다른 입자와의 충돌로 인한 에너지 손실을 줄일 수 있다.
초전도는 영하 273도(0K)에서 전기저항이 0이 되는 상태를 말한다. 초전도와 상전도 상태 모두에서 입자의 가속은 가능하다. 초전도 가속관의 초기 개발비용이 높음에도 이를 사용하는 이유는 구축비용을 절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회천 가속장치팀장은 “초전도 상태에서 가속관의 전기저항은 수십만 배 낮아지고, 동일한 성능을 내기 위해 필요한 전력도 수십 배 낮아진다”며 “저항으로 인해 발생하는 열을 제거하기 위한 냉각시스템도 갖춰야 하는 만큼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초전도 가속관이 경제적인 선택”이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가속관은 초전도체인 니오븀으로 만들어졌다. 재료를 적게 써 구축비용을 줄이기 위해 두께 2~3mm의 얇은 판재로 제작한다.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은 2015년 초전도 가속관의 국산화에 성공했다. 세계에서 8번째로 이룬 성과다.
생성된 동위원소 빔이 벽에 부딪히지 않고 끝까지 전달될 수 있도록 초전도 자석을 이용해 방향을 조절한다. 중이온의 흐름은 일종의 전류다. 플레밍에 왼손법칙에 따라 전류(I)는 자기장(B)의 방향에 따라 힘(F)을 받는 방향이 결정된다. 자기장의 방향을 제어할 때에는 N극과 S극을 가진 2극 자석을, 가속관의 끝부분에서 빔을 집속할 땐 4극 자석을 활용한다.
장 팀장은 “라온 구축에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은 무수히 많지만, 초전도 자석은 그 중에서도 ‘끝판 왕’”이라며 “말 안장 모양의 곡면에 지름이 1mm도 안 되는 초전도 코일을 하나하나 손으로 촘촘하게 감아 제작한다”고 말했다.
복잡한 구조물들을 거쳐 SCL3을 달려온 입자는 저에너지 핵과학 실험에 사용된다. 희귀동위원소와 안정동위원소의 핵을 서로 충돌시키는 실험을 통해 핵의 특이 구조를 규명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한편 SCL2는 SCL3을 지나면서 생성된 희귀동위원소를 IF방식으로 다시 한 번 가속하는 데 쓰인다. 희귀동위원소 빔은 180m 길이의 SCL2에서 48개의 모듈에 담긴 219개의 가속관을 한 번 더 통과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18.5MeV의 운동에너지는 200MeV까지 높아진다.
SCL2에서 가속된 빔은 중간에너지 핵과학 실험에 사용된다. 중성자 과잉 희귀동위원소 핵을 충돌시켜 중성자별과 같은 물질의 고밀도 상태를 규명할 수 있다. 빅뱅 3분 이후 태초의 우주가 형성된 과정도 이 시설에서 밝혀질 수 있다.
이밖에도 ISOL에서 생성된 희귀동위원소의 질량을 정밀하게 측정해 희귀동위원소를 구별하고, 원자의 화학적 특성을 규명하기 위한 실험이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원소의 발견도 가능하다. 한국(KOREA)의 이름을 딴 ‘코리아늄’이 발견 될 수도 있다.
강 팀장은 “라온 완공 이후 일차적으로 이들 세 가지 실험장치가 먼저 들어설 예정”이라며 “이들은 각각 저에너지 핵과학, 고에너지 핵과학, 응용 분야의 대표적인 연구가 가능한 장치”라고 설명했다.
이들 장치가 들어설 가속기동은 2020년 12월 구축이 끝난다. 이후 ISOL 시스템과 IF 시스템의 시운전을 순차적으로 진행하고 나면 라온은 2022년 본격적으로 실험을 시작한다.
정 단장은 “머릿속으로만 그려왔던 라온이 곧 모습을 드러낸다는 생각에 연구진들은 설렘 반, 걱정 반인 상태”라며 “중이온가속기건설구축사업단의 최종 목표는 라온을 문제없이 완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 단장은 또 “라온 완공 뒤에도 누구보다 라온을 잘 아는 연구자로서 라온을 보살피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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