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과학계에서 가장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개념은 ‘인류세’다. 인류세는 ‘인류가 만든 새로운 지질시대’로, 인류가 지질 역사에 흔적을 남길 정도로 지구 전체의 환경을 바꾸고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질학자들은 현재 인류세의 기준이 될 표준 지층을 고르고 있다. 이르면 올 상반기에 그 장소를 결정할 예정이다. 어쩌면 우리가 새로운 지질시대가 정해지는 역사적인 순간을 목격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인류의 시대, 인류세가 도착했다
지금 글 읽기를 멈추고 창밖을 보라. 혹시 인간의 흔적이 전혀 없는 곳을 찾을 수 있는가? 건물, 도로, 전신주, 숲을 밀어내고 펼쳐진 논과 밭, 심지어는 도로를 구르는 쓰레기까지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곳을 찾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지구 전체로 범위를 넓혀 보아도 사정은 비슷하다. 2020년 말까지 인간이 만든 인공물의 무게는 약 1조 1000억t으로 지구 위 모든 생물을 합친 무게를 넘어섰다.doi: 10.1038/s41586-020-3010-5 사람의 흔적은 오지에서도 발견된다. 기후 변화로 극지방 생태가 바뀌거나, 지구에서 가장 깊은 바다인 마리아나 해구에서 플라스틱 쓰레기가 발견되는 것이 그 예다. 인간 활동은 말그대로 지구를 바꾼다.
‘인류세’는 이렇게, 인간이 지구에 되돌릴 수 없는 흔적을 남기고 있다는 인식에서 출발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대기화학자 파울 크뤼천이 지난 2000년, 새로운 지질시대로 인류세를 도입하자고 주장하면서(처음은 아니다) 유명해졌다.
지질시대는 46억 년에 이르는 지구의 역사를 누대(eon), 대(era), 기(period), 세(epoch), 절(age) 등으로 나누는 공식적 방법이다. 공룡이 살았고 멸종으로 끝을 맺은 ‘중생대 백악기’, 고인류의 석기 사용이 시작되었고 빙하가 확장된 ‘신생대 제4기 플라이스토세’가 예시가 된다.
이런 예시들처럼 크뤼천은 인류의 등장이 지구의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이며, 그래서 인류세라는 새로운 지질시대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류세는 지질학자들 사이에서 즉각 뜨거운 논쟁거리로 떠올랐다. 정말 인류가 지구 환경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꿨는가? 그 변화의 증거가 지구의 지층에 남아있는가? 즉, 새로운 지질시대로 인류세를 꼭 만들어야만 할까?
1 스페인 비스케이만 인근, 공업단지의 쓰레기가 해변가에 쌓여 층을 이루고 있다. 인간 활동은 여러 형태로 지구에 흔적을 남기는 중이다.
2 에디아카라기 지층 국제표준층서구역(GSSP)과 그곳에 설치된 기념 동판인 ‘황금못(Golden Spike). 앞으로 정해질 인류세의 GSSP에도 같은 생김새의 황금못이 설치되며, 주변 구역은 보호받는다. 또한 인류세의 첫번째 시기인 ‘절’은 발견 장소의 이름을 따서 불리게 된다. 만약 크로포드 호수 지층이 GSSP로 선정된다면, 우리는 ‘신생대 제4기 인류세 크로포드절’을 살게 된다는 뜻이다.
무엇이 인류세의 증거가 될까
2009년, 지질시대를 정하는 일을 담당하는 국제층서학위원회(ICS)는 30명 내외의 지질학자와 인류세 관련 연구자로 이루어진 ‘인류세실무연구단(AWG)’을 결성했다.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들은 어떤 일을 했을까. 우선 인류세실무연구단은 투표를 거쳐 인류세를 공식적인 지질시대로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 다음으로는 어떤 지질학적 현상을 인류세의 증거로 삼을지, 그래서 인류세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정했다.
다양한 기록이 인류세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집약적 농업이 이뤄진 1만 1000년 전~6000년 전 사이를 인류세의 기준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시기 재배되기 시작한 작물의 꽃가루를 인류세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산업혁명을 인류세의 시작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은 석탄이 탈 때 나오는 재와 빙하 코어에 남아있는 이산화탄소를 증거로 제시했다. 인간의 발명품으로 썩지 않고 묻힌 플라스틱 쓰레기, 심지어는 인간이 전 세계에서 키우는 동물인 닭의 뼈까지 수많은 지표가 인류세의 증거로 제출됐다.doi : 10.1098/rsos.180325 인류가 미친 변화의 증거가 가장 명확하게 보이는 시기를 인류세의 시작으로 정의하려는 시도였다.
2019년, 인류세실무연구단이 투표를 통해 최종적으로 정한 인류세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불과 70년 전인 1950년대다. 이때부터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는 물론 멸종 생물 수, 삼림 소실, 비료 소비량, 인구 등, ‘대가속’이라 불릴 만큼 모든 지표가 급격히 변했기 때문이다. 인류세실무연구단은 여러 증거 중 특히 네 가지에 관심을 기울였다. 화석연료를 태울 때 생기는 찌꺼기 입자인 구형 탄소입자(SCP), 원자폭탄 실험의 결과로 만들어진 방사성 동위원소인 플루토늄 동위원소와 탄소-14, 그리고 비료 생산으로 변한 질소 동위원소 비율이다. 모두 1950년대부터 지층에 남은 흔적이 크게 변했으며, 그 변동이 전 세계의 지층에서 동시에 나타나 공인된 인류세의 증거로 쓸 수 있다.
2024년 한국에서 인류세가 공인될지도
이제 인류세실무연구단에게 남은 일은 이 증거들이 잘 드러나 인류세를 명확하게 보여줄 수 있는 표준 지층인 ‘국제표준층서구역(GSSP)’을 찾는 일이다. 작년 11월 17일, 인류세실무연구단의 의장과 서기를 각각 맡고 있는 콜린 워터스 영국 레스터대 명예교수와 사이먼 터너 영국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 교수가 국제학술지 ‘사이언스’에 인류세의 기준이 될 GSSP를 뽑는 작업이 진행 중이라 밝혔다.doi: 10.1126/science.ade2310 약 13년에 걸친 인류세 선정 작업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든 것이다.
인류세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공인 받기 위해서는 GSSP가 정해져야 한다. 인류세 시기의 지층이라도 파괴되거나 위아래 지층이 섞이는 등의 이유로 인류세의 흔적을 보여줄 수 없는 지층이 많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인류세를 가장 명확히 보여줄 수 있는 대표 지층을 선정하는 작업인 셈이다.
GSSP의 후보지는 열두 군데로, 바다와 호수, 산호초, 습지, 빙하 등 다양한 곳을 망라한다. 우선 유럽 발트해와 일본 벳푸만 해저의 퇴적물에서는 SCP를 비롯한 네 가지 물질은 물론, 미세플라스틱, 살충제 등 인류세의 다른 증거도 발견됐다. 중국과 미국의 호수 세 곳도 후보에 이름을 올렸는데, 댐이나 인간의 활동으로 일어난 물 속 미생물의 변화가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목을 받는 다른 곳은 미국과 호주의 산호초다. 이곳에는 18세기 초에 태어난 늙은 산호들이 사는데, 산호의 골격을 이루는 방사성 탄소의 비율을 계산하면 화석연료의 사용 시점을 정확히 계산할 수 있다. 이들을 포함한 열두 곳의 후보 중 인류세실무연구단의 투표를 거쳐 과반수(60%)가 찬성하면 인류세의 기준이 될 지층이 정해진다.
그렇다면 언제 최종적으로 국제표준층서구역이 정해질까. 세 곳의 후보는 이미 작년 말에 탈락했다. 터너 교수는 2월 3일, e메일 인터뷰에서 “작년 12월 17일 남은 9곳의 후보를 두고 1차 투표를 했지만 과반수가 넘는 표가 나온 곳은 없었다”고 밝혔다. 인류세실무연구단은 표를 가장 많이 받은 3개 지역을 중심으로 오는 2월 20일에 2차 투표를 진행한다. 만약 선정이 된다면 4월 마지막 주에 투표 결과가 공개된다.
인류세의 국제표준층서구역이 선정된다고 바로 인류세가 새로운 지질시대로 공인받는 것은 아니다. 인류세가 공식적인 지질시대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인류세실무연구단의 상위 그룹인 제4기 층서학소위원회(SQS), 국제층서학위원회(ICS), 마지막으로 전 세계 지질학자들의 모임인 국제지질과학연맹(IUGS)의 최종 투표까지 거쳐야 할 단계가 많다. 이 모든 투표를 거쳐 인류세가 공식적으로 지정되면, 교과서에 실리는 기준 층서 도표에 인류세가 실리게 된다. GSSP로 선정된 지역에는 기념 동판인 ‘황금못’이 설치된다.
터너 교수는 “2024년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지질과학총회(IGC)를 최종 결정 기한으로 잡고 있다”고 말했다. 어쩌면 한국이 새로운 지질 시대가 정해지는 역사적 현장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과연 새로운 지질시대인 인류세는 부산에서 그 막을 올릴 수 있을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려보자.