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압의 1경분의 1수준밖에 안 되는 초고진공 상태,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한 영하 270℃ 안팎의 극저온. 바로 양자물질이 사는 극한 환경이다. 1차원과 2차원, 3차원 양자물질 연구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연구 성과를 낸 국내 연구팀 세 곳을 찾았다.
4진법 컴퓨터의 열쇠로 떠오른 원자선
“그냥 눈으로 봤을 때는 특별할 게 없어요. 실험장치에 넣고 진공과 온도 조건을 조절한 다음 원자를 볼 수 있는 주사터널링현미경(STM)으로 찍으면 그때 ‘뭔가’를 볼 수 있죠.”
김태환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는 1차원 인듐 원자선 샘플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처럼 샘플은 특별할 게 없는, 검은색 빛이 도는 반도체 웨이퍼를 사각형으로 잘라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겉으로 보기에 특별할 게 없다고 무시할 수 없다. 그 안에는 가시광선의 파장보다 수백 배 작아, 눈으로 볼 수 없는 인듐 원자들이 일렬로 배열된 1차원 양자물질인 ‘인듐 원자선’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인듐 원자선은 500℃의 온도에서 실리콘 표면에 뿌린 인듐 원자들이 사슬처럼 엮인 상태로, 전자들이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1차원밖에 없기 때문에 1차원 양자물질로 불린다. 실험장치에 샘플을 넣고 100억분의 1 torr(토르, 1토르는 1기압의 760분의 1)의 초고진공과 영하 195.15℃(78K)의 온도 조건을 만들어 주면 그 안에서 ‘카이럴 솔리톤’이라고 부르는 양자상태가 나타난다.
김 교수는 실험실 한쪽에 있는 컴퓨터 모니터에 STM으로 측정한 사진을 띄웠다. 사진은 인듐 원자들이 쌍을 이루면서 전자들의 밀도가 주기적으로 높아지고 낮아진 모습(전하밀도파, 오른쪽 위 사진)을 포착한 것이었다. 김 교수는 그 안에 카이럴 솔리톤이 있다고 가리켰다.
솔리톤은 파동이 마치 ‘독립’된 것처럼 일정한 속도와 모양으로 전파되는 현상을 말하며, 자연에서는 조수해일과 혈관 속 혈액의 흐름 등에서 다양한 종류의 솔리톤을 발견할 수 있다. 원자선에 생기는 전하밀도파속에도 솔리톤이 만들어진다. 원자가 좌우에 있는 다른 원자와 짝을 짓는 방법에 따라서 중간에 짝을 짓지 못하고 남은 원자가 ‘하나’ 생길 수 있는데, 그게 솔리톤이다. 특히 원자선 두 개가 인접해 있으면 위, 아래 원자선의 짝짓기 방법에 따라서 서로 다른 종류의 솔리톤이 만들어지는데, 이를 카이럴 솔리톤이라고 부른다(82쪽 위 그림 참고). 두 개의 인접한 원자선에서는 총 세 가지의 위상전하 값(-1, 1, -2 또는 2)을 갖는 카이럴 솔리톤이 나온다.
김 교수는 같은 학과의 염한웅 교수(기초과학연구원 원자제어저차원전자계 연구단장)와 공동으로 카이럴 솔리톤을 이용해서 4진법 연산을 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를 ‘네이처 피직스’ 2월 6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doi:10.1038/nphys4026). 솔리톤이 없는 상태와 세 가지 카이럴 솔리톤을 각각 0과 -1, 1, 2(또는 -2)로 뒀을 때 서로 연산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다. 예컨대 -1과 2 상태를 더하면 1 상태가 나오고, 2에 2를 더하면 다시 0이 나오는 것을 확인했다. 4진법 연산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결합되지 않은 두 원자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1 상태고 결합된 두 원자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1 상태라고
부른다. 위, 아래 원자선의 결합 방식이 똑같아서 솔리톤의 위치가 같은 경우를 +2 또는 -2로 나타내면,
솔리톤이 없는 경우(0)까지 더해 총 4가지 상태로 4진법을 표현할 수 있다.
그래핀의 꿈 실현해 줄 ‘전하 가이딩’
2차원 양자물질인 그래핀을 연구하는 이후종 포스텍 물리학과 교수의 실험실에서는 말로만 듣던 셀로판테이프를 이용한 그래핀 박리작업이 한창이었다. 흑연 덩어리에 셀로판테이프를 붙여서 떼어내는 과정을 여러 번 반복하면서 흑연 원자 한 층인 그래핀 박막을 분리해 내는 작업이다. 그래핀은 이미 대중에 잘 알려진 물질이다. 원자 한 층에 불과한 두께이면서 같은 크기에서 비교할 때 강철보다 200배 이상 강도가 세고 구리보다 100배 이상 전기가 잘 통한다. 게다가 투명하고 구부러지기까지 해 ‘꿈의 물질’로 불린다. 하지만 그래핀의 실용적인 가능성만 너무 부각돼 양자물질로서의 가치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핀을 만드는 과정. 이후종 교수는 “우리 실험에 필요한 샘플은 크기가 수 마이크로미터(μm, 1000분의 1mm) 정도면 충분하기 때문에 노벨상 수상자들이 사용했던 방식대로 셀로판테이프로 그래핀 박막을 떼어낸다”고 말했다.
어떤 물질이 전자소자가 되려면, 반도체처럼 전류를 원하는 방향으로 흐르게 해야 한다. 반도체에서는 금속 게이트를 붙여서 게이트 전위를 이용해 전류를 흐르거나 흐르지 못하게 제어한다. 하지만 그래핀은 전류가 잘 흐르는 도체 상태만 가지기 때문에 전자소자로 활용할 수 없었다. 연구팀은 그래핀에 전류 흐름을 최소화할 수 있는 ‘디랙점’이 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디랙점은 전자 밀도가 낮아 저항이 현저하게 커지는 게이트 전위 조건을 말한다. 전류가 매우 적게 흐른다. 이 현상을 잘 이용하면 전류가 원하는 경로를 따라 흐르게 할 수 있다.
이 교수팀은 반도체에서 사용하는 금속 게이트를 그래핀에 적용해 전류의 흐름과 방향을 정교하게 조절할 수 있었다. 모두가 꿈꾸는 그래핀의 특성을 살린 전자소자를 개발할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고온초전도체 비밀에 한 걸음 가까이
김창영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는 초전도체와 위상절연체 등의 3차원 양자물질을 연구한다. 처음 그의 실험실에 들어갔을 때 눈길을 끌었던 것은 온통 은박지로 싸여 있는 실험장치였다(오른쪽 사진). 마치 초등학생들이 은박지를 뭉쳐서 만든 공예품처럼 보여 도무지 ‘폼’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야기를 들어 보니 아파트 한 채 값을 호가하는, ‘억 소리 나는’ 물건이었다.
“은박지를 붙인 건 열전도 때문입니다. 1기압의 1경분의 1에 달하는 초고진공을 만들어 줘야 하는데, 장치 안에 붙어 있는 물 분자가 그걸 방해하거든요. 그래서 열선을 감아 장치를 뜨겁게 만들어 물 분자를 떼어냅니다. 그런데 장치가 스테인리스 재질이라 열전도가 잘 안 돼요. 은박지가 열을 고르게 전달하는 역할을 해 줍니다.”
최근 주목을 받는 것은 고온초전도체 연구다. 김 교수팀은 철 기반 고온초전도체의 임계온도를 높이기 위한 조건이 기존 이론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고 ‘네이처 머티리얼스’ 2016년 8월 15일자 온라인판에 발표했다(doi:10.1038/nmat4728).
초전도체는 초전도성이 나타나는 임계온도에 따라서 30K 이하는 저온초전도체, 그 이상은 고온초전도체로 분류한다.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상온(20~25℃)에서 초전도성을 띠는 물질은 상온초전도체라고 부른다.
저온초전도체는 1911년 수은에서, 고온초전도체는 1986년 구리 화합물에서 발견됐다. 현재 대기압 정도의 압력에서는 약 135K까지, 고압에서는 202K까지 초전도성이 나타나도록 임계온도를 높인 상태다. 1957년 존 바딘과 리언 쿠퍼, 존 로버트 슈리퍼가 저온초전도 현상의 원리를 밝혔지만, 고온초전도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대해서는 30년 이상 난제로 남아 있다. 현재 자기공명영상(MRI) 장치나 자기부상열차 등에 초전도체를 활용하고 있는데, 고온초전도체의 원리가 밝혀지고 상온초전도체를 발견한다면 인류 문명에 혁신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전망한다.
하지만 김 교수팀이 철-닉토겐 초전도체를 만들고 실험한 결과, 네스팅 조건이 맞지 않아도 임계온도가 17K나 높아졌다. 철 기반 고온초전도체의 임계온도는 네스팅 조건과 관계가 없다는 걸 보인 것이다. 김 교수는 “철 기반 고온초전도체를 통합적으로 이해하는 이론을 만드는 데 기여한 것”이라고 말했다.
in 과학동아 31년 기사 디라이브러리(정기독자 무료)
‘미래를 ‘공중 부양’ 시킬 수 있을까’(2011.4)
dl.dongascience.com/magazine/view/S201104N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