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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2. 왓슨과 딥블루는 어떻게 챔피언을 무너뜨렸나



1996년 필자는 물리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 “우주의 모든 입자의 위치와 속도를 안다면 우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라플라스의 악마처럼 뉴턴 역학은 만물의 이치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고, 해밀턴역학은 만물이 철학적으로 움직인다는 인상을 줬다. 필자는 여기에 매료됐다. 그러나 이듬해 양자역학을 배우면서 이런 결정론에 회의가 들기 시작했다. 우주의 모든 입자는 고사하고 입자 서너 개의 상호작용도 깔끔한 수식으로 풀어낼 수 없다는 데 크게 실망하고 방황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TV에서 IBM의 체스 컴퓨터 ‘딥블루(DeepBlue)’가 전설적인 체스 챔피언 게리 카스파로프를 이기는 장면을 보게 됐다. 1997년이었다. 언젠가는 IBM에서 슈퍼컴퓨터를 만드는 데 참여하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갖고 전자공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그리고 그로부터 10년 뒤인 2007년에 뉴욕의 IBM 연구소에 입사했다.

퀴즈 챔피언 왓슨을 헷갈리게 한 바로 그 문제

당시 IBM은 퀴즈를 푸는 슈퍼컴퓨터 ‘왓슨(Watson)’을 개발하고 있었고 필자도 이 프로젝트에 간접적으로 참여했다. 체스는 경우의 수는 많지만, 규칙과 목표 자체는 단순한 게임이다. 컴퓨터의 장점, 즉 극대화된 계산 능력이 빛을 발하기에 꼭 맞는 분야다. 그에 비해 인간이 사용하는 자연어는 규칙이 단순하지 않고, 같은 표현이라도 전체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며, 온갖 비유와 역설적인 표현으로 가득 차 있어서 컴퓨터에게는 훨씬 어려운 분야다.

그러나 2011년 ‘제퍼디(Jeopardy)’ 퀴즈쇼에 출연한 왓슨은 역대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출연자 두 명을 압도적으로 물리쳤다. 당시 왓슨은 인터넷에 연결돼 있지 않았지만, 출전 전에 백과사전 몇 세트와 위키피디아의 모든 페이지를 학습한 방대한 결과를 메모리에 담고 있었다. 왓슨은 66문제를 맞혔고 9문제를 틀렸다. 맞힌 문제들 중에는 비교적 단순한 사실을 묻는 문제도 있었지만 쉽지 않은 추론이나 연상을 요구하는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면 ‘당신의 키보드에도 있다’라는 제시어를 주고, “마음이 머무는 곳은?(Proverbially, it’s where the heart is)”이라고 물었을 때 왓슨은 ‘Home’이라고 정답을 맞혔다(자판에 Home’
키가 있고, ‘Home is where the heart is’라는 구문이 있다).

인간 출연자가 쉽게 맞춘 것을 왓슨이 틀리기도 했다. ‘미국 도시’라는 제시어를 주고 “이 도시의 가장 큰 공항은 2차 세계 대전의 영웅 이름을 땄고, 두 번째로 큰 공항은 2차 세계 대전의 전투 이름을 땄다. 이 도시는?”이라고 물었을 때 왓슨은 ‘토론토’라는 오답을 골랐다. 토론토는 캐나다의 도시고, 정답은 전쟁 영웅 에드워드 오헤어와 미드웨이 해전의 이름을 딴 두 공항을 가진 시카고다. 왓슨의 개발자인 크리스 웰티는 왓슨이 문제의 ‘(이 도시의) 두 번째로 큰 공항’을 그저 ‘공항이 두 번째로 크다’고 잘못 해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토론토는 뉴욕에 이어 북미에서 두 번째로 큰 공항을 가지고 있다. 또 다른 개발자인 데
이빗 페루치는 미국에도 토론토라는 이름의 작은 도시가 있고, 미국 프로야구 아메리칸리그에 토론토를 연고로 한 팀이 있다는 점 등을 왓슨이 토론토를 걸러내지 못한 이유로 꼽았다.

모양 치중해 전체를 놓친 알파고

2011년 IBM을 퇴사하고 아주대로 와 하드웨어 분야를 연구하며 슈퍼컴퓨터 개발과 인공지능과는 한 발 떨어져 지냈다. 하지만 본업 외에 가장 관심을 가졌던 분야가 바둑이다. 필자는 한국기원공인 아마 5단으로 프로 기사와의 지도 대국에서 4점 접바둑으로는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그러나 만약 이세돌 9단과 100만 달러가 걸린 바둑을 둔다면 6점을 깔고도 떨릴 것 같다. 지금까지 최고의 바둑 컴퓨터는 기껏해야 필자와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이세돌에게 무턱대고 도전장을 내민 알파고가 궁금해 ‘네이처’에 공개된 알파고와 판 후이 2단의 기보를 살펴봤다.

알파고와 판 후이, 둘 다 필자보다 기력이 세다는 것을 금방 느꼈다. 알파고는 주로 전투보다는 타협하면서 균형을 잡는 쪽으로 행동했고, 이 과정에서 상대가 조금이라도 무리를 하면 전투로 제압하는 ‘수읽기’ 능력이 탁월했다. ‘확률’에만 초점을 맞춰 수를 두는 몬테카를로 방식을 채택한 바둑 프로그램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바둑은 수읽기로만 이뤄지지 않는다. 절반이 수읽기라면 나머지 절반은 소위 ‘감각’이라고 부르는, 모양에 대한 이해가 중요하다. 사람은 수읽기를 할 때도 감각을 바탕으로 탐색 공간을 몬테카를로 방식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줄여나간다. 특히 초반 포석 단계에서는 수읽기보다는 감각 위주로 수를 결정한다. 알파고는 대체로 나쁘지 않은 감각을 갖췄으나 종종 모양에 지나치게 치중해 더 큰 것을 놓치기도 했다. 사활이 걸렸을 때는 모양을 무시할 줄 알아야 하고, 부분적인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중요한 고지를 선점해야할 때도 있다. 이런 면에서 알파고는 판 후이와의 대결에서 아직 부족한 모습을 여러차례 드러냈다.



위 그림은 공식 대국의 두 번째 판으로 알파고가 흑이다. 이 바둑은 백(판 후이)이 초반에 일명 ‘큰 눈사태’ 정석 진행 과정에서 불리한 진행을 택한 데다, 무리수인 백62가 흑65에 끊겨 백 석 점이 잡힌, 흑(알파고)이 아주 우세한 국면이다. 백은 중앙에 최대한 모양을 키우는 것으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백86까지 진행된 다음 알파고는 오른쪽 아래의 흑87로 싸움의 방향을 튼다. 하지만 바둑을 조금이라도 둘 줄 아는 사람이라면, 주저하지 않고 흑91에 착수했을 것이다. 이 곳에 흑이 오는 순간 판 후이가 지금까지 공을 들였던 중앙의 세력이 당장 위축된다. 이런 자리를 외면하고 알파고가 전장을 이탈한 것은 아직 부분보다 전체를 보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후에도 실수가 이어지는데, 백이 왼쪽 아래에서 살기 위해 백134로 밀고 나오는 장면이다. 여기서 알파고는 흑135로 한 칸 뛰어 좋은 모양을 만들었는데, 그냥 A에 두었다면 백이 살 길이 없었다. 이 정도는 아마추어 중급자 정도만 돼도 찾을 수 있는 수다.
 

카스파로프의 교훈 “컴퓨터를 너무 높게 평가해서도 안 돼”

이 당시의 기보만 보면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이세돌 같은 일류 프로 기사와 2점 가까이 실력 차이가 나는 듯 하다. 알파고와 이세돌이 500판을 붙더라도 알파고가 단 한판을 따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노파심에 이세돌에게 조언을 한다면 프로 레벨에서 한 판도 나오지 않았던 초반 포석을 들고 나오는 것을 추천한다. 이 전략은 1997년 딥블루와 대결한 카스파로프가 여섯 판의 대결 중 첫 판에서 사용한 것이다. 당시 카스파로프는 기껏해야 초당 세 개의 말의 이동을 계산할 수 있었던 반면, 딥블루는 초당 2억 개가 넘는 말의 이동을 계산할 수 있었다. 이런 압도적인 계산 능력을 갖고도 딥블루는 초반이 약했다. 경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은 초반에는 초당 2억 번이든 세 번이든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IBM의 개발자들은 궁여지책으로 수십만 판의 체스 경기 결과를 분석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는데, IBM 측에서 “카스파로프는 컴퓨터가 아니라 체스 고수의 유령들을 상대하는 셈”이라고 표현했을 정도다. 하지만 카스파로프는 데이터베이스에 없는 수로 상대를 무력화했다. 체스의 첫 수로 수십 가지가 가능하지만 실제로 많이 두는 것은 대개 네 가지 정도다. 카스파로프는 이를 벗어나 불과 세 수만에 프로 수준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은 포석을 둬 딥블루의 데이터베이스를 무력화했고 그 판을 쉽게 이겼다.

딥블루는 첫 판에서 장기적인 전략에도 약한 모습을 보였다. 카스파로프가 폰(앞으로 한 칸만 움직이며 점수는 1점)들의 진출을 막던 딥블루의 비숍(대각선으로 움직이며 점수는 3점)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룩(장기의 차와 같이 직선으로 움직이며 점수는 5점)을 미끼로 내걸었을 때 딥블루는 여기에 걸려들었다. 점수가 낮은 말은 점수가 높은 말과 교환하라는 체스의 기본 이론을 따르느라 그 뒤에 숨겨진 큰 그림을 보지 못한 것이다. 한 쪽 진영이 취약해진 틈을 타서 카스파로프의 폰들이 진출했고 45수 만에 딥블루가 항복했다.

싱겁게 끝나는 경기에서 문제가 된 것은 마지막 수였다. 카스파로프는 이기긴 했지만 딥블루의 마지막 44수가 도무지 이해가 안 돼 답답했다. 숙소로 돌아와 다른 고수들과, 딥블루가 나오기 전까지 최고로 꼽혔던 ‘프리츠’라는 체스 컴퓨터까지 동원해 이후 진행을 분석했다. 그 결과 44수 대신, 고수들이 꼽은 다른 자리에 뒀다면, 20수 뒤에 카스파로프가 반드시 이기는 수순이 나왔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딥블루의 44수는 버그 때문에 나온 아무런 의미 없는 수였다. 카스파로프는 딥블루가 무려 20수 다음까지 내다보면서 일견 유력해보였던 수를 비튼 것이라고 오해했다.

제2국에서는 딥블루가 백을 잡았다. 바둑에서는 흑이 먼저 두는 유리함을 백에게 덤을 줘 상쇄하지만, 덤 같은 것이 없는 체스에서는 먼저 두는 백이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상대가 비슷한 실력이면 흑은 비길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2국에서 카스파로프는 조금 불리한 형세가 되자 일찍 포기해버렸다. 20수나 내다볼 수 있는 컴퓨터를 상대로 무리하지 말자고 생각한 것이다. 2국이 끝난 뒤, 검토과정에서 흑이 어렵지 않게 비길 수 있는 길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카스파로프는 더욱 동요했다. 3~5국을 어렵게 비긴 뒤 맞이한 마지막 대결에서 카스파로프는 초반에 간단한 수순을 착각해 한 시간 만에 항복했다.



이세돌이 무너진다고 바둑이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당장은 이세돌이 이기겠지만, 체스가 그랬듯 언젠가는 바둑도 인공지능에게 패배하는 날이 올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바둑이라는 취미가 바로 쇠퇴하는 것은 아니다. 1997년에 카스파로프가 졌지만 체스가 사라지진 않았다. 카스파로프는 오히려 컴퓨터도 참가할 수 있는 체스 대회를 제안했는데, 여기에는 컴퓨터, 사람, 컴퓨터+사람, 컴퓨터+컴퓨터 등이 참가하고 있다. 세계 최고의 체스 컴퓨터나 인간 플레이어 대신에, 여러 체스 프로그램과 이들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감독 역할을 하는 인간으로 구성된 하이브리드팀이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있다.

바둑팬 입장에서는 프로 기사와 대국할 기회를 갖기 어려웠는데 프로만큼 강한 컴퓨터와 둘 수 있다면 매우 반길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바둑 선생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 알파고에게 왜 그곳에 둬야 하는지 물으면 “15만 건의 기보를 분석하고, 수천 가지 경우의 수를 따져 본 결과”라고 대답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런 식으로 바둑을 ‘학습’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인공지능의 반대편에 베팅하지 말라고 했지만 필자는 이세돌의 승리를 바란다. 좀더 중립적으로 이번 대결을 즐길 독자들에겐 딥블루 개발팀의 이 말이 적절한 관전법이 될 것 같다. “체스판 위에서 인간과 컴퓨터가 격돌하면 최고의 체스 실력을 가진 인간 수학자, 전산학자, 엔지니어의 축적된 독창적 연구결과가 대결을 벌인다. 인간과 기계의 대결은 기계가 사고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공동으로 만든 연구결과가 가장 재능 있는 인간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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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감동근 아주대 전자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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