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살에 소금을 조금 발라…, 소금? 수박에 소그음?”
온 가족과 친척들이 모여 송편도 만들고, 과일도 깎아 먹는 추석 연휴가 시작됐지만 다본이는 그 즐거운 시간을 함께 할 수 없었다. 앞으로 40일 밖에 남지 않은 수능 때문이다. 3일 놀고 평생 놀겠냐는 부모님과 친구들의 설득에 독서실에 나와 잘 풀리지 않는 문제집을 붙들고 있던 참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차례’에 나오는 한 구절에 말도 안된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달짝지근한 수박에 소금이라니, 수박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중얼거리던 다본이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자꾸 먹는 이야기가 나오는 통에 집에 있을 각종 과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무렴,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다본이는 집에 있을 먹을 거리를 하나씩 손에 꼽으며 신이 났다. 다본이가 좋아하는 말랑한 홍시는 내일 차례 상에 올라가야하니 아직은 못 먹겠지만 냉장고에 넣어둔 차가운 수박이 우선 생각났다. 올해 마지막으로 먹을 수박인데다 소금을 바른다는 구절을 본 터라 집으로 가는 다본이의 발걸음이 더욱 경쾌해졌다.
과일 달게 먹는 비법 ➊ 소금과 온도를 이용하라
달게 먹어야 하는 수박에 짠 소금을 바르는 행동은 엉뚱하게 느껴질 수 있다. 노인들은 예전에는 소금을 종종 쳐 먹었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일본에서는 수박을 먹으면서 소금을 치는 장면이 애니메이션도 나올 정도로 널리 알려진 ‘수박 달게 먹는 방법’이다.
수박이나 다른 과일에 소금을 치는 행위는 혀의 착각, 즉 착미(?) 효과를 이용한 것이다. 한 맛에 다른 맛을 조금 넣으면 조금 넣은 맛은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본래 맛이 더 부각되는 현상이다. 분식집에서 라면을 끓일 때 설탕을 찻숟가락으로 한 숟갈 정도 넣는 것도 같은 원리다. 단, 지나치게 많이 바르면 과일의 단 맛이 오히려 소금의 짠 맛을 부각시킬 수 있어 양 조절이 관건이다.
소금 양을 조절하는 것이 자신이 없다면 과일 온도만 조절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 혀는 체온과 비슷한 36~38℃에서 가장 맛을 민감하게 느낀다. 입 안에 들어오는 음식이 그보다 높거나 낮으면 미각 외에도 온도 자극이 생겨 갖가지 감각이 뒤섞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일은 조금 다르다. 통상적으로 10℃ 정도가 과일이 가장 맛있게 느껴지는 온도라고 알려져 있다.
과일이 맛있게 느껴지는 온도가 단맛에 민감한 온도와 다른 이유는 과일이 단순히 ‘당도’ 하나만으로 맛을 판단하는 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일을 보고 입에 넣어 목구멍으로 넘기는 순간까지 사람은 모양, 향, 식감, 온도, 맛, 씹히는 소리 등 모든 감각을 총 동원해 과일을 평가한다. 홍윤표 농촌진흥청 국립원예특작과학원 인삼특작이용팀 박사는 “인간의 오감을 이용해 대상을 평가하는 관능검사 결과 수박은 10℃, 복숭아는 8~12℃ 정도가 사람들이 가장 맛있다고 생각한다”며 “같은 복숭아여도 식감이 단단한 복숭아는 8℃, 무른 복숭아는 12℃로 나타나는 등 사람들이 과일을 평가할 때는 당도만이 아니라 다양한 요인을 복합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추석 날 아침 차례를 끝내자 다본이는 드디어 홍시를 손에 쥘 수 있었다. 지난 가을 미리 얼려둔 덕에 여름에 아이스크림처럼 꺼내먹기도 했지만 역시 제철에 먹는 홍시가 가장 맛있다. 온가족이 둘러 앉아 차례상에 올라갔던 음식을 먹는 도중 어머니가 마트에 가니 벌써 귤이 보이더라며 노란귤을 내왔다. 그러나 아쉽게도 입에 넣는 순간 얼굴이 찌푸려질 정도로 셨다. 오만상을 찌푸린 다본이의 머리 속으로 어디선가 전해들은 이야기가 생각났다.
‘귤을 때리면 당도가 높아진다던데?’
과일 달게 먹는 비법 ➋ 몽둥이가 약이다?
과일은 과육에 있는 전분이 시간이 흐르면서 당으로 바뀌어 당도가 높아진다. 이 과정을 결정하는 성분이 ‘에틸렌’이라고 부르는 호르몬이다. 에틸렌은 감, 토마토, 귤처럼 나무에서 열매를 딴 뒤 숙성기간을 갖는 ‘후숙 과일’에 특히 중요하다. 후숙과일은 열매가 색이 들지 않고 녹색인 상태에서 수확한다. 덜 익은 것처럼 보이는 열매는 일정 기간이 지나면 에틸렌이 분비되면서 숙성된다. 감은 떫은 맛이 사라지면서 달고 물렁해지며, 귤은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지만 속이 노랗게 익고, 토마토는 빨갛게 익어 실제로 사람들이 먹는 모습으로 변한다.
‘귤에 충격을 주면 더 달아진다’는 속설은 바로 이 에틸렌에서 유래됐다. 에틸렌은 과일을 숙성시킬 뿐만 아니라 노화와도 관계가 깊다. 숙성되는 단계를 넘어 짓무르는 현상 역시 에틸렌으로 인해 생긴다. 따라서 과일에 충격을 주면 스트레스로 인해 에틸렌이 자연 상태보다 많이 분비된다. 과일 안의 전분을 당으로 더 빨리 바꿔 본래 가진 단맛을 내도록 돕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전분이 완전히 숙성되었을 경우 충격을 주면 과일만 빨리 상한다. 숙성이 끝나면 에틸렌은 과일이 썩도록 작용하기 때문이다. 조미애 국립원예특작과학원 과수과 박사는 “과일이 본래 가지는 당도는 때리거나 충격을 준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다”며 “전분이 당으로 덜 바뀌었을 때는 에틸렌이 빠른 속도로 숙성시켜 주기 때문에 처음보다 더 달게 변할 수는 있다”라고 설명했다.
신선한 과일도 계속 먹다 보면 질리는 법, 명절 선물로 들어오는 각종 과일 세트에 다본이는 과일을 먹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한때 모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계절 한정 메뉴로 냈던 구운 과일이 떠올랐다. 제주도에서는 귤을 구워먹기도 한다는데 자신도 각종 과일을 구워 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과일 달게 먹는 비법 ➌ 굽고 수분을 조절하라
동남아 지역을 여행하다 보면 꼬치에 끼운 바나나를 구워서 파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석쇠나 오븐을 활용한 음식이 유행하면서 고기와 생선은 물론 각종 채소와 과일을 구워먹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검색해 보니 과일을 구우면 당도가 더 올라간다는 내용이 많이 나온다.
구운 과일이 일반 과일보다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은 과일에 열을 가하면서 복잡한 분자구조가 단순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열에 의해 세포벽이 허물어지거나 섬유질이 연하게 변하면서 식감이 부드러워져 더 단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설탕과 같은 다당이 열에 의해 단당으로 분해돼 몸에 흡수가 빠른 형태로 바뀌기 때문에 더 달게 느껴지는 것이다. 김소영 국립농업과학원 기능성식품과 박사는 “과일을 구우면 화학 성분이 변해 과일이 더 달게 느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열에 의해 수분이 증발해 당도가 높다고 느끼기도 한다. 같은 각설탕 1개라도 그냥 먹는 것이 물에 녹여 먹는 것보다 더 단 것처럼 당분이 농축되는 것이다. 말린 과일이 그냥 과일보다 더 단 것도 같은 이유다.
추석 내내 온갖 방법으로 과일을 먹은 다본이는 편안한 마음으로 다시 독서실에 앉았다가 깜짝 놀랐다. 배가 너무 나와 허리를 굽히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온갖 명절 음식을 먹으면서 과일까지 다이어트 식품이라고 마음껏 먹은 것이 실수였다. 그제서야 다본이는 깨달았다. 과당도 당이다.
*이벤트는 종료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